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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수필 ㅡ 어우야담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0. 12. 2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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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야담(於于野談)


어우당(유몽인)이 모은 야담집


이 작품은 선조 광해군 대에 걸쳐 유무명 인사들의 일화와 민간의 야사와 가담항설을 모은 야담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야담은 조선 후기의 단편 서사양식의 하나이다.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의 사실성보다는 흥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사회 윤리적인 가치가 중시되기도 한다.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야담의 소재가 된다.
<어우야담>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흥미있는 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박계쇠


박계쇠는 시정 상고(장사치)의 아들이라. 감사 홍춘경 첩딸이 있어 마땅히 혼인 지낼지라. 혹 계쇠로 이른데, 그 족하 승지 천민 갈오되, 사대부 엇지 시정 사람으로 더불어 혼하리오. 춘경 갈오되, 천녀이 관계하랴 하고 마침내 첩딸로써 안해 삼은지라.

가업이 요족하여 일본 중한 보배를 무역하여 그 이(利)를 기르고져 하여 동평관에 가 객왜(客倭-왜의사신)을 본대, 왜 야광주 한 낱으로써 어리오니(자랑하니) 그 크기 꿩의 알만 하고 밤에 시험하니 형연히 등잔 같아서 일실이 난만히 빗추는지라. 생각하되, 그 값을 백배나 받기 연경만 같지 못하다 하여, 차단을 바꾸어 두터이 선물하고 연경 하는 자리에 충수(充數-수를 채우는 것)하여 노동 하원관(요동에 있는 객관)에 이르러 독을 열고 보니 정광(精光)이 조금 덜녓더니(감해졌더니), 옥하관의 이르러 밤을 타 살펴보니 암연히 빛이 없어 완연히 한 둥근 돌이라. 연시(燕市) 사람을 뵈야 갈오되, 이는 야광주라 한데, 시인이 다 대소하고 낯에 침 뱉어 갈오되, 이는 구은 것을 구슬을 지음이라. 날이 오래니 빛이 어두워 연석(보통의 돌)이 옥뉴(玉類)만도 못하다 하니,

필경의 공수(빈손)로 돌아와 이로부터 져재(시장)에 부채하야 천금이 넘은지라. 집 팔아 다 못갚고, 전원 팔아 다 못 갚고, 서울 밖의 장획(종, 노비) 팔아 다 못 갚고, 계교 궁진하고 형세 궁박하여 가만히 이부 서리로 더불어 도모하여 임의 작고한 종실 고신(告身-신분 문서)을 내고, 호부 서리로 더불어 도모하여 녹패 문서(하인으로 하여금 녹봉을 타오도록 하는 문서)를 내고, 태창 서리로 더불어 꾀하여 문서를 도준하여 삼품 종실 녹을 태창에게 가 바다 해 연(連)하야 입조하여 떳떳이 벼슬하는 사람같이 하여 이리하기 십 년이라.

써 그 빚을 갚다가 후에 일이 발각하여 옥에서 죽으니, 해부(該府)의 검시하야 삼일 만에 그 송장을 내니, 그 두 눈을 다 쥐가 구멍 뚫으니, 슬프다, 사람의 보화 중히 여기는 마음이 임의(이미) 화의 잃고 구하는 꾀니 어후(於後)의 맹얼(싹이 돋음)하야 등사(죽음에 이르는)하는 계교가 마침 남상에 이르러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흉화의 걸녀 쥐 그 눈을 뚫으니, 그 사람은 족히 책망할 것이 아니라. 사대부 시정의 자식을 선택하여 그 딸로 아내하여 그 집에 있게함이 또한 마땅치 아니하냐. 홍승지 말이 진짓 귀감이로다.


 


■ 지은이 : 유몽인(柳夢寅, 1559-1623) 호는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 ․묵호자(黙好子).조선 중기시대 문인. 설화 문학의 대가. 본관 : 흥양(興陽). 시호 의정(義貞).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였다. 문장이 뛰어난 그는 1593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어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성리학의 대가 성혼(成渾)의 문인이기도 한 그는 스승의 교훈을 거역, 파문당하여 성혼이 죽은 뒤에 그를 모욕하는 글을 써서 비난을 받았다. 선조부터 광해군에 걸친 문장가로서 벼슬은 황해도관찰사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1612년(광해군 4) 예조참판 이조참판에 이름.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과 교유하였다. ‘폐모론'에 반대하여 1623년 인조반정 때는 화를 면하였음. 이괄(李适)의 난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자, 양주 서산(楊州西山)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기자헌 등이 이괄과 동조할 우려가 있다 하여 체포되어 그가 지은 <孀婦詩(상부시)>로 화를 면하려 했으나 결국 아들 약(龜 )과 함께 사형됨. 정조 때 신원되어 이조판서가 추증, 홍양의 운곡사(雲谷祠),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 제향되었다.

설화문학의 대가였던 그는 저서로는《어우야담》 《어우집》 등의 문집을 남겼으며, 전서 ․예서 ․해서 ․초서 등 글씨에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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