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는 것을 나무의 흔들림과 얼굴에 와 닿는 느낌으로만 알고 있을 뿐 바람이란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동안의 바람은 상식적인 바람의 종류나 바람으로 인한 재해 또는 동요에서 듣던 고마운 바람, 시원한 바람 등을 알고 있을 뿐이다.
하늘을 덮고도 남을 만한 거목 바로 밑에서 나무를 올려보니 나뭇잎의 움직임이 다 다르다. 바람은 그냥 바람인 줄 알았는데 바람이 늘 똑같이 않다는 것이 새롭다. 어느 가지는 전혀 꼼짝도 않지만 다른 가지는 가진 몸짓으로 파도와도 같이 일렁이며 부러질 듯 휘어져 있다가 이내 시치미를 뚝 떼고 가만히 요조숙녀의 몸짓을 한다. 이렇게 저렇게 불다 말고는 다시 이리저리로 줏대 없이 부는 것이 마치 생명체 같아 보여 흥미를 끈다. 태풍이라는 바람을 통해 자연의 힘을 깨닫게 하고 땀 흘린 뒤에 부는 바람으로 통해 농부의 가슴을 쓰다듬으려 하는 몸짓이 신의 마음을 대신한다.
바람의 존재를 피부의 촉감으로 느낄 수 있지만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고 맛도 냄새도 없는 것이 신과 같아서 주위의 나무에 부딪혀서 그 나무의 흔들림을 통해 눈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시각적으로 바람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은 마치 인간을 배려하려는 신의 생각과 같다. 어떤 때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살며시 다가와 건들기만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성을 내는 모습은 폭풍으로 보여준다.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무료해지면 나무들을 흔들어 깨우기도 하고 소리까지 동원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한다. 또 바람의 세기로 여러 가지 소리를 낸다. 바람소리는 다른 물체와 부딪혀서 나는 소리다. 나뭇잎을 흔들어 소리를 내고, 땅위를 구르는 나뭇잎으로 소리를 내기도 하고, 건물 벽에 부딪혀 소리를 내고, 창문을 흔들어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세상을 일깨우는 소리일지 모른다. 시간을 초월하여 항상 같은 곳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어제의 바람이 아니고 늘 다르지만 늘 나와 함께하고 있어 의지가 된다.
바람은 지형적으로 계절에 따라 비슷한 바람이 불고 있고 바람의 세기와 흐름을 수치와 그림으로 표시를 해서 알려고 하고 바람으로 인한 자연현상을 파악하려하는데 익숙하기에 나는 바람의 생각과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바람의 존재를 알려고 하면 할수록 바람은 나에게 알려줄 것이 없다는 표정이다.
바람이 내 곁에 없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게 될 것이고 도저히 심심해서 못사는 세상이 되리라. 바람이 없다면 움직이던 나무가 움직임이 없고 구름도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움직임을 알기가 어렵고 바람머리라는 단어도 사라지고 움직이는 것이 없어지기에 시간이 멈춰진 것 같은 느낌이고 그 자리에 있던 풀냄새는 그 자리에 가야 느낄 수 있게 되고 나뭇잎의 움직임을 보려면 입으로 불어야 볼 수 있다. 움직임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바람의 존재를 그냥 그런 존재로 치부했지만 바람이 없다고 생각해 보면 지금의 바람은 정말 고맙다.
나무가 움직이면 나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말고 바람이 왔다고 생각하고 구름이 지나가면 바람이 지나간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람의 생각과 마음을 알려고 한다면 마음으로 다가가야겠다. 사물의 이면에 있는 것을 안다면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기가 쉽고 신의 생각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이 불 때 손을 들고 손가락을 벌려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껴보고 손가락을 오므려 본다. 갑자기 콧속이 시원해지면 바람이 온 것이다. 바람을 이용하여 놀아봐야겠다. 놀 거리가 너무 많다. 바람은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나의 인생살이와도 많이 닮았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나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기를 바라는 바람이 분다.
보아야만 믿으려고 했던 나는 바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 부는 이 바람은 내 것이고 내일 부는 저 바람도 내 것이다. 나를 위한 바람이다. 바람이 신의 생각을 대신하여 나를 일깨우는 것이라면 나 역시 바람이고 싶다. 노여워하며 부는 태풍이 내 모습이라 한다 해도 태풍이란 의미를 되새기면 태풍 뒤에 오는 맑게 개인 날을 보게 하려는 신의 배려이다.
세상사에 부딪쳐 고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 바람이 불어와 나를 움직여주고 나 역시 다른 바람이 된다. 바람은 항상 서로를 위하며 살라고 일깨워 주면서 나로 하여금 바람의 마음을 헤아리게 한다. 항상 바람이 바람을 배려하는 것처럼.
멈춰진 것들을 움직이게 해서 삶의 활력을 주는 바람이 내 바람이고 싶다. 나는 바람으로 태어나 인간사 구석구석을 돌며 멈춰진 것들을 일깨우는 행복한 바람이고 싶다. 바람에 실려 보내는 홀씨가 세상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하고 먼 길을 떠나는 철새에게 도움이 되는 바람, 높은 가지를 흔들어 존재를 알리기보다는 바람이 닿지 않는 그곳까지 다다르는 바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