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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순스님의 명추회요 강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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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대명화 2013. 6. 17.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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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순 스님의 '명추회요' 강설 ㅡ 두 번쨰 시간 법문

 

 

복사 http://blog.naver.com/snc3175/130105008644

 

범부는 보통 사람들을 말하고, 가르침 듣고 깨달은 이는 성문

 

연각은 십이인연 얻은 사람이요, 보살은 밝은 지혜 . 자비 수행자

 

모든 지위는 차별이 없다.

 

 '부사의불경계경'에서 말하였다.

 

수보리 : 문수보살이여, 당신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벽지불입니까? 성문입니까? 아니면 부처님입니까?

 

문수 : 수보리여 그대는 반드시 내가 모든 위치에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수보리 : 문수보살이여, 그대를 '범부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문수 :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법과 중생 그대로가 반드시 '바른 위치'이니 나는 언제나 '바른 위치'에 있기 떄문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반드시 범부의 위치에 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수보리 : 만약 온갖 법과 중생 그대로가 반드시 '바른 위치' 라면, 무엇 때문에 온갖 지위를 만들어 범부나 벽지불 또는 부처님 이라고 차별해 말씀하십니까?

 

문수 : 수보리여, 비유하면 이는 세간에서 말로 허공 가운데 열 가지 방향을 정해 동쪽, 남쪽, 위쪽, 아래쪽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차별 없는 허공'이더라도 여러 방향으로 온갖 차별이 있으니, 온갖 지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온갖 법이 반드시 '바른 위치'에 있는 온갖 지위를 두니, 이른바 범부, 성문, 벽지불, 보살,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비록 '차별 없는 바른 위치'라도 온갖 지위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태교'에서 "네 가지 가르침은 허공에 찍는 네 개의 점과 같다. 네 개의 점이 분명하더라도 이 점이 허공의 성품을 부순 것은 아니다." 라고 한다. 이렇듯 '바른 위치'는 범부에서 구경위(究景位)에 이르기까지 이치이든 수행이든 바야흐로 그 도리를 다할 수 있다.

 

(강설) 범부는 보통 사람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성문'이라 하며, 홀로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연각' 또는 '벽지불'이라 한다. 보살은 밝은 지혜로 부처님의 세상을 추구하고 따뜻한 자비로 온갖 중생을 애틋하게 여기는 수행자를 말한다.

 그러나 이 차별된 온갖 지위의 실상은 이 단락에서 '바른 위치'라 표현하고 있는 '공성(空性)'이다. 이 '공성'에서 중생들의 인연에 따라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의 온갖 지위를 설하고 있는 것은 '묘유(妙有)'로서 중생을 위한 임시방편인 줄 알아야 한다. 천태사교(天台四敎)는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을 말한다.

 

유정에게 수기하면 무정도

 

! 만약 마음 자체가 부처님이라면 모든 중생에게 마음이 있으니 다 성불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무정물에게는 뒷날 가질 '부처님의 명호', '태어날 나라'와 그 '세월의 이름'을 일러 주어 수기하는 가르침을 볼 수 없습니까?

 

답 ! '부처님의 명호', '태어날 나라'와 그 '세월의 이름'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와 중생을 교화하며 바로 그 사람 앞에서 개별적으로 주는 수기이다. '참다운 수기'에 대해서는 '정명경'에서 "모든 중생도 여여하고, 온갖 법도 여여하다."하였고, '화엄경' 게송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이 자재한 힘 나타냄으로

      오롯하게 온갖 법을 설해 마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

      남김없이 깨달음의 수기를 받네.

 

      하나하나 일으키는 마음 속에서

      온갖 실제 모습 두루 본다면

      진여법성 부처님 땅 살게 되는 것

      모든 진리 받아 통달하리라.

 

     하나하나 드러나는 티끌 속에서

     온갖 법을 환히 알아 증득하려니

     이와 같이 걸림 없는 법의 이치로

     시방국토 빠짐없이 나아간다네.

 

 이렇다면 '나' 와 '대상' 과 '경계'가 모두 다 수기를 받아 부처님이 되니, 한 생각에 부처님의 공덕을 다 갖추어 한 티끌경계도 어그러지지 않는다. 생각마다 증득하고 티끌경게마다 진여이 바탕과 하나가 되니, '항상 고요하고 빛나는 나라'에 똑같이 있으면서 다함께 '비로자나'부처님 이라 부른다. 끝내는 각기 다른 국토에서 저마다 다름 몸으로 성스런 사람은 우수하고 범부는 하열하다는 구별이 없이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과 동시에 도를 이루니, 앞 뒤로 일어나는 망정이 사라지며 온갖 중생과 함께 같은 날 열반을 증득한다.

 처음과 끝이라는 견해도 끊어지고 유정이나 무정이라는 허망한 견해도 일으키지 않으니, 마음 안팍에서 삿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구할 깨달음도 없고 교화할만한 중생도 없다고 할 만하니, 자연스럽게 진실과 하나 되어 근본을 얻고 종지로 돌아간다. 다 함꼐 하나인 해탈문에 올라 모두가 다 평등한 깨달음의 수기를 받는다.

 

 또 옛 스님에게 물었다.

 

문 ! 이미 마음과 티끌경계가 다르지 않아 닦는 성품이 똑같은데, 어찌 나무나 돌이 깨달음의 수기를 받는 것을 볼 수 없습니까?

 

답 ! 하나하나 모든 티끌경계가 오직 마음 뿐이기에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마음만 멸하고 티끌경계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단지 유정(有情)에게 수기하는 것만으로 무정(無情)도 거두어 드린다.

이를 비유하면 '허깨비 같은 일'은 '허깨비 같은 마음'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처럼, '허깨비 같은 마음'에서 '허깨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그 마음이 멸한다면 '허깨비 같은 일'도 동시에 없어진다. 그러므로 단지 '허깨비 같은 마음'만 없앨 일이지 다시 '허깨비 같은 일'을 없앨 것이 아니다. 중생의 마음이나 티끌경계도 이와 같아 모두 '허깨비와 같은 모습'이다. 온갖 바깥 경계가 '허깨비 같은 마음 '에서 생기니, '허깨비 같은 마음'을 멸했는데 어찌 '허깨비와 같은 바깥 경게' 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는 곧 유정이 수기를 받으면 무정도 함께 받는 것이니 이 때문에 무정에게 반드시 따로 수기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 '태어날 나라'와 그 '세월의 이름'을 일러 주며 부처님이 되리라 수기하는 것은 아직 발심(發心)하지 못한 사람을 이끌어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려는 것이다.

 

(강설) 중생이 보는 온갖 바깥 경계가 '허깨비 같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니, 이 마음이 사라지면 그 경계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는 유정(有情)이 수기를 받아 성불하면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도 저절로 함께 성불한다는 뜻이다. 중생들에게 수기를 주어 뒷날 성불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가르침은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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