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송 수필읽기
작은 문학관
1. 수필과 나
청개구리가 운다.
정여송
한유로운 뻐꾸기 소리는 연두 빛 산자락에 서성이고, 늦은 봄이 힘 기울여 마지막 철쭉을 피우던 날, 해가 서산 하늘을 붉게 물들이니, 동네 어귀 느티나무에서는 새들이 저녁채비로 소란한데, 들 논의 농부가 일손을 이르게 놓자, 마을에선 수수로운 이웃들이 피운 하얀 연기가 날아오르고, 소박한 저녁상 앞에서 오순도순 만개 하는 이야기꽃에, 아이들 소리 하나 둘 잠들어 노곤한 하루가 이지러질 때, 둥실 떠오르는 저녁 달빛에 끌려 나가, 어릴 적의 동무들이 그리워 청개구리가 울고, 소사나무를 응시하며 거기에 서있는 이유를 발견하고 싶기에, 글을 쓰는 데는 아무리 오랜 기간이 걸려도 노련미라는 게 없어 매번 생급스럽기에,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혼자 운전을 하거나 차를 마셔도 멋있건만 현실의 나는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기에, 답답한 가슴 털어 내기 위해 아무런 느낌도 없이 무작정 달려야 하기에, 속절없이 쏟아낸 하소연이 넋두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 욕심 부린다고 더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못하기에, 순수한 마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만이 함께 있기에, 생각하기 전의 말과 말 한 후의 생각이 같지 않기에, 뭔가를 결심해서 잘 하려고 하면 오히려 잘되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에, 모든 일은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는 일이 너무 많기에 청개구리가 울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남모르게 거금의 성금을 선뜻 내는 성의 때문에, 슬플 때 같이 울어주고 싶어 하는 배려 때문에, 괴로움이나 슬픔을 과감히 벗어 던지면 기쁨이 다가와 감싸주기 때문에, 감당해 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 앞에서도 “예”하는 긍정의 대답을 잊지 않기 때문에, 꿈이 산산조각 날지라도 한 조각이나마 붙잡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순간 바른 생각이 들어올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에, 선한 의지라면 강물이 닿는 끝까지도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험한 길을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면서 오른 정상에는 승리의 깃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너무 잘 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데서 편안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곧 떨어질 낙엽이지만 정열을 불태우라는 뜻을 알기 때문에 청개구리가 울고,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따를 마음이 없어 핑계와 궤변만을 늘어놓으므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알아도 알지 못하는 미망에 허우적대므로, 바른 안색으로 감정을 다듬어내기보다 이죽거리며 야유하는 모습이 볼썽사나우므로, 툭 하면 채찍처럼 휘두르는 말로 깊은 상처를 주고도 덤덤한 얼굴이므로, 봄바람처럼 상쾌하게 불다가도 갑자기 이해 할 수 없는 돌풍으로 변하는 기분을 알 수 없으므로, 남이 하는 좋은 일을 본받고 배우려 하기보다 비난하고 질투하면서 깎아 내리려하므로, 양보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도 달리 방법이 없는 상대더러 양보하라고 다그치므로, 자신을 온전히 알지 못하면서 남만 쫓아가려는 철부지 행동이 어리석으므로,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더 좋은 것을 더 소유하려고 눈에 쌍초롱을 켜므로,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그릇된 사고가 야수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 내므로 청개구리가 울고, 은빛 머리의 노신부가 허리 굽혀 아이들과 일일이 손잡는 모습이 성스러워서, 자존심을 가진 착한 심성으로 살아남으려는 약자들의 몸짓이 차라리 아름다워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에서, 내세울 것 없다며 한 발짝 물러서는 겸양의 미덕에서, 하늘이 자꾸 바라보고 싶어지는 고마움의 뜻에서,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숨이 멎는 듯한 감동 안에서, 모든 일에서 잘못을 찾을 때 자기 자신부터 돌이켜보는 어진 마음 앞에서, ‘이거다’싶은 대목을 만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전율에서, 맑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마음속에 심으려는 의지에서, 해처럼 많은 혜택을 베풀어준 것이 곳곳에 있음을 겨우 알게 되면서 청개구리가 울고, 가짜가 너무 진짜 같은 데에 쾌감을 가지니까, 돈 때문에 비굴해져야 할 때가 많으니까, 아무리 돈이 많다한들 그것으로 인생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없으니까, 임종을 앞둔 시간이 짧아질수록 살고 싶어 하는 소망이 더 커지니까, 사람들이 권력이나 상사나 자신이 필요한 것의 앞에서만 온순해지니까, 세상이 평소에는 조용하고 안전한 것 같으나 들여다보면 불안과 불확실로 가득 차 있으니까, 제2차 세계대전 이전보다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 갖는 행복지수가 열 배 정도나 적다고 하니까, 겁에 질리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눈을 감아 또 다른 불법을 낳게 되니까, 윤리는 가치를 잃고 질서와 정의의 개념도 모호해지고 삶의 고귀함이나 생명에 대한 존중이 적어지니까, ‘더 나아짐’이라는 이름으로 덤벼들어 자연 그대로를 놔두지 않고 마구 손상시키니까 청개구리가 울고, 위대한 영혼이라 불리는 ‘간디’의 울음은 아닐지라도, 민족의 양심에 호소하여 남북통일을 이루려 한 ‘김구’의 울음이 되지 못해도, 사랑과 동정의 화신인 ‘테레사’의 울음소리 낼 수 없으며, 항일 독립에 앞장서 만세소리 드높인 ‘유관순’처럼 울지 못하지만, 누가 뭐라 추어주면 으쓱해지는 어깨를 지그시 누를 수 있는 마음이 되고, 기쁨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숨어있는 희망을 찾으려는 몸짓으로, 온정으로 스며들고 믿음으로 젖게 하는 농담을 나누면서, 잘 발효된 술처럼 생각도 느낌도 농익히려는 자세를 갖춰, 주변의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고 돌아보려는 마음으로 외치고 싶어, 청개구리가 운다.
마중물
정여송
여기 있었네그려. 이런 산골로 들어오니 만날 수 있구먼. 얼마만인가. 근 사십년만이 아닌가 싶네. 그러고 보니 우린 죽마고우일세.
내가 초등학교라는 데를 막 들어갔을 때 말이야. 그 시절에 자네는 신식이란 바람을 몰고 왔어. 어린 눈으로 처음 봤을 때 괴물이라고 생각했었지. 사람 형상을 했으면서도 머리가 없었고, 반기듯 양팔은 벌렸지만 짝짝이 팔을 가졌고, 한 다리로 서있는 것이 볼썽사나웠다네. 야트막한 판자 지붕 밑에 혼자 있는 모습은 왜 그리 측은해 보이던지. 선생님이 자네를 가리키며 “펌프우물”하던 생각이 생생하구먼.
차츰, 여느 동네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지. 자네는 젊은 아낙이었던 우리 어머니들의 물 긷는 힘을 덜어주었어. 퍽 좋아들 하셨다네.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깊은 속 얘기를 흥건하게 토해냈잖아. 알 수 없었던 것은 열심히 일하다가도 쉼이 길어지면 한없이 나태해졌어. 피식피식 바람 새는 소리도 냈지. 그러다가 한바가지 물로 목을 적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지런쟁이가 되곤 했다네.
그러네. 자네에겐 몸 속 깊이 간직한 많은 물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는 작은 물이 있었다네. 한두 바가지의 그 물 말일세.
깊은 물을 마중하러 나가는 물
물씨
마중물
“마 ․ 중 ․ 물, 마중물, 마중물”
어감이 좋아 자꾸 불러보게 되는구먼. 마중 나가는 그리운 추억 때문인가 보네. 우리 집에는 마당 한가운데 너른 화단이 있었는데 꽃나무가 아주 많았다네. 그 숫한 꽃 중에서도 수수꽃다리(라일락)와 불두화와 능소화는 지금도 가슴 속에 피어 바람만 불어도 일렁거리지. 향나무 가장자리에 빙 둘러 피던 노란 달맞이꽃은 또 어떻고.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무렵이면 들려주던 신기한 소리를 자네도 들어봤을 거야. 톡, 톡톡, 톡톡, 톡…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달마중하느라 벙그러지던 그 소리를 말아야.
내겐 언니가 넷이 있지. 언니들을 참 좋아했네. 셋째와 넷째 언니가 외지에 나가 공부했는데 주말이면 집에 왔어. 언니들을 마중 가서 손잡고 걸어오던, 양옆으로 키 큰 코스모스가 만발했던 길. 마중이란 말만 들어도 그 길은 곰살스럽게 눈물샘 위로 떠오른다네.
내가 공직에 있을 때 말인데, 좀 늦은 퇴근을 하는 날이 있었지. 그런 날이면 노모도 어김없이 나를 마중했어. 그 때도 손을 잡고 걸었지. 어머니는 손에 힘을 주면서 무언의 사랑을 흘려보냈다네. 그 때마다 전광석화가 지나가는 듯한 전율을 느끼곤 했어. 어떠한 불덩이가 그보다 뜨거울까. 그리워서 얼굴 내미는 추억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열도 아니라네.
고요한 대낮. 실로 오랜만에 한적한 산골에서 자네를 만나니 반갑네그려. 손 한번 잡아볼까나. 목이 마른가보구먼. 함지박에 담겨있던 물이라네. 한 모금 마셔보게나.
보이지 않지만 자네 몸속으로 흘러드는 마중물의 ‘몸짓’이 보이는 듯하네. 자네의 한 팔을 잡고 오르락내리락 힘질을 해 보네. 콸콸콸콸… 호탕하고 질퍽한 웃음소리를 쏟아내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네그려.
겉은 차갑고 흉해도 속은 따스하고 늡늡하던 자네 아닌가. 갈증 난 목을 축여주는 한 모금의 물을 감지덕지하며 몇 십 배, 몇 백 배로 불려주는 마음. 본받아야 할 심성이네.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몰라. 지금은 아는 게 많은 것보다도 가진 것이 풍족하여 흥청거리며 쓰는 ‘수도족(水道族)’이어야만 알아주는 세상이라네. 자네 같은 ‘펌프족’은 여운 가득한 ‘古’자가 붙었으니 이제는 동화나라로 이민이나 가서 터를 잡아야 할 걸세. 넉넉하지만 함부로 퍼내지 아니하는 자네의 뜻을 알기나 하겠어. 마중물로 먼저 입맛을 당기려는 자네의 고집이 난 좋네그려. 운치야 ‘우물족’이 최고이긴 하지, 소박하기도 하고. 그러나 두레박을 올리고 내리는 수고만큼만 주는 깍듯함이 있잖아. 흘러넘치게 퍼주거나 덤으로 얹어주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는 고지식을 가지고 있지.
해가 우리를 보며 따스히 웃고 있네그려. 자네에게서도 온기가 흐르는구먼.
마중물에 대해 생각을 해 보네. 그저 한 바가지의 물인데, 그것이 무엇이기에 몸속으로 들어가 고인 물을 흔들고 깨워서 세상 밖으로 솟구치게 하는가. 필경 제물로 쓰는 희생양 같네그려. 자비지심이라고 해야 할까. 운동하기 전에 몸을 푸는 기본체조라고 해 둘까. 아니면 일상을 촉진시키는 자극제로도 풀어보고 싶구먼.
이보게. 내 삶에 있어서도 마중물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네. 나도 그거 하나 소중히 간직하고 싶네. 마시지 않고 다시 토해내야 하는 첫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들이키면 삶의 의욕이 살아나고, 아름다운 어휘들이 쉴 새 없이 솟구쳐 문장을 이루도록 말일세. 그래서 내 마음이 머무는 곳에 향기를 남길 수 있으면 좋겠네. 간혹은 바다와 같은 왕양한 기상이 품어 나오고, 파도와 같은 격렬한 정열도 부려보기도 하며 구름같이 발발한 야심도 펼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함께 있어도 저마다 고독한 세상이라네. 그래서 마중물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립다네. 책 속에서 만난 성인들의 희생심이나 보리심에서 볼 수 있었던 것 말일세. 가끔은 수고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살아가는 낮은 자리의 사람들에게서 엿볼 수 있지. 그들은 빛보다도 소금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네. 밝지만 그림자를 드리우는 빛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스스로 녹으며 말없이 도와주는 소금 말일세.
그 사람들의 삶이 끌어올린 물로 나는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며 화분에도 시원하게 뿌린다네.
나는 누구의 마중물이 될꼬.
목변석(木變石)
정여송
몇 천만년이 아롱져 있다. 침묵이 두텁게 흐를 뿐 어느 한 곳에서도 느슨함이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장구한 세월이 농축된 만큼 단단함의 서슬이 빛을 낸다.
멀리서 볼 땐 영락없는 나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돌덩이다. 손으로 만져본다. 차다. 생각에 잠겨 응시하면 어떤 덩어리의 형체가 다가오고 또 생각을 내려놓고 바라보면 텅 빈 공간으로 펼쳐진다. 경북 영덕을 지나 강구라는 곳. 경치 좋은 해변 도로의 휴게소 같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것들이 모여 있었다.
규화목이다. 광물화 된 나무의 유체(遺體). 미이라. 제2 전시실에는 그것들의 속내를 발가벗기기라도 할 듯이 단면을 매끄럽게 가공하여 전시해 놓았다. 표면에는 쌓인 시간이 눌려져 있고 발자취가 그려져 있으며 기쁨인가 고통인가 싶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알지 못할 어떤 뜻을 한 입 크게 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가가 가만히 안아본다. 그것에 녹아있는 삶을 마음으로부터 읽는다. 희미한 여백만 보인다. 조그마한 손전등이라도 들어야 할까보다. 다시 닭이 모이를 쪼듯 낱낱으로 쪼갠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가 되고 만다.
세월이 과도하게 흐르면 나무도 돌이 되는가. 나무는 돌이 되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돌은 나무가 되기 위해 열병을 앓았나보다. 신탁이듯 운명이듯 만난 돌과 나무. 그것들은 서로 배격하거나 대립하지 않았다. 되레 희망을 가지도록 위로하였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 ‘나’가 되었다. 그랬더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가 사라졌다. 확고한 사실이나 진리라고 여겨왔던 것들도 무너져 내렸다. 나무 반, 돌 반이 될 수 있었던 증빙서류들이다.
옛날, 아주 멀고 먼 그 옛날. 수용성규산은 진작 알아차렸다. 생물은 죽으면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또한 어떤 특별한 환경을 만들어 주면 화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랬기에 지각변동으로 쓰러지게 된 나무를 살려내고자 모험을 걸었다. 보통을 넘어선 생각으로, 뭔가 다른 관점으로, 보이는 면이 아니라 숨겨진 다른 면을 이해하려고 깊이 헤아렸다. 속 깊은 근심걱정이고 거부할 수 없는 애정이었다.
어쩌면 괜한 일이라며 빠지지 말라고 붙잡는 생각과, 벅찰 정도의 커다란 짐이 될 수 있다는 부담과, 너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유혹 사이에서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했을 성싶기도 하다. 그러나 한다면 하는 것이고 하기로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밀고 나갔다. 수용성규산의 숭고한 흐름이 시작되었다. 무지하게 오랜 세월을 쓰러진 나무속으로 사려 깊게 베어들고 또 베어들었다. 산소를 차단시키고 침입자와 전투를 벌이며 나무를 보호하였다. 지극정성으로. 그 대담성은 반 범죄적이기도 하지만 영웅적인 행위이기도 하였다. 수용성규산 스스로를 축복하는 질탕하면서도 엄숙한 축제였다.
쓰러진 나무의 속내도 엿들어 본다. 꺼져가는 생명에 불꽃을 당겨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면서 어디론가 가야만하는 방랑자가 되었다. 애먼 일이었으니 그대로 소멸되기란 억울한 부분이 있지 않았겠는가.
우연이었다. 아니 필연이었다. 때마침 찾아든 수용성규산. 나무는 정체불명의 말뚝에 강하게 묶이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불안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한 믿음도 생겼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무서운 밤길을 같이 걷는 기분이었겠지. 한두 걸음 옆에 동행자가 있다는 믿음만큼 든든한 게 어디 있을까. 머리는 여러 군데를 바라볼 수 있지만 마음은 바보처럼 한군데만 볼 줄 아는 법. 단 하나인 마음의 눈으로 해바라기를 할 수 있었던 나무는 수용성규산에 온전히 의지한 채 부활을 꿈꾸었다.
하얀 규화목. 나무의 결은 숨을 쉬고 박힌 돌은 빛을 내며 조화를 이룬다. 줄거리 없는 섬세한 영상만으로 긴 울림을 주는 드라마다. 그것들은 암흑과 위험으로 가득한 이야기나, 끝부분이 걱정되어 알기 싫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대하거나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것도 아니다. 나무는 그저 변화무쌍한 기후에 시달리다 쓰러졌고, 수용성규산은 주어진 길을 어김없이 조금씩 성숙의 자세로 나아갔을 뿐이다. 그런 연후에 제 속도에 맞춰 운동량을 늘이듯이 천천히 변화하였다. 점점 화석화되면서 오팔처럼 수정처럼 굳어져갔다.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져 거대한 규화목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규화목을 ‘걸작, 사랑의 완성’이라고 말하련다. 세상을 향해 ‘영원한 사랑’이라고 소리치련다. ‘사랑가’를 창하듯이 노래하련다. 갖은 고통과 고난을 감내하면서 끌어안은 불멸의 사랑. 나무는 돌을 믿어주었고, 돌은 나무에게 힘이 되면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였다. 그것은 이해를 넘어선 완전한 사랑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복잡다단한 사람과 단순한 사람과의 화합을 만든다. 이념과 사상이 다른 나라와 나라의 벽을 허문다. 나무와 돌이 하나가 되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도 창조해 낸다.
규화목을 에로스가 만든 문화재라 일컫는다.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요, 전설이며 신화이다. 그래서인가. 그것 앞에서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되었다. 숨김없이 내보이는 그것들의 힘겹고 두려워하던 모습, 흉측하면서도 황홀한 상처, 아름답고도 귀한 자태에 조용히 옷깃을 여민다.
희아리
정여송
물이 창공으로 흐른다. 너울너울 날갯짓하며 계곡물이, 강물이, 바닷물이 해를 향해 떠간다. 멍석 위에 널려있는 고추의 몸속에 머물던 빨간 수액도 하늘로 오른다. 마음도 따라 날아간다.
토실토실 잘 영근 빨간 고추의 두텁던 살집이 쏙 빠졌다. 씨앗이 비치도록 얇아졌다.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핏줄을 감춘 맑고 투명한 것이 참으로 애틋하다. 흔들자 맑은 소리가 난다. 도나캐나 다 내어주고 비워내어 초연해진 것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다. 무구한 깊이가 짚어진다. 차라리 비어 있어서 전율케 하는 해맑음이다.
어머님은 고추가 잘 마르도록 이리저리 뒤적인다. 자식에게 쏟아 붓던 정성을 모아 손질한다. 무언가를 가려낸다. 빨간 색깔을 잃고 하얗게 얼룩져 변해버린 흉한 고추이다. 희아리. 고추의 본은 커녕 고춧가루도 되지 못하는, 고추이기를 거부해야만 하는 절망의 몸이다. 쓰일 데라고는 없어 곧 거름 밭으로 내던져질 운명에 놓였다. 멍석 귀퉁이에 모은 그것들을 들여다보다가 온통 하얗게 돼버린 하나의 희아리집어 든다.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그 위로 노인 한 분이 선하게 다가온다.
곱상하게 늙어가던 친우의 어머니다. 그 분은 가까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경미한 증세로 치매의 길을 내딛었다. 점, 점, 점, 점. 남루한 옷차림으로 길을 배회하는 중증에 치달으면서 온갖 물건들을 방안으로 들였다. 버려진 옷가지와 신발, 심지어 망가진 대소쿠리며 깨어진 플라스틱 바가지를 주워와 늘어놓았다. 친우의 가슴은 탈대로 다 탔다. 그 분은 기억이 하나하나 상실 될 때마다 잊어버린 만큼의 그 무엇을 채워야한다는 불안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하루하루가 낮과 밤 구별 없이 고통스럽게 혼란을 주는 백야(白夜)였을 것이다. 발버둥 치며 찾으려는, 출구로부터 더욱 멀어져 가는 미로였지 않을까.
치매.
그것이 달라붙게 되면 기억이 희긋희긋 바래진다. 고스란히 간직하던 추억들은 하나 둘 쓰러져 가고 자리에 남았던 흔적마저 지운다. 깨끗하게, 아주 뽀얗게. 더 이상의 무엇을 공유할 수 없는 머릿속 무대에는 백지의 자유로움만이 공연된다. 오늘에서 옛날로 다시 한 번 거꾸로 살아가는 삶의 길을 천방지축으로 걸어간다.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고 기쁨이 기쁨이지 않는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넌다.
치매가 하는 짓을 보면 치사하고 비겁하다 못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야당 맞은 심술로 머릿속을 온통 헝클어 놓는다. 허공을 날듯이 사부랑삽작 움직이던 사고력을 날지도, 퍼덕이지도, 깃털마저 세우지 못하도록 윽박지른다. 그리고는 정신연령을 바짝 낮춘다. 무조건 먼 과거의 수로로만 기억몰이를 한다. 신혼의 골목으로, 어릴 적의 마당으로 끌고 가서 생판 딴 사람으로 둔갑을 시킨다. 숫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어린아이 꼴로 만들어 이르집도록 꼬드긴다. 걸핏하면 화를 불러내고, 다랍게 굴라고 부추긴다. 복잡한 일로부터 구출이나 해주듯 그저 단순해지라고 몰아세운다. 엊그제의 일마저 담아놓지 말고 철철 흘리고 다니며 있는 대로 흘려버리라고 들쑤신다. 노예처럼 끌고 다니다 볼썽사나운 겉피만 남겨준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원래, 치매는 조그만 기억조차 허용하지 않고 군림하며 영역을 넓혀 가는 포악함을 지녔다. 안온한 삶에 딴죽 거는 등에처럼 고약함 또한 둘째라면 서러워한다. 웃다가 울다가 변덕을 부리며 격렬하게 상승, 하강하는 감정으로 종잡을 수 없게 하는 괴팍함을 특기로 친다. 안하무인이다. 아무리 얼굴이 없다손 치더라도 어찌 그런 횡포를 부린단 말인가. 비유 맞추는 데 능한 바람만이 그 속물과 친한 척 들락날락 거린다.
영화 ‘축제’에서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그 관계들,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을 그려내면서 ‘축제’라는 제목을 붙였다. 모진 지병으로부터 끝이 난 망자를 축하하는 자리이고, 힘든 수발과 지켜보기조차 안타까웠던 산 사람들이 해방되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축제’는 노쇠해지면서 차츰 작아져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할머니와, 그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손녀 사이에 주제를 숨겨 놓았다. 치매는 세대와 세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는 중이라고, 질병이라기보다 사람관계를 맺어주는 한 가닥의 연결고리라는 것을 귀띔한다. 끊어질 것 같은 줄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매듭으로 묶고, 비워내어 작아짐으로 해서 더 넓게 향유할 수 있다는 뜻을 넌지시 던진다.
비워내는 건 아무것도 담지 않는 것. 아무것도 담지 않는 건 깨끗해지는 것. 깨끗해지는 건 하얗게 되어 가는 것. 하얗게 되어 가는 건 희아리. 희아리는 치매. 치매는 끈.
객토(客土)
정여송
“그 때는 왜 죽자고 일만 했는지 몰러.”
“그러게나 말여. 요즘 세상에 옛날 같이 일만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돼?”
“세상 참 좋아졌어.”
삼사십 년 전 젊었던 시절에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일했던 노인들에게서 듣는 넋두리다. 그가 마음에 담아두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그때는 설을 쇠고 입춘이 지나 언 땅이 풀릴 때쯤이면 들판 논배미마다 땅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객토를 하였다. 모래땅에는 다른 성질의 차진 황토 흙을, 차진 땅에는 모래흙을 섞어서 토질을 개량하려고 대대적으로 사업을 벌였다.
집집마다 노약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괭이와 삽을 들고 황토와 모래흙을 파내었다. 남자들은 지게에 담아 등에 짊어지고, 여자들은 양은 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들판 논두렁을 걸어서 운반했다. 기껏 사오십에서 이삼십 킬로그램에 불과한 분량이었으나 둥개지 않았다. 수백의 사람들이 며칠씩 겨끔내기 없이 일해야만 하던 것을 요즘에는 굴착기 한 대와 대형화물차 한두 대만 있으면 몇 시간 만에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감이다.
그러나 오직 사람의 힘이지만 억척스럽게 일했던 모습들. 그것이 오늘 같은 좋은 세상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노인들의 이야기는 한 페이지의 소박한 역사가 된다.
귀 기울여 열심히 듣고 있던 그가 가을 파종을 결심한다. 봄 시기를 놓쳤기에 알맞은 씨앗을 골라 뿌릴 요량이다. 먼저 객토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적 영농법을 적용해 보려고 깊은 생각에 골똘 한다. 창작하는 일에만 열심이어도 만족스러울 테지만 가르친사위가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늦게나마 새로운 수확을 올리려는 생각이 가상키도 하다. 하지만 땅만 적당히 갈아엎는다고 소출이 저절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농사라면 몰라도 학문에 있어서는 희망사항으로 끝날 개연성이 클 수도 있다.
군걱정이다. 굳은 심지가 있는 그는 토양을 바꾸더라도 자신이 하는 수필이 주체임을 명심한다. 탐구의 기승을 타고 장르 구분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 또한 삼가야 할 수칙임을 잊지 않는다. 일종의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지키려는 것이랄까. 작품의 질에서도 마찬가지다. 기후와 토양을 불문하고 씨앗을 분별하지 않은 채 마구 뿌려선 곤란하다는 것을 간파한다. 아무리 많은 창작을 일구어낸다 해도 작품의 수준이 낮으면 허사가 되니만큼 질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작심도 끝까지 밀고나간다. 땅심에도 생각을 기울인다. 작품이 듬직하게 자라나도록 인내해야 하는 것을 근본과 원칙으로 삼는다.
그는 옛날 방식대로 흙짐을 져 나른다. 한 짐 두 짐…. 무게를 지탱하는 두 정강이가 걸음마다 무겁다. 그럴 도리밖에 없는 것이 꼬두람이 동생이나 조카뻘 같은 사람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까닭이다. 생각에 무게는 있으나 둔탁하고, 깊이는 있으나 반짝거림이 적으니 그들과 발맞추기가 제곱으로 힘이 켠다. 오뉴월 하루 볕도 무섭다는데 십 년 세월이야 천양지차다. 늘어진 보폭을 당겨 서둘러 걷고, 그들이 곤한 잠에 빠져들 때도 홀로 깨어 독서삼매에 매진해야 한다. 아난다(阿難陀)의 기억력을 보쌈 해야 할 판이다. 세대 공감을 가지려면 문자메시지의 답장을 곧바로 챙기고, 긴장감을 곧추세워야 뒤처짐이 없다. 그들은 윗사람의 말에서도 오류를 찾아내는 명석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덩달아 그들을 통해 오류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지혜로움을 지닌다.
무엇을 바라고 어떤 것을 위한 객토인가.
무서운 날카로움으로 발전해가는 기계문명 속에서 아직도 한 군데 남아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가 있는 문학지대로의 도피이다. 시계바늘을 되돌리고, 뮤즈의 미소도 발을 멈추는 곳으로의 정행이다. 어쩌면 살아갈수록 안정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더 복잡해져 가는 인생의 정답을 캐보려는 행보일 수도 있다. 이것도 아니라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나’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내 안의 나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을 더 힘들게 하고, 고문을 가하는 것이며, 진저리를 일으키는 일이다.
스님이 설법을 하던 중 탁자를 ‘탁’ 치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고 해보자. 경청하던 많은 사람들이 ‘뭘까’하고 생각에 잠기는 가운데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경청은 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양 흩트림 없는 침묵이 이어진다. 순간 방바닥을 ‘탁’ 치는 것으로 응답하는 ‘나’라면 기대해볼만 하다. 하지만 그토록 열려 있어도 알고 보면 대단치 못하고 그저 밍밍한 한 중생이라는 것 외엔 그 무엇도 아닐 테지만.
그는 객토를 하면서 깨달음 한 올을 집어 올린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태동안 대학원에서 석학들의 학식을 즐겼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접하게 된 일이지만 책을 벗 삼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발하는 빛을 읽는다. 객토를 강도 있게 실행하지 않았더라면 보상받기 어려운 보람이다.
인간관계에서 오가는 말들은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적잖은 상처를 입히지도 한다. 주어서 받기도 하고 스스로 받기도 한다. 거침없는 상처야말로 자질구레한 것부터 가슴에 박히는 대못이 되어 빠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쓴 서적은 사람이 썼지마는 다르다. 일방적으로 베풀고 헤아리는 마음을 고집하는가 하면 깔축없다. 소리 없는 깨우침과 정신을 선사할 뿐이다. 구순하기에 독서상우(讀書尙友)가 이루어진다. 도원(桃源) 같은 곳이라면 과언일까. 그래서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빛이 난다.
그의 행보는 일상적인 ‘나’ 대신 본질적인 ‘나’를, 무의식적인 삶 대신 의식적인 삶을, 세속에 적당히 타협하려는 처세훈 대신 자신에 도달하려는 자아실현에 성실하려는 마음이다. 농한기 없는 부지런한 농부가 되는 목적이라고 해야 할까.
객토.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을 구체적으로 긍정하려는 가을 파종을 위함이다.
불꽃놀이
정여송
소리가 핀다.
지인으로부터 손수 지은 참깨를 한 되 선사받았다. 볶을 요량으로 씻는다. 조바심하지 않으면 손실이 큰 참깨 씻기는 정성을 요구한다. 불에 달군 냄비에 씻은 깨를 털어 넣는다. 찍-, 물기와 불기가 부딪히며 차가운 비정(非情)의 소리를 낸다. 달래듯 길쭉한 나무주걱으로 슬슬 젓는다. 계속 열기를 받으면서 수분이 증발되고 더 증발되면 깨알들의 웃음소리가 터지기 시작한다. 토도독 톡톡 탁탁…
그 소리가 마치 소낙비 내리는 소리 같다. 운동장 가득 아이들이 뛰어노느라 떠드는 소리와 비슷하다. 작렬한 땡볕으로 제 몸을 태우기라도 하는 양 울어대는 매미소리 아닌가. 냄비 속에서 들려오는 아우성. 깨알들은 노릇노릇 통통해지고, 주걱 젓기가 빨라진다. 축제의 도가니. 참깨들의 폭죽놀이가 절정을 이룬다. 그 위로 광안대교에서 펼쳐졌던 거대한 불꽃쇼의 무대가 포개어진다.
소리가 핀다.
꽃이 터진다.
에이펙 개회 전날, 아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세계의 정상들이 모여들었다. 어스름 저녁이 다가올 때 광안대교와 바다는 술렁거렸다. 전국각지에서 달려온 열정적인 사람들과 부산에서 모여든 인파도 같이 술렁거렸다. 이천여 년 전 한 젊은이의 산상설교를 듣기위해 몰려들던 사람들처럼 백사장을 빼곡히 메운 사람, 사람, 사람들.
장엄한 음악이 깔린 가운데 거북선 여러 척이 연기를 뿜으며 등장하고, 광안대교 상판에 ‘웰 컴 투 부산’이라는 문구가 점등되면서 불꽃 쇼가 시작되었다.
축포 소리에 따라 피어나는 영롱한 오색의 빛. 팝콘이 튀겨지듯, 목화솜이 피어나듯, 흥부네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지듯 명멸한다. 야자수인가, 해바라기인가, 안개꽃이던가. 천상정원에 이름 모를 꽃들이 만개하니, 수천마리 벌 나비가 형형색색으로 난무한다. 빛의 향기에 자지러진다. 창조와 생명을 상징하는 찬란한 불꽃은 천상낙원의 은하수가 되었다가 신라 천년을 이어 온 금빛왕관으로 변한다. 급기야 에밀레의 오색 종소리가 되어 결결이 울려 퍼진다. 대교에서 바다로 1km 넓이의 하얀 불꽃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장대한 나이아가라 폭포수가 무색하다. 야천절벽에서의 빛 사태. 분수되어 치솟는 빛의 향연, 빛의 환희, 빛의 찬가, 빛의 화합, 빛의 상생….
억압을 떠나 자유로이 춤을 추는 빛. 젊음의 생명력을 지닌 열아홉 살 소녀의 아름다운 미소다. 똑바로 허공을 찌르고 신기하리만치 미련 없이 사라지는 트럼펫 소리다. 푸른 하늘을 힘차게 차오르며 자유자재로 기교부리는 가창오리 떼의 비행이 아닌가. 활력과 자유로움을 주는 깃털이고 시며 외침이다. 말없는 말이요 길 없는 길이다.
영광과 승리를 다짐하는 조수미의 ‘챔피언’이 흐른다. 메트릭스Ⅲ 주제곡과 부람스의 ‘헝가리안 댄스’, 많은 곡이 찬연한 광휘와 함께 마음을 가로질러 흐른다. 베르디의 ‘레퀴엠’, 김수철의 ‘천년학’, 베토벤의 ‘합창’ 등 연주곡이 빛과 함께 어우러지자 들뜨던 기분이 북받쳐 오른다. 고조되는 흥분과 함성. 아, 아-.
백사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빛으로 수놓은 밤하늘의 진경을 촬영하기 위해 모두가 폰을 켜 들었다. 예서제서 켜 든 조그마한 사각형의 푸른빛이 또 다른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불꽃놀이의 불꽃놀이. 천지가 빛천지니 이 또한 장관이다. 깜찍하게 연출된 신조풍경에 몸이 얼어붙는다.
불꽃. 한껏 황홀하게 피었다가 절정의 순간에 쓰러지는 운명. 짧게는 3초에서 길어야 7초간을 사는 찰나적인 삶이지만 황홀함의 극치에 눈이 부시다.
짧고 굵게, 굵고 짧게.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사람은 백일을 한결같이 좋을 수 없으며, 권세도 십년을 못 간다 했으니 3초면 어떻고 7초인들 어떨까. 눈부심이 제일이고 화려함이 으뜸이며 빛이 되어 빛으로서 빛을 발했으니 무엇을 더 바라리.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안중근과 윤봉길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쳐 불태우고, 이상과 김유정은 문학의 바다에 혼불을 지르고 갔다. 김현식과 김광석은 음악의 선율에 젊음을 실어 보냈고, 박종철과 이한열은 민주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앞장서 폭죽을 쏘아 올렸다. 생각을 일깨우고 마음을 견고케 해 주는 고독한 불꽃들의 생(生)놀이. 그들의 짧은 삶에서는 화려함이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열정만은 불꽃만큼 아름답고 장엄하다. 그러기에 일시적인 인기와 시류에 연연하지 않았던 그들의 뜻은 역사가 되었다.
화끈한 희망도 전복적인 힘의 용기도 없이 엉거주춤 사는 우리의 모습에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얘기하고 있는 이름들. ‘자유로운 인간의 길, 진리의 길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몸으로 보여준 영혼들. 세상에 아부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간 인류사회의 위대한 불꽃들. 그 얼들이여.
소리가 핀다.
꽃이 터진다.
봄이 열린다.
아직 동장군이 버티고 있는데 언덕의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우주가 봄의 불꽃놀이를 시작하였다.
트랜스젠더
정여송
꽃의 향기는 여하튼 매혹적이다. 그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은 소리 나지 않으나 울림 있는 명문장과 같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듯이 추는 춤이고, 어느 누구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부르는 노래이며,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 같은 사랑이다.
꽃의 자태와 향기는 여인을 연상케 한다. 연하고, 부드럽고,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기에 ‘꽃=여자’의 공식이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그래서인지 뭇 여인들은 꽃에 비유되는 것을 우쭐한 기쁨으로 여긴다.
가끔 예외를 만난다. 본디 예외는 독특한 존재다. 외톨돌이의 슬픔을 독차지 하는가 하면 보통을 초월한 깊은 구석을 지니고 있다. 특별한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평범한 무리로부터 따돌림 대상 1호다. 그러나 그것을 서러워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밤느정이에서 예외의 능청스러움을 발견한다. ‘진심’이란 꽃말과는 유다르게 꽃의 생김새부터 ‘호일 펌’을 한 청년의 머리채 모양이다. 아니 도가머리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향기 또한 여느 꽃들과는 달리 특이한 색조를 띠고 있다. 여자들이 밤느정이에 비유되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연유가 된다.
산골짜기 잔설들이 녹아내리는 소리,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는 소리, 여인들의 마음이 날아다니는 소리, 봄바람에 실린 그런 소리들이 귓등을 타고 놀 때면, 연초록 잎들이 산날망으로 기어오르고 물푸레나무가 물빛 마음으로 흥얼거린다. 하얀 밤느정이도 예서제서 피기 시작한다. 점점… 페스티발이 절정을 향해 무르익어 가고, 초대된 벌떼들의 향연도 펼쳐진다. 뭉뭉한 열기가 틈도 없이 운집해 있다.
밤느정이는 꽃 잔치가 무색하지 않도록 향내를 쉴 새 없이 토해낸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고, 은은할수록 사랑받는다는 정황을 모르나보다. 풍족한 것만이 능사가 아닌데, 넌지시 찔러주는 충고에도 아랑곳 않고 분별없는 저 헤품을 어찌 막을까. 제 성질이고 제 고집이고 제멋이 것을. 그러나 제멋에의 도취가 남부럽잖은 행복이라 할지라도 가까이 하기엔 왠지 거북스러운 강한 냄새는 숨 쉬기조차 용천하다. 마치 후손에게 물려주는 미토콘드리아의 DNA처럼 나타나는, 페로몬 향기라고 해야 할까. 남자의 정액과 흡사한 꽃비린내를 풍겨낸다. 그 특이하고 강렬함은 역겨운 나머지 멀미마저 일으킨다.
오호라! 남성을 상징하는 꽃? 그럴 리가? 아니,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암꽃과 수꽃이 한그루의 나무에서 잎겨드랑이를 통해 피어나는 미상(尾狀) 꽃차례이고, 소스라칠 일은 이 중 짙은 향기가 수꽃에서 난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낯익었던 현실이 낯설어진다.
억지스런 발상이라 해도 좋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얘기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해도 할 수 없다. 가끔은 환상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도 더 사실적일 때가 있다. 말이 된다는 생각이 얼핏 스친다. 해서 나는 밤나무에서 자연의, 자연에 의한 성전환 수술이 자행되고 있다고 감히 상상을 한다.
열광의 축제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밤느정이는 모두들 알고 있으면서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야기와도 같은, 남성적에서 여성적으로의 변신을 시작한다. 천천히, 몇 달 동안 시나브로 진행된다. 그 시술은 은밀한 곳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남성적 밤느정이가 하염없이 지고 또 지면서 포침을 박은 각두로 성을 쌓고, 단단한 갈색 껍데기로 담을 치며, 얇은 속껍질로 챙챙 울을 여미는, 여성적 변신에의 혼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여자이고 싶은 그 마음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소망이어라
‘하리수’ 같이 되는 꿈
온전한 여인이 되기까지 아무도, 심지어 하느님도 엿보지 않는다. 시간마저 잠잠하게 기다린다. 기다림에는 주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만분의 일이나마 얻을 무엇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허기인지 목마름인지 모를 그 기다림을 가져야 한다.
밤송이는 두어 계절이 지나도록 자연을 따르고 섬긴다. 그리고 내기에 생을 바친다. 지독한 뙤약볕의 단근질을 견뎌내기. 심술 고약한 태풍에 맞서 이겨내기. 즙액을 빨아먹는 왕진딧물, 잎살을 먹는데 죽살이치는 깍지벌레,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어스렝이 나방의 헤살을 버텨내기에 목숨을 건다.
그러구러 좁은 각두 속에서 인내와 함께 여물어가고, 소슬바람이 불면 단정한 제 매무새를 드러낸다. 차오르는 몸을 죄던 철퇴 같은 갑옷을 찢는다. 성곽을 무너뜨린다. 아니 남성적을 완전히 벗어던진다. 굼뜬 듯한 무던함과 진중한 참을성과 질박한 성품이 있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굴속에서 사람 되고자 빌며, 기다리며 웅녀가 된 수곰처럼.
딱딱한 밤송이. 융통성 없는 그 껍질의 완강함. 강인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말하려는 고백이 아닌가. 그것을 차마 몰랐다. 아뿔싸!
찢어진 각두를 반쯤 걸치고 드러낸 알밤이 토실하다. 탐스러운 자태에 마음마저 풍성해진다. 고동색 외피에 자르르 흐르는 윤기에서 앞가르마 곱게 빗어 넘긴 여인의 쪽진 머리가 엿보인다. 단정함과 곧은 절개가 섬광처럼 스친다. 조심스럽게 겉피를 벗기자 보늬 차림에서 속치장을 잘한 속곳 바람의 여인이 아름답다. 가슴을 동여맨 속치마의 말기가 얼비친다. 함부로 내보이지 않으려는 여인의 고고함과 넋이 묻어 있다. 다시 보늬를 벗긴다. 몇 달 동안 하양을 달이고 달인 상아빛 속살이다. 보는 이의 숨소리를 잦게 하는 서늘하면서도 고결한 백자가 아닌가. 터질 듯이 차오르는 만월이요, 어떤 삿됨도 끼어들 수 없는 꽉 참이다. 절세가인이다.
자료:수필사랑 문학회에서 퍼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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