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2 - 열다섯> 인생과 작가의 아름다운 삶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2. 10. 17. 06:45

본문

 

 

한국수필 월평. 2006 겨울호

 

                                   인생과 작가의 아름다운 삶

 

 

                                                                                                                    김홍은 (수필가, 충북대교수)

 

한국수필의 편집이 변해 가고 있다. 사회가 문화가 변한다고 무엇이던 모두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수필문학지의 편집내용이 변한다는 것은 그만큼 발전한다는 의미를 내포함이다. 독자들로서는 얼마나 흐뭇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호 <특집 1>에는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의 주제를 달고서 편집자는 조용히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소중하기에 오래도록 빛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치열한 삶 뒤에 오는 마지막도 중하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와의 이상적 별리(別離)’를 특집 주제로 삼았습니다.”라고, 또 한 해의 송년을 보내면서 깊은 생각에 머물게 하는 침잠의 시간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이별의 슬픔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우주만물의 모든 생명을 갖는 자연도 자신의 마지막 생을 맞게 된다. 우리의 인생도 이들의 자연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연이나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태어남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삶을 새롭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가며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따라 그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인생에게 있어서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수많은 성현들이나 철학자들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답을 하여왔다. 그러나 아무도 이에 대한 정답이 어떤 것인가는 모른다. 그렇지만 인생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삶이란 인생자신의 목적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대개는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인생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생의 마감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아무도 거역할 수없는 자연의 철칙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삶이란 어떻게 살아가야 값지게 사는 것인가를 많은 이들에게 듣고 싶어질 때가 많다. 자신을 값지고 보람되게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것인가를 말이다. 인생의 별리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무엇을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남아있는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이며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죽음이라는 쓸쓸하고도 슬픔이 찾아오는 마지막의 순간을 조용히 들어 봄으로, 잊고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되게도 한다.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살펴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는 육체의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생명의 영원한 운동이며 현재의 삶에서 하나의 물결로 나타난 것일 뿐, 의식도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 년 전의 자신과는, 10 년 전 보다 더욱 다른 사람이 되었고, 또 그 이전에도 다른 사람이었으며 인생 자신은 누구나 언제고 변하여 간다고 하였다.

그는 죽으면서 농민들에게 땅을 무상분배하고, 일생동안 열심히 써낸 소설, 희곡, 평론 작품들에서 해마다 수입되는 저작권 수입의 인세까지 전부를, 러시아의 불행한 서민들의 복지사업기금으로 쓰도록 모두 바쳐버렸다고 한다. 인간이란 살아 있을 때도 중요하지만, 죽고 난 후의 살다간 그 사람의 흔적이 더 중요하다. 그러기에 사람은 관 뚜껑을 덮어 봐야 알 수 있다고 그 깊은 뜻을 새겨봐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는 싸늘한 죽음이 엄습해 다가오는 시간을 즐겁게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어쩔 수없이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하는 이 죽음.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의 이별 앞에서, 우리 한국의 문학 원로작가 분들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의 장식’을 황금찬 , 이어령, 김남조 , 김후란, 김지향,  김시철 , 문효치 , 한분순 , 마광수 , 박건호 님이 소중하게 들려주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감동으로 기억되게 하고 있다.

 

이번호의 ‘사색의 뜰’에는 5편의 수필이 실려 있다. 모든 작품들이 저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우리는 수필을 통하여 많은 것을 느끼며 살아간다. 작품으로 하여 간접 정서적 쾌감을 얻음에서 글을 읽는 다는 일은 즐거움이다. 이런 점에서 독자를 잃는 글보다는 끌어 들이는 작품이 되게 써야 함이 좋지 않을까 한다.

 

이재부의「청산에 누워」작품은, 충주에서 중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희를 바라보며 사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산수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은 감정을 차분하게 들려주고 있다.

남한강과 함께 뻗어 내린 산줄기로 이어진 계명산과 화암리 무명의 산봉우리를 가슴에다 품고 잔잔한 충주댐의 물결에 어리는 청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충주호의 깊은 물과 아담한 산이 어울려 비경을 이룸에, 취한 마음을 화자는 이렇게 털어 놓았다.

 

춤추는 듯 돌아서고, 끌리는 듯 다가오더니 청산은 옷 한 가지씩 벗어 놓는다. 너무나 화려하여 바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려하지만 관심의 방향은 미지의 신비 속으로 파고든다.

초야(初夜)의 여신을 대하듯 경험하지 못한 흥분 속에서 서툰 눈으로 바라본다. 마지막 남은 옷 한 가지는 옷이 아니고, 정수(精髓)의 미학 속에 만상을 응축한 점 하나인 듯 하얀 이불자락으로 슬며시 감춘다.

 

 

우리는 산수의 수려함을 흔히, 산자수명이라 하였다. 그 아름다움이 얼마만큼이나 화려한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화자는 그 미상을 이렇게 표현해 놓음으로 어느 만큼은 짐작을 하게하고 있다.

산수의 아름다음을 그 어디에다도 비할 길이 없음에 그 경관을 첫날밤의 여체를 대하듯 상상의 날개를 달아 놓았다. 푸른 산은 물에 빠져 잠들어 있고, 호수는 잠든 산을 물안개로 살며시 가려두어 놓음으로 산과 물을 초야의 사랑으로 연상케 하였다.

산진수회(山盡水廻)라고 산은 물을 감싸 안고 돌고, 물은 산을 안고 돌아가는 산수애정의 아름다움을 상상에 빠져들게 한다. 자연경관미를 남녀로 비유하여 그칠 줄 모르는 애무에 젖어 있는 산수미의 만상을 은유적으로 유유자적하게 펼쳐 놓은 문장 표현의 하나하나가 짜릿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세상 이치가 음과 양으로 조화를 이루듯 젊음이 넘치는 남성의 산과 여성인 듯 잔잔한 호수가 된다. 초례청에서 천륜에 끌리는 미소로 부부의 연을 맺듯 서로를 채우고, 품는 합일이 사랑같이 아름다운 환희를 자아낸다. 초례청의 풍경이 환상으로 다가 오는가 ? 생동하는 화조병풍에 천상의 선녀가 하강하는 듯 하얀 물살을 가르며 떠가는 유람선이 날개옷 같은 물결의 여운을 남기며 산을 돌아간다. 아름다운 그림, 병풍을 펼치는 듯 ……

 

 

잊혀져가는 우리의 혼례문화를 연상케 하는 가하면, 조선시대인 음력 단오절의 단오 풍정도(端午風情圖)를 보는 듯, 산수를 묘사한 춘화(春畵)를 운치 있게 초례청의 인륜대사를 문필의 도화(圖畵)로 담아내고 있다.

산을 남성으로, 물을 여성으로 표현하여 음과 양의 세계를 조화시켜 호수의 아름다움을 그려 놓았다. 산과 물의 자연스러움을 천륜에 끌려 맺는 초례청의 부부의 미소로 가득 채워 품어내는 합일의 풍미의 산수를 남다른 사고의 예지로 바라봄이 어찌 평범하다 하겠는가.

굽이굽이 져있는 산자락을 따라 흰 물살을 가르며 유유히 떠가는 유람선은 화조병풍을 펼치는 듯하고, 하늘에서는 천상의 선녀가 하강 하는 듯, 하다는 서정성의 표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이 가히 눈에 어른 거려진다.

이 작품을 통하여 수필의 진미를 다시금 느끼게 하고 있어 글을 읽는 마음을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하고 있다.

 

이상헌의「한(恨)」은, 그야 말로 우리 민족의 한을 짚어가며 잊혀져가는 고통과 슬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들이 부르는 대중가요가 그렇고,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그리고 후삼국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6.25 전쟁을 마치는 동안 출렁거리며 흘러오는 그 영원은 우리 민족의 생성과 시련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초상집의 애도의 울음도 대신 울어주는 곡쟁이를 통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여 울음바다를 이루게 하였다는 민족 정서의 슬픈 감정도 떠올려주었다.

그러면서 ‘한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못내 분하고, 억울하게 여겨져 마음에 맺힌 것이라고 되어 있다’라며 화자는 한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운명의 벽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좌절감이라고 표현 하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민족이 살아온 역사적 슬픔과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온 배고픔의 한을 낱낱이 그려 놓았다.

 

고려청자를 보며 30년간 겨레를 괴롭혀온 징기스칸 후에들이 밀려오는 말발굽소리와 고려 인들의 통곡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한을 도자기 위에 푸른 하늘로 재생시켰다. 한을 한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아름다움으로 정제하는 놀라움을 발휘하는 것이다.

유리관 속의 공기가 팽창하면 시험관을 깨는 것처럼, 한을 한으로 풀면 파괴와 보복을 수반 하지만 정화하여 순화할 때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를 빚어내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폭발적인 기적을 창출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펼쳐보면 한 맺힌 슬픈 삶으로 살아 왔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힘이 없어 이웃나라들에 짓밟혀 살아온 뼈아픈 조상들의 맺힌 그 한을 무슨 말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억울하고, 원통하고, 원망스럽고,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이 그렇다. 현재도 보이지 않게 힘에 밀려 살아가는 민족과 민족 간의 경제적 대결을 비롯한 수많은 감정싸움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현재도 미래도 존재할 것이다.

어느 학자는 ‘한은 가장 한국적인 슬픔의 정서이다’라고 하였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원한(怨恨)으로 맺혀진 우리 민족의 한에서 부터 담겨진 슬픔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한국적인 슬픈 정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족 간, 개인 간의 원한이 응어리져 살아오면서 가슴에 서린 슬픔이 아니겠는가. 민족의 맺힌 한이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한이 되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한으로 맺혀 짐으로 한 민족의 슬픔이 담긴 정서가 되었지 않나 싶다. 민족 간의 전쟁과 패배, 반급사회제도, 경제적 가난, 생활의 고통 등으로부터 가슴에 맺히게 된 한은 민족에 따라 그 정서는 다를 것이다.

화자는 우리 민족의 한을 고려청자를 바라보면서 잘 묘사하였다. 그런가 하면 인생의 한풀이에 대하여도 과학적 사물에 비유하여 은유적으로 잘 일러주고 있다. 유리관을 통하여 아름답게 승화시킴으로 아름다운 미를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이용하여 창출한다는 인생이 살아가는 삶의 심려까지도 들려주는 깊은 뜻을 담아내 줌이 돋보인다.

 

김회직의 설산(雪山)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오래전부터 언제부터 인가 설산을 그려 왔다는 내용이다. 풍경화도 투시근원법과 색채원근법을 표현해야 하는데 원근법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자칫 상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안주 해 버릴 염려가 있단다. 어떤 이는 그런 그림을 향해 일반적인 보편성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나르시시즘 적 회화라고 혹평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바로 화자의 그림이 그렇다며 두려움과 공포감이 발목을 잡고 있다가 어느 날, 오래 전부터 그린 그림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몇 점을 골라서 지우고 긁고 덧칠하면서 수십 번의 실험을 거친 반복하였다. 언제부터인가 화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설산을 염원 했었다. 끝내는 하얀 눈과 잡목이 뒤얽힌 설산을 그려 놓게 되었다는 작가의 집념을 표현 해 놓은 글이다.

 

한 작가가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열고, 그 세계를 굳건하게 지켜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자기 세계를 일관되게 표출 해 낸다는 것이 그만큼 고독하고 고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 그래서 자연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림 중에서도 산수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지 않나 싶다.

중국의 산수화가인 곽희(郭熙)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보면 화시무성시 시시무형화(畵是無聲詩 詩是無形畵)라는 내용이 있다. 그림은 소리 없는 시(詩)이고, 시(詩)는 형태 없는 그림이라고 말해 시화일체(詩畵一體)를 강조하였다.

곽희는 산에는 삼원(三遠)이 있다고 했다. 산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고원(高遠), 산 앞에서 산의 뒷면을 넘겨다보는 심원(深遠), 먼 산을 바라보는 평원(平遠)으로 부터 색채를 터득한 작가의 세계를 표현 해 놓았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예술세계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 지지 않으리다.

이는 오직, 어느 한 경지를 오른 작가만이 알 수 있는 고독한 작업임이 틀림없다. 화자는 자신의 경험으로 터득해낸 작가의 예술체험을 한 편의 수필로 조용히 들려주고 있다.

 

최강렬의철밥통은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운 현실을 풍자하여 표현하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1997년 국제통화 기금체제로 촉발된 이후, 어렵게 살아가는 사회상을 그려 놓았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과거와 현실의 이모저모를 들려주며 오늘의 뼈아픈 철밥통 지키기를 꼬집었다. 기업체, 공직 산하단체를 연관해서 노후대책인 철밥통을 찾아가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이 나라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나를 답답한 가슴으로 한탄한 글이다.

동감은 가지만, 보다 희망을 줄 수 있는, 어떤 작은 삶의 지혜를 들려주었더라면 하는 더 좋은 글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가졌다.

 

이상목의 「고객을 위하여」는 우리 생활에 있어서의 얄팍한 상술이라 하겠지만, 때로는 이에 대한 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며, TV에서 본 국세청장의 사퇴와 후임의 구회청문회를 본 내용과 00세무서로 부터 보내온 세정 안내서에는 “오리궁둥이에서 오리털을 뽑되 꽥꽥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세 행정의 원활한 집행행정을 돕는 새로운 봉사자세의 하나 !

화자는 세무사 개업을 하여 30년 동안 지내 오면서 세금에 대한 초청이나 토론회에 참석할 때는 자신의 소개를 버나드쇼의 ‘범인과 초인’에 말을 변형하여, “저는 부자들을 털어 그 떡고물을 먹고사는 세무삽니다”라고 소개 한 단다. 그러면서 근검절약으로 살아간다는 내용의 글이다.

국민이라면 납세의 의무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세금을 적게 내고 싶어 하며, 심지어는 탈세까지 한다. 그런가 하면 대통령을 지낸 사람까지도 그러함을 어쩌겠는가. 이만큼 돈과 연관된 국가의 세금내용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세무사는 세법에 대하여 많은 지식과 경험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세무행정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란 여간 쉽지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화자는 30년 동안 세무사로써의 많은 세무체험을 지니고 있으리란 본다. 세무에 관한 관심사를 보다 정감 있게 들려주었더라면 좋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여겨졌다.

 

이번호에는 등단 3년 이내 패기 있고, 전망 있는 수필작가 란을 새로 개설해 놓았다. 문제작가(신예작가)의 첫 작품이 실려 있어 살펴보았다.

 

 

이은희의「동자석」의 작품은 동자석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을 들려주었다. 제주도의 산 오름 등성이의 낯설게 느껴졌던 무덤들이 평화롭고 편안한 풍경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왜일까라는 자문을 하였다. 그러면서 화자는 어릴 적에 겁이 많아 묘지근처도 가본 적이 없고, 으레 고인은 산자와는 멀리 떠나보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머니를 선산에 모시고 부터는 무덤과 죽은 자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고 망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게 되었다고 하였다. 제주도의 수학여행에서 보았던 동자석 하나하나의 모습을 잘 묘사하여 놓았다. 동자석은 고인의 영원한 벗이라고 지칭하고 싶다면서 죽은 자와 산자의 영혼과 영혼을 잇는 가교라고 들려주었다.

이 작가는 큰 소재를 다루기보다는 작은 소재에서 큰 내용을 끌어들이는 남다른 안목과 사고를 지녔다고 하겠다. 묘지 옆에 쓸쓸하게 서있는 볼품없는 작은 동자석의 그 모습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과 생각을 다르게 할 수는 있다. 남들이 쉽게 지나쳐 버릴 사물을 발견하여 작품화 하는 문학성이 돋보인다.

글이란, 작가의 사색이나 문장의 구성과 표현은 저마다의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아쉬움이 있다면 문장구성에 보다 신경을 썼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지 않나 하는 독자의 마음이 머물렀다.

 

작품을 읽고 나면 늘 느끼는 일이다. 우리 수필문학은 특히 다른 장르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수필은 독특한 인생 삶의 경험들로 부터 얻어낸 자신의 지식과 철학의 그릇이다. 보다 수필문학이 발전하려면 그저 경험적 평범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서는 감동을 받을 수가 없다. 문장 표현 하나 하나에도 사색이 담겨있는 진선미를 이끌어 내는 더 많은 작가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 이는 작품 소재가 중요하며, 이에 따른 남다른 경험과 깊은 인생철학이 배어있고, 진솔함이 넘쳐날 때 수필의 문학성을 보다 인정받지 않을까 한다.

출처 : 푸른솔 문학회
글쓴이 : 덕유 원글보기

 

 

'추천우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1세기 수필작가 활동과 방향  (0) 2012.10.17
문학과 생활 / 김 홍 은  (0) 2012.10.17
송씨 / 김지영  (0) 2012.10.16
허기 / 박은주  (0) 2012.10.15
하숙집 / 나영균  (0) 2012.10.15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