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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지정 / 윤 희 경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9. 10. 14.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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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추지정 / 윤 희 경

    

 가을꽃이 한창이다. 쑥부쟁이 연보라색으로 피어나 햇살이 부시다 하고, 산모롱이 돌아 나와 아홉 마디 삭신을 자근자근 꺽어내 보이는 구절초의 하얀 입술이 애처롭다. 아침마다 깔대기 주머닐 열고 용의 쓸개를 토해내는 용담, 하루 종일 가을 하늘을 퍼내리다 밤이면 입술을 다물어 버린다.

 감국(야생 국화)이 피고 나면 가을도 막을 내린다. 봄에 열 때 산수유 개나리 생강꽃들이 노란색이었듯 감국도 황색으로 계절을 마무리 한다.

 가을은 하늘이 가까운 곳으로부터 산을 잠재우며 내려온다. 개 옻단풍 북 나무를 시작으로 갈참나무 물푸레 머루 칡덩쿨들도 차례로 옷을 갈아입는다. 여름내 푸르렀던 영혼들은 간 곳 없고 산 전체가 수채화로 변한다.

 하늘 높아 별자리가 말곳해 오고 스산한 바람이 몰아치면 찬서리가 내릴 징조이다. 화학산이 영하권이고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다 한다. 농작물 피해가 입지 않도록 단속을 잘하라 겁을 덜컥 준다. 서리는 농부에게 비상계엄이나 마찬가지다. 가을걷이로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강아지와 부지깽이도 덩달아 설쳐댄다. 그러나 서둘다보면 호들갑을 떨게 되고 정신만 사나워진다. 순서를 잡아 하나하나 거둬들이자 마음을 추슬러본다.

 칸나와 같은 뿌리 꽃들은 지하실에 보관하고, 화분들은 닦고 씻어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선인장, 동백, , 매분, 국화 등. 조용하던 실내가 꽃과 나무들로 가득하고 저마다 여름 추억을 토해내느라 야단들이다. 흩어졌던 식구들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저녁상이라도 함께 해야 될 것만 같다.

 고구마 고추 들깨 애호박 팔 광무들은 서리 한방이면 맥을 못 춘다. 무는 뽑아 땅에 속에 묻고 무청은 시원한 곳에 매달아야 시래기가 된다. 들깨가 서리를 만나면 하루아침에 일몸을 털고 나와 비둘기 밥이 된다. 얼른 항아리에 담아 놓아야 안심을 할 수 있다. 어린 고추는 실에 꿰어 매달고 애호박은 얇게 썰어 햇살에 말려야 한다.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빨리빨리 문화를 실감하는 순간들이다. 농경사회의 가을이 사람을 몰아치고 몸살 나게 길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제 저녁엔 마음이 설령거려 잠을 설쳤다. 일어나 보니 첫서리 내려 세상이 하얗다. 출렁이던 벼이삭들은 아침 햇살 속으로 머리를 숙이고, 배추 잎들은 달달 떨며 몸을 움츠리고 서 있다.

 서리가 반가운 것들도 있다. 반미 콩이다. 서리를 맞아야 속살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미 콩을 서리 태라 부른다. 가을 햇살아래 알몸을 드러낸 풋풋한 콩 코투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속옷을 벗겨 놓은 어린아이 잠지를 대하듯 흐믓해온다. 더구나 콩깍지 벌어 탁탁 터져 대굴거리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서리 내린 들판은 벼이삭이 금방 하얗게 말라 달가당거린다. 어느날 콤바인이 서슬퍼런 이빨을 들고 논배미로 들어와 솩솨솨르르 몸뚱일 잘라내 알갱이들만 포대에 담고, 볏집들은 허리가 묶여 논바닥에 나뒹굴게 마련이다. 옛날 정겹던 타작마당은 간 곳 없고 뿌연 먼지와 널부러진 볏집 북데기만 덩그러니 썰렁하게 누워있다. 그러나 벼 나락 말리는 풍경은 보기가 좋다. 벼를 건조하느라 행길 반쪽을 차지하고 누워 있다. 통행이 좀 불편해도 투덜대는 사람은 없다. 누런 낱알들이 안겨주는 상큼한 냄새와 뿌듯한 풍만 감에 마음이 흐믓하게 저려오기 때문이다.

 바람기가 싸늘해 온다. 개울가 무성하던 갈대 잎들도 어느새 비썩 말라 서걱거리고, 언덕배기 억새풀 무더기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으악새 추억을 되씹고 있다.

 검은 들판에 모여드는 까마귀 떼. 까욱 까르르 가을 까마귀. 가는 세월을 재촉하며 땅속을 후벼 파내고 있다. 나이 더할수록 마음이 오싹하다가도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듣다 보면, 까마귀 소리라 하여 싫은 것만은 아니다. 듣기에 따라선 가지마 가지마하고 정답게 공명을 주고 있으니 오히려 고맙다 할 것이다.

 입동(入冬)이다. 올해는 추위가 빨리 오려나 보다. 며칠째 영하를 맴돌고 있다. 서둘러 김치를 버무려 넣었다. 김치를 담글 때마다 느끼는 것은 통 알 가지 배추 속을 보는 즐거움이다. 샛노랗게 자신을 채워낸 정성이 신선하고 대견스럽다. 배춧속을다져 넣는 여인들의 손놀림과 붉은 무체나물 위로 비죽 솟아난 청갓 내음에 그만 침이 꼴깍 고인다.

 마늘을 땅에 묻고 이불을 덮었다. 마늘은 욕심이 없 좋다. 많아야 여섯 쪽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마늘 속심은 야무지고 독하다. 시린 겨울을 이겨내야 싹이 나오는 별종, 곰도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올해 마지막 농사,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에 손을 털고 허리를 길게 펴니 짧은 하루해가 노루 꼬리만큼 앞산에 걸려 말갛게 머리를 빗고 있다.

 늦가을 열매들은 붉다. 산수유 구기자 찔레 백 당 마가 목. 저마다 가을을 뜨겁게 달궈내며 허전하게 식어가는 가슴을 데워준다. 그러고 보니 주목과 사철나무 열매도 붉다. 추운 겨울을 탈없이 보내려면 마가 목 지팡이가 좋다는데 문 앞에 하나 깍아 세워야 할까 보다.

 감국 쑥부쟁이 구절초가 지고 나면 쏜살같이 찬바람이 몰려온다. 그러나 아직도 노릿노릿 절어드는 나무가 또 있다. 낙엽송이다. 낙엽송은 팔부 능선부터 노랗게 타내려 오다 서리가 내리면 더욱 그 빛을 발한다. 아침 햇살이면 하얀 물이 들어 더욱 노랗고 저녁이면 황금빛 바다가 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잎이 무너져 내려 노란 꽃비로 산을 뒤덮는다.

 낙엽송을 마지막으로 단풍들의 몸살도 끝이 난다. 논배밈다 볏집가리들이 올망졸망 늘어나고, 소나무와 잣나무는 푸른빛을 더하며 조용히 자신을 털어 내기 시작한다. 속옷만 벗고 나머지는 푸른 모습 그대로다. 수선을 떨지 않아도 산속 어른이 되어 으젓하니 겨울을 지켜낼 준비를 한다.

 겨울이 오고 있다. 스산한 바람이 일고 뒹구는 낙엽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한 고민을 한다. 내 성숙의 깊이를 재어보며 가을을 어찌 마감해야 멋이 있을까 하고 말이다. 단풍되어 활활 타다 남을 것인가. 은행잎과 낙엽송처럼 선명하고 깨끗하게 벗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소나무와 잣나무 닮아 자신을 조금씩 털어 내며 청정한 모습으로 영혼을 씻어 내릴까.

 산은 말이 없고, 가을은 우리 곁을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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