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蓮 먹는 사람들 / 임 미 옥
밤바다는 거대한 흑백수묵화 자체였다. 밀려오고 나가는, 우리 삶을 닮은 검은 파도가 연신 들고난다. 밀물과 썰물이 등을 맞대는 검은 해변은 묵언의 메시지를 준다. 어둠 저 너머로 이어지는 넓디넓은 수평선, 우주적인 것들엔 앙심이 없다. 시기질투도 없고 자리를 빼앗지도 않는다. 가깝게 더 가깝게 가만가만 바닥을 그러모아 얹어주는 넉넉함, 거두어 주는 포용만 있다.
사람이 사람을 온몸으로 사랑할 때 그러하듯이 허리를 감싸 안는, 밤물결 같은 그런 사람 어디 있나. 생명을 품은 심해, 추운 아이를 껴안은 어머니 품 같은 밤바다가 말한다. 보채지마라. 따지지 않고 모든 걸 품어주는 바다가 언제나 예 있으니 섭섭해마라. 걷잡을 수 없이 뭉클한 감정이 밀려온다.
작은 조약돌들과 조가비들이 발끝에 닿았다. 어디로부터 왔는가. 세상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까지 함부로 등질 수 없는 나름의 내력이 있을 것이려니, 차마 밟지 못하고 비켜간다. 밤바다 해변을 걸으며 파도의 씻김을 견디는 그 존재의 조용함을 사랑한다. 밤바다에서 배운다. 조용한 견딤의 미덕을.
산에 오르면 바다가 그리워지듯, 밤바다에서 산을 생각했다. 눈 덮인 하얀 평원을 지나 하늘까지 닿을 듯 높은 언덕 넘어 산 끝에 올라보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세상의 변화와 속도에 비켜선 채 자연과 공존하는 설원의 사람들이라도 만나질까. 잔잔한 선율의 흑인영가정도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밤 바닷가를 걸었다. 일행 한분이 다가와 큰 언니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는다. 레몬향기처럼 달콤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둘만의 세계에 잠겨있었다.
숙소에 들어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베란다에서 보는 야경이 꿈길 같다. 어느 가족구성이 이처럼 행복할까. 나이를 초월하여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일박이일여행은 꿈처럼 감미롭다. 약속한 적 없지만 수십 년 숙련된 솜씨인지라 각자가 내놓는 밑반찬만 해도 며칠간은 넉넉하게 지낼 분량이다.
“우리 이대로 며칠 더 있다 갈까?” 누군가가 던진 실행할 수 없는 한마디에 좌중 모두는 그러자고 손뼉 치면서 행복해 했다. 우리 모두는 어제를 잊어버리는 신비의 약초라도 먹었는가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한 목소리로 이곳이 좋사오니 하고 합창을 한단 말인가. 주고받는 눈길이 연인감정의 설렘이 아니어도, 바다를 안고 함께 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얼마나 달콤하랴, 눈을 반쯤 감고, 떨어지는 물소리, 살포시 찾아드는 비몽사몽! 산상의 몰약수沒藥樹덤불에 비치는 석양의 호박琥珀빛 같은 꿈… 또 꿈…. 날마다 연실蓮實을 먹으며 바라보는, 모래톱을 넘는 물결. 하얀 포말을 올리는 아름다운 해변의 곡선. 우리 마음과 영혼을 모두 맡아 주는 포근한 우수의 힘….” 중략….』그리스신화 중 오디세우스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테니슨의『연蓮을 먹는 사람들』이란 시를 중간 중간 구절들을 옮겼다.
트로이아를 출범한 오디세우스일행은 폭풍을 만나 여러 날 동안 해상을 표류하다가 『연蓮을 먹는 사람들』 의 나라에 도착했다. 그 섬 주민들은 오디세우스 일행을 따뜻하게 영접하고는, 먹고 있던 연실蓮實을 먹어 보라고 권했다. 이 연실은, 먹는 순간부터 고향을 깡그리 잊고 언제까지 그 나라에 살고 싶게 만드는 힘을 지닌 불가사의한 음식물이다. 그들은 그 연실을 먹고, 세상없어도 그 나라에 눌러앉아 살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이야기다.
특정한 지방에만 자라는 식물이 있는 것처럼, 지상어딘가에서 은밀히 자라는 행복이란 식물이 자라는 곳이 있다면, 지금우리가 서있는 밤 바닷가 땅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구름처럼 모습을 바꾸고 바람처럼 회오리치는 변화무쌍한 사람마음을 어찌하나. 산에 가면 바다를 그리고 바다에 가면 산을 그리듯, 어느 새 두고 온 집을 그린다. 산다는 건 어두운 표랑의길, 세상과 동떨어진 거대한 땅이나 강은 고여 있지 않고 흘러간다. 일상을 떠나 밤물결이 넘실대는 곳으로 찾아왔지만 돌아 갈 곳이 있어 떠남이 행복한 것이리. 바다는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흥을 만든 뒤, 다시 네 있을 곳으로 가라한다.
사진을 찍어 간직하듯 시간을 붙들어 머물게 하고 싶었지만 짧았던 시간은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갔다. 추억이라는 달금한 여운을 마음 한구석에 남기고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의 머리는 맑고 인생도 알만큼 안다. 우리를 취하게 했던 연蓮은 환상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닌, 더욱 단단하고 윤기 나는 현실로 가기 위해 먹어주어야 하는 우리가 선택한 연蓮이었다.
역동하는 생명력을 지닌 밤바다 물결은 젊은 날처럼 우리의 가슴을 다시 뛰게 했다. 팍팍한 삶에 지친 우리에게 연蓮을 선물했던 바다야 잘 있어라. 더 이상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은 두고 가야지. 파도에 부서져 떠나보내는 욕망들도 한때는 나를 지탱해 주는 힘 이었으니, 그 또한 미워할 수는 없는 것이리. 바다는 바다로 남겨두고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고 가야지. 꿈처럼 아름다운 밤바다…. 상투적인 세상 앞에 밤바다가 선물한 연蓮은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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