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회 푸른솔문학상 수상작품>
송학松鶴 병풍
김여정
30여년 전 일이다. 우연히 동양자수 가게에 들렀다가 가지런히 진열된 작품들을 접하고 첫눈에 홀딱 반했다. 나는 혼수용 소품에 수를 놓을 때부터 자수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 날 이후 자수가게를 찾는 발길이 잦아졌다. 그 후 평범하기 그지없던 주부 생활에서 새로운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자수를 하기 위한 재료비와 표구 값도 만만치 않아 어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그 일을 하고 싶어서 경제적인 문제는 접어놓고 수를 놓기 위한 준비물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액자와 병풍 수를 놓기 위해 큰 직사각형 수틀과 받침 다리까지 목공소에서 맞추어왔다. 실크에 도안을 그린 천을 두면은 풀로 붙여 말린 다음 또 다른 두면은 천을 팽팽하게 당겨 압정으로 고정시키고 왼손은 밑에서 위로 오른손은 위에서 밑으로 바늘을 꽂으니 원형 수틀보다 훨씬 수월하고 편리하였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첫 작품으로 송학 액자를 시작했다. 검정바탕에 수줍은 듯 입 다문 백목련 몽우리가 고아하게 보인다. 활짝 핀 꽃잎은 솜을 놓아, 속잎과 겉잎의 입체감을 주었으며 황갈색 꼰 사絲로 수놓은 꽃받침이 조화를 이루었다.
다음은 쪽빛으로 물들인 실크 천에 수족관을 얹혔다. 수초를 향해 지느러미를 칼날같이 세우고 물살을 가르며 오르고 내려가려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만 같은 기세로 금붕어를 수놓았다. 이 다채로운 액자들은 감동적으로 내 마음을 매료시켜 자수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가슴 벅차 올랐다.
자수에 몰두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잡념이 없어지며 일심에 들게 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자수의 묘미에 꿈을 머금은 그때의 생활은 날로 새로워지고 생기가 솟았다.
한 틀 한 틀 공을 들여 작품으로 건져내어 집안을 장식하니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겨지기도 하고, 새로운 분위기가 무료했던 내 일상의 삶에다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골동품 수를 놓은 8쪽 병풍은 명절 때와 제사 때 쓰이면서 집안 어른들의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조금 자신이 생기자 큰 소나무와 학이 9마리나 앉은 연결 병풍을 수놓기로 하였다. 여린 연두색으로 시작하여 다섯 가지 색상으로 잎을 완성시켜놓으니, 싱그럽게 보이며 푸른 솔잎 끝에 스치는 바람으로 미세한 동요가 이는 듯 숨 쉬고 있는 느낌을 준다.
나무 등걸은 밑 부분을 차차 짙어지게 구도를 잡고, 껍질에 비늘모양의 얼룩무늬를 만들어 놓으니 자연미가 살아났다. 소나무 가지와 솔잎 사이에 솔방울을 몇 개 놓았더니 잘 어우러져 보인다. 약간의 변화를 주어 섬세함과 생동감으로 입체감을 높여주는 이치를 나름대로 터득하기도 하였다.
사람의 생각과 손끝으로 상상할 수 없는 무한신력無限神力을 발휘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잘 빠진 목을 뒤돌아보는 학의 모습이 놀란 듯한 표정이다. 솔잎 속에 발을 묻고 사뿐히 내려않아 정겹게 마주보고 조용히 속삭이며 회포를 푸는 듯한 느낌으로 놓았다. 그런가하면 창공을 향해 힘찬 날갯짓으로 허공에 주인이 되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동작으로 한 쌍의 학을 날려 보내었다.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창공을 가르며 여유 있는 여정의 길로……. 이 학처럼 자유로이 창공을 훨훨 나르고 싶은 꿈같이 아스라한 생각으로 빠져들어 수폭의 학에 도취되었다.
나지막이 나르며 안식처를 찾는 듯 솔가지에 살포시 내려앉아 휴식을 취하는 자태가 여유롭고 의연하다. 그 중에도 가장 마음을 끄는 한 발을 구부려 올려서 은색 발톱까지 내보이고 있는 고아한 몸짓의 학에 정성을 쏟는다. 딸기 같은 벼슬과 부리사이에 금색광명이 빛나고 등의 깃털은 굵은 실로 반 타원형 볼륨을 주어 흰색에다 연회색으로 약간의 배색을 하였다. 검은 꼬리엔 살색 선을 넣어 강조하였다.
이렇게 바늘 끝으로 상상력과 혼을 불어넣어 청청한 소나무를 가꾸고, 학의 동작 하나 하나를 다른 표현으로 마무리시켰다.
반년 가까운 세월동안 여덟 쪽 병풍에 혼을 불어 넣다보니 내가 그 병풍의 소나무가 되고 학이 되어 하늘을 나르는듯한 기분이었다.
이 병풍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노라면 지금도 내 젊음의 열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하다. 나의 모습은 자연의 순리로 나이테를 둘렀지만 병풍 속에 담겨져 있는 내 마음은 아직도 옛 그대로인데.
송학 병풍의 자수를 어루만지고 있으면 손끝으로 밀려드는 우아한 학의 품위와 꿋꿋한 소나무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그 속에 내 젊음이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오늘도 무한한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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