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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채운사(彩雲寺)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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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대명화 2012. 10. 17.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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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사(彩雲寺) 가는 길

이재부

 

  화양계곡에 들어서면 호흡이 감미롭고, 시력이 맑아지며, 몸에 훈기가 돈다. 기분이 상쾌해지니, 날개를 단 듯 발길이 가볍다. 청정무구(淸淨無垢)의 산과 화양천 명경지수에서 맑은 기(氣)를 받나보다.
  경천벽을 바라보고, 운영담을 지나 만동묘와 화양서원, 읍궁암을 들려, 금사담에 이르기까지, 두리번거리는 시선을 억제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분이 들떠, 오감이 활짝 열리나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글을 읽던 암서재에 와서야 발길도, 시선도 제자리를 잡는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되고,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며, 정(靜)과 동(動)이 균형을 이루는, 진경(珍景) 산수(山水)의 중심에서는 포만감이 가슴을 채운다. 금사담에 모여드는 물소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암서재에서 글 읽던 임들은 다 어디에 가셨는가. 무심한 세월에 밀려간 선인들의 흔적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묵상에 잠긴다.

 

  계곡을 오르는 소소한 바람, 흘러내리는 물소리, 새싹이 물들이는 봄빛, 쭉 뻗은 나무의 기상, 운무의 율동, 모두가 마음을 사로잡는 정경이다. 하천에 널려있는 수마석의 기묘한 모습들, 그 사이를 흐르는 물굽이 곡선들이 천리, 만리 흘러갈 환상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모두가 가락을 타는 듯, 화음의 조화를 이루니 무릉도원이요, 명사들이 즐겨 찾던 별유천지가 여기이리라. 산수화 속에 그려진 시선(詩仙)이 된 듯, 시정(詩情)에 취해 흥얼거리면서 자연과 대면하는 환희에 젖는다.

  '흰 구름 쉬어 가는 도명산 마루, 진달래 꽃피웠다! 메아리 올까. 화양천 흰 물줄기 고운 가락에, 버들개지 춤추는 은빛 너울들. 물새들 이사왔다 지저귀는데, 잔설 녹아 흐르는 물굽이 맑다. 능운대 반석 위에 쏟아진 햇빛, 마주보는 첨성대는 별빛 머물까. 채운사 풍경소리 선정 삼매경, 청아한 독경소리 발길을 잡네'

 

  선경(仙境)에 빠지고, 감흥에 취해 발길을 옮기다보니, 어느 듯 채운암에 도착했다. 경건하게 퍼지는 목탁소리, 사시불공을 드리시나보다. 조용히 동참하여 마음을 모으고 참배를 드렸다. 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가 마음을 잡는데, 법력 때문일까, 초면의 스님이 낯설지 않다. 예불 순서에 따라 목탁을 치기도 하고, 요령을 흔들기도 하며, 청아한 쇠북도 울린다. 그 공명(共鳴)이 내가 살아온 세계를 넘어, 또 다른 세계를 찾아가는 듯,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는다. 아름다운 울림이 곱게, 곱게 마음에 쌓인다.

  예불을 올리는 스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대학을 다닐 때 불가(佛家)로 입적(入籍)한 제자가 생각난다. 사찰을 방문할 때마다 나이가 비슷한 젊은 스님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보고싶기도 하지만, 속죄하는 마음에서 더 찾게 된다. 저 스님은 어떻게 세속과 인연을 끊었을까. 출가(出家)를 결심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러 나에게 왔을 텐데, 눈치도 채지 못했다. 혼자 방황하고, 번뇌했을 제자의 절연(絶緣)의 고독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아프다. 그 갈등을 헤아리지 못하고, 대학생이 되어 찾아준 것이 고마워 너스레만 떨다 보냈으니, 그의 속마음이 어떠했을까. 멀어진 훗날 그의 동창생을 만나 불가(佛家)에 귀의(歸依)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멍하니 창 밖을 응시하던 제자의 뒷모습이 스님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스님의 앞모습이 보고싶은데, 예불은 길게만 이어진다. 조용조용한 움직임에서 간절함이 묻어나는 스님을 보며 왜, 애처롭다는 생각이들까. 속가의 중생인 나는 법당에 들어서 눈을 감아도 속인인 것을 어이하리. 예불을 드리는 동안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자를 만나는 꿈을 꾸고 있었나보다.   

 

  아름다운 명승지! 불심과 자연이 합일을 이루는 채운암에 오기를 잘 했다. 부처님 거울에 나를 비춰보며 그리움 가까이에 가는 곳이리. 그리운 소망 가까이 가면 행복이고, 멀어지면 불행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화양구곡은 살면서 쌓인 피로와 먼지 같은 잡생각을 털기에 알맞은 곳이다. 채운사는 작은 암자이지만 "명산대찰(名山大刹)"이 여기라고 외치고 싶은 성지이다. 자연이 만든 경천벽, 운영담, 금사담이 가람에 들어가는 문루(門樓) 못지 않게, 마음을 씻으라고, 세심(洗心)의 경지를 펼치는 곳이다.
  근심이 무겁거든 화양구곡을 좌대(座臺)로 한 채운암을 찾아가시게. 불심에 기대어 마음을 털고, 스님이 베푸는 차 향 속에서 담소를 나누면, 근심은 허물어지고, 청정한 마음으로 선정(禪定)에 드시리.

(2010년 3월 20일 채운암을 다녀와서)
★(주) 화양구곡: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 

출처 : 푸른솔 문학회
글쓴이 : 일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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