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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수필이란 무엇인가? / 최민자(수필가)

수필작법 도움 글

by 장대명화 2016. 3. 4.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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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수필이란 무엇인가? / 최민자(수필가)

 

* 수필은 나에게 있어 존재의 동력이다.

삶의 날숨과 같은 것이다. 내 이름을 찾아준 도반이다. 내안의 어둠과 밖의 밝음을 소통시키는 매개체다.

 

 * 수필을 쓴다는 것은 순간순간의 보석 같은 기억들을 엮어내고 그리움과 같은 내면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니면 쓸 수없는 글이 곧 수필이다. 나의 내면은 또 하나의 소우주다.

 

 * 수필쓰기는 묵묵히 파 들어가야 하는 수작업이다.

자동화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를 위한 노력은 곧 독서와 메모<적바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수필가는 독자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를 보태주는 사람이다. 고로 통찰력을 깊게 해주는 독서에 열중해야, 즉 활자를 가까이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결국 생산라인의 최종 상품이 좋으려면 원료가 좋아야한다. 다방면의 원료(지식)을 풍부하게 확보해야 한다.

 

* 기억이란 게 비누 거품 같아서 그때그때 포획해 두지 않으면 날아가 버린다.

즉 적바림<메모>를 해 둬야 한다. 메모의 최종착역은 자기 자신이다. 잉태기간이 필요하듯이 작품도 그와 같다고 생각한다.

 

* 수필은 신변잡기가 돼 버릴 수가 있다.

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감동이라고 볼 때 수필을 쓴다는 것은 독자에 대한 서비스다. 내면의 한(恨)을 퍼내는 것은 스스로를 구제하는 수단은 되겠지만 적어도 독자에게 느낌표 하나, 물음표 하나라도 쥐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구체적인 사례에서 추상적인 사유로 나가거나, 추상적인 사유로 시작해서 구체적인 사례로 나가야 한다. 가볍다 싶으면 어딘가에 추(錘)를 달아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다 읽고 난 후에 남는 향기 같은 게 있어야겠다. 모든 수필이 다 관념적일 수는 없다. 초밥 같은 수필, 곰국 같은 수필도 있어야한다.

 

* 나는 대상(對象)수필을 많이 쓴 편이다.

대상수필은 몇 문장 쓰고 나면 막혀 버릴 수도 있다. 큰 재능은 축복이지만, 작은 재능은 올무인 것도 같다.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석수(石手)가 큰 바위 앞에 앉아서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미소를 건져 올린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코 유산(流産)은 안되겠다, 사산(死産)은 더욱 안 되겠다.” 싶은 단계일 때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만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 퇴고(推敲)에서 차이가 난다.

결국 명품은 디테일에서 차이가 난다. 나에게 있어 역점을 두는 것은 ‘덜어내기’다.(부사, 형용사 등) 다이어트를 많이 해야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가차 없이 덜어내야 통풍이 잘 되고 결국 독자에게 어필 할 수 있다.

 

* 단어의 적확(的確)한 사용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야 문장이 덜거덕거리지 않는다. 토씨 하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글의 맛이 전혀 달라진다. * 문장의 리듬에도 신경을 쓴다. 리듬이 있으면 마음에 잘 스며든다. 노골적이기보다는 은연중에 리듬을 타도록 해야 한다.

 

* 수필은 말맛과 진정성으로 읽는다.

언외(言外)의 의미를 길어 올려야 한다. 너무 죽여 놓으면 간이 안 맞는다. 한두 군데쯤은 에스프리, 위트, 삽화 등 엑센트를 넣어줘야 맛이 난다.

 

 * 마지막으로 하는 작업은 ‘글 화장시키기’다.

작품 초안이 완성되면 한동안 뜸을 들인다.(유연한 글이나 시를 읽는다) 한참 후에 다시 들여다보고 단어 하나라도 바꿈으로서 글에 생기가 돌게도 한다. ‘열정과 정열’ ‘방해와 훼방’이 다르다. 미묘한 뉘앙스에 차이가 나기도 한다.

 

*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다 잊어버려도 좋다. 만사는 테크닉이 아니라 마인드가 문제다. 좋아하면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된다.

 

* 나는 그 동안 나 자신을 ‘들어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딴짓거리를 해왔다.

필자는 이 말씀을 “깊은 사유에 바탕을 둔 서정 내지는 철학적 수필을 많이 써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 수필에 있어서 허구성의 수용 여부 문제에 대한 최 선생의 견해는 “수필의 정체성(진정성)이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전 옛 체험에 보탠 추체험(자신의 어떤 체험에 약간의 살을 덧붙인 것; 필자의 해석)의 정도는 수용이 가능하다.”고 최민자 선생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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