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상처는 칼날이 된다 / 구 활
시 한 편의 감동이 경전 읽기 보다 더 클 때가 있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커피 잔을 들고 조간신문을 들추다 오세영 시인의 ‘그릇’이란 시를 만난다. 가만 가만 읽다보니 묘한 각성이 일어나 커져버린 두 눈이 “소리 내어 크게 읽어라”고 소리친다. “찢어진 상처는 칼날이 된다.” 나는 소리 내어 크게 읽는다.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따지고 보면 깨지고 찢어진 것들은 모두 날선 칼날이다. 유리와 그릇이 그러하고 자동차와 비행기도 예외는 아니다. 주변에 늘려있는 물상들은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 있지만 상처받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은 마음이 칼날이 된다. 칼에 베어진 상처는 다시 칼날이 된다. 날선 칼날은 용서를 모를 뿐 아니라 배신하지도 않는다.
조선조 세종 때 음란한 여성으로 첫 손에 꼽혔던 유감동(兪甘同)은 타고난 음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검한성(檢漢城) 유귀수의 딸로 양반 출신이었다. 무안군수 최중기와 혼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뢰한인 김여달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인생행로를 바꿔 버린 가련한 여인이다. 연약한 여인이 푸른 칼날로 변신하자 무수한 사대부들이 한번 치마폭에 감겼다가 피를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여인의 앙심을 ‘오뉴월 서리’로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유감동은 무안의 남편 곁에 있다가 일상의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친정인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에 김여달을 만났다. 김여달은 때마침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다며 유감동을 외진 곳으로 끌고 가 겁탈을 했다. 둘 다 그것으로 끝이 났으면 다행이었는데 운명은 그들을 버려두지 않았다. 조혼으로 남편에게 정을 느끼지 못하던 유감동은 “아니야, 이러면 안 돼.” 하면서도 억센 성폭행 범을 남모르게 그리워했고, 김여달도 토끼처럼 빨리 치른 풀숲 신방의 추억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김여달은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식의 앙코르 공연을 치밀하게 준비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남편 있는 여인이 정절을 지키지 못하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남정네가 사대부의 부인을 겁간한 것이 들통 나면 참수형을 당해야 했다. 그렇지만 한번 들인 입맛(?)의 기억은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값진 것인지 둘은 포기하지 않았다. 유감동은 남편의 눈을 속이고 터프 가이를 만났고, 김여달은 죽음을 무릅쓰고 미모의 원님 부인을 품에 품고 운우지정의 황홀경에서 노닐었다.
유감동은 과감했다. 남편과 잠을 자다 뛰쳐나와 그 길로 줄행랑을 쳤다. 김여달을 찾아 한양으로 내달린 것이다. 한 번 젖은 돌은 두 번 젖지 않는다. 김여달이 집을 비우면 또 다른 남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것도 모자랐다. 낯선 이의 친구들을 낯설지 않게 만들어 치마폭에서 간을 절이고 숨을 죽였다. “행하(行下 기생에게 주던 보수)만 준다면 누구라도 좋지요.” 유감동의 이 말 한 마디가 장안에 줄서기 풍경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유감동의 소문은 삽시에 퍼졌다. 한량들은 누구나 한 번쯤 만나 보기를 소원했다. 연줄만 닿으면 어깨만 쳐도 자빠지는 유감동과 즐기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감동은 김여달의 품을 벗어나 영의정을 지낸 정탁의 첩으로 들어간 적이 있지만 대감의 조카 정효문을 끌어들여 숙질 사이의 위계질서를 동서지간으로 흩트려 놓기도 했다.
당시 유감동과 관계를 맺은 사내들은 드러난 숫자만 오십 여명에 이른다. 일일이 이름을 밝히고 사헌부에 끌려가 곤장 몇 대씩을 맞았는지 그들이 받은 형벌을 열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시방 우리의 법이 피해자 보다 피의자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것을 본떠 그걸 따르려는 게 아니라 지면이 모자라 그렇게 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유감동과 몸을 섞은 사내들 명단에 황희 정승의 맏아들 황치신도 끼어 있다. 정승의 셋째 아들 수신도 미모의 기생과 오래 바람을 피우다 황희가 “부자지간의 연을 끊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자 기방 출입을 자제한 적이 있다. 이렇듯 두 아들의 바람기를 잠재우느라 아비인 황희 정승의 마음고생도 꽤나 심했으리라. 어쨌든 치신도 형벌은 피할 수 없어 곤장 팔십 대를 맞고 얼반 죽은 몸이 되어 집으로 실려 왔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유감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성폭력 피해자임을 감안하여 그녀를 무조건 두둔하기도 그렇고, 성폭행 이후의 무절제한 음행을 이유로 희대의 음녀라고 침을 뱉을 수도 없다. 이럴 땐 용서와 배반을 모르는 칼날의 속성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모든 깨진 상처는 칼날이 된다는데 유감동의 찢어진 몸과 마음의 상처도 칼집 속의 칼날로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밖으로 뛰쳐나왔음이 분명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마음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정신분열 증세에 시달리거나 더러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본의 아닌 엇길을 걷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유감동의 탈선 음행도 성폭력 피해라는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유감동은 당시의 법에 따라 곤장을 흠씬 두들겨 맞고 사면이 되어도 방면되지 못하는 변방의 노비로 전락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훗날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추모비가 혹시 세워진다면 유감동의 이름 석 자도 함께 새겼으면 한다. ‘성폭력 피해자 원조 유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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