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인의자존심 / 서 정 윤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2. 9. 14. 01:14

본문

 

                                   시인의 자존심 / 서 정 윤

 

 세상에는 참 많은 시인이 있다. 또한 시인 지망생도 많다. 그 많은 시인들이 매일 시를 생각하며 또 시를 쓰고 있다. 그런데 그저 연과 행에 맞춰 띄어 써 놓는다고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현란한 비유와 상징 기교를 사용하며 쓴다고 해서 시라고 봐 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인은 예언자가 되어야한다고 배웠다. 미래를 예견할 수 있어야하며 그것을 홀로 외칠 수 있어야한다는 말 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양의 탈을 쓴 늑대를 따라 갈 때 저것은 양이 아니라 늑대다. 계속 따라가면 모두 죽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말함으로서 받게 되는 불이익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를 쓴다는 건, 왜 쓴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저, 시인이라는 말의 매력에 빠져 시인이 되고자 한 사람도, 시인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으면 폼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시인이 되고 나면 스스로의 목표가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시를 쓰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저, 국어교과서나 문학교과서에 실리기 위한 것이 시를 쓰는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교과서에 실리기 위해서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비평가들의 기호에 맞게 쓰면 되는 것이다. 그 교과서 편찬위원들이 대략 이름 있는 대학의 교수들이니, 그들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쓰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과 친분관계를 쌓으면서 또 적당히 그들이 원하는 것도 들어주고 그러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잡지조차 거기에 주도권을 쥔 분들의 기호에 맞게 쓰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주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정기 구독권을 많이 해주면////)

 

 다음으로는 오래 남는 작품을 쓰겠다는 것인데 어떤 방법으로 오래 남느냐가 문제이다.

물론 비평가들이 원하는 대로 써서 그들의 기호에 맞으면 그것이 곧 대세가 되고 그리하여 여러 곳에 등장하고 오래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창작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비평은 그 창작한 것을 보고 만들어내는 이차적인 창작인 것이다. 시가 없이 비평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비평이 없는 시는 가능하지만 시가 없는 비평은 있을 수 없다. 창작이라는 것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들판 혹은 눈길, 가시밭길을, 첫 발자국을 찍으며 가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비평가들은 그 뒤를 따라오며 이 발자국이 어떠니 저 발자국이 어떠니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처음을 가는 사람이 뒤 따라 오는 사람의 발자국론에 따라 발자국 찍는 것을 조심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것이다.

 

 우선은 발자국이 문제가 아니라 길을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교과서를 보면 참여문학 일색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김수영 이후 참여문학의 깃발아래 모인 시인이 많았다. 그들은 비평가들의 목소리에 맞추어 시를 썼고 그리고 바로 비평가들의 조명을 받았다. 그렇게 그들은 공생관계를 맺은 것이다.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비평가들이 비평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10명이면 10명 모두 다 다른 목소리이기 때문에 비평의 잣대를 갖다 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여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비평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어느 정도 규격에 맞는 자를 하나 구입하면 여기에도 맞고 저기에도 맞으니 정말 재미있고 또 수지가 맞는 장사가 되었을 것은 뻔한 이야기 인 것이다. 또 어느 정도 수지를 맞추고 그 장사에서 본전을 뽑았다고 생각할 때쯤엔 새로운 작품들이 그 잣대에 맞추기 위해 창작되고 그리고는 버젓이 얼굴을 들고는 나도 좀 재 주세요 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 일인가. 거기다가 민주화 정권에 힘입어 과거 교과서에 실려 있던 시인들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서 하나둘 사라지고 결국은 목소리가 큰 사람만이 이기는 쪽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교과서에 실리기 위해서는 뭔가 이슈가 되는 작품을 써야한다는 말이다. 요즈음 같으면 국제결혼을 한 외국인 여성 문제라든가 아니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나, 또, 반미나 이라크 파병문제 등 그들이(비평가들) 어떤 틀을 짜기에 적당한 방향으로 쓰면 된다는 말이다.(요즈음 나오는 신 서정 계열의 시들도 아마 곧 교과서에 실릴 것으로 예상 되는 부분이다.)

 

 요즈음 신춘문예나 혹은 잡지에서 신인들 등단하는 작품을 죽 비교해 본적이 있는데 그것들을 보고는 참으로 놀랐다. 과거에 신인으로 등단하는 작품을 보면 참 신선하고 발랄하다는 느낌과 함께 덜 다듬어지고 풋풋하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들이 더러 눈에 띄곤 했었다. 근데 요즈음의 작품은 그런 신선하고 참신한 느낌은 전혀 찾아 볼 길이 없고 그저 빵틀에 찍어낸 국화빵과 같은 작품만 눈에 뜨인다. 하나같이 똑같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하다. 서울에서나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심지어 제주도에서 등단한 시인들이 하나같이 똑같다. 물론 시를 쓰는데도 유행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신인이 등단할 때는 뭔가 달라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더라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전국에 수많은 시인 교실. 창작교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시인이 생각하는 것으로 쓰지 않으면 등단시켜주지 않고 또 그렇게 쓰도록, 가르치는 기성시인의 기호에 맞게 충분히 훈련을 받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는 기성시인도 문제고 또 그렇게 훈련받고 그렇게 쓰지 않으면 시가 아닌 줄 아는 아줌마 군단도 문제가 많다고 할 것이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등단하지 않는다는 말은 많이 하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려고는 않는다. 젊은 시인 지망생들의 새로운 시도를 그들의 시선에서 바라보지 않는 한 우리 시단의 물은 썩어 냄새가 나는 물로 바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왜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반문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만큼 고뇌하고 기도 하는가? 혹은 시는 절의 말이라고 하는데 한마디 하기 위해 노스님처럼 삶을 온전히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한다. 그리고 그렇다 라는 대답이 자신의 속에서 울려 나올 때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해야 한다.

 

 시인의 길은 결코 화려한 길이 아니다. 그 길은 고난의 가시밭길이고 사막의 목마른 길이다. 거기에서 뭔가 화려한 것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화려한 것은 다른 곳에 있다. 그러니 시를 쓰면서 끊임없이 나는 왜 쓰는가, 이걸 써서 어떻게 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 소외되어있는 단 한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이 되자는 말이다

'추천우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가을 / 윤오영  (0) 2012.09.14
어머니의 길 / 한 동 휘  (0) 2012.09.14
황홀한 노동 / 송 혜 영  (0) 2012.09.14
끈의 유혹 / 박 미 경  (0) 2012.09.14
그래도 오래 실고 싶습니다 / 정 호 경  (0) 2012.09.14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