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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제 / 달 래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2. 8. 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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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복 제 (末伏祭) / 달 래

 

 

 요즘 들어 속이 허한지 자꾸 이야기가 고픈 나는 누가 만나자는 청을 하면 거절할 줄 모른다. 아니 허기를 채우려는 욕심으로 혹 누가 불러주지는 않나 하고 은근히 기다리는 편이다.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든 모양이다.

 오늘도 음식보다는 그 집이 가지는 토속적인 분위기에 이끌리는‘도솔마을’이란 민속주점에서 지인들과 간단한 저녁 약속을 해놓았다.

 도솔천이란 미륵보살과 부처님이 사는 천상계(天上界) 그러니까 천중의 환락처에서 따온 이름이 아니던가?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도솔마을’이란 이름 자체에서 뭔가 있을 듯한 묘한 매력을 느껴온 터였다.

 해거름인데도 식을 줄 모르는 열기로 발아래 돌길이 자글자글 끓는 천마총 뒤 돌담길을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비벼먹을까 말아먹을까하는 궁리로 애써 더위를 견디며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코 큰 외국인들도 몇몇 있었고, 금줄을 치느라 마이크 장치를 하느라 음식을 나르느라 마당을 매운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지인들과 조용하게 담소하기를 원했던 나로서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마침 말복제(末伏祭)를 올리는 이 집만의 독특한 이벤트를 마련하는 날이었다.

 소문을 들어 돌아가는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너무 더워 정신을 놓아버려 오늘이 말복인지 까마득히 모르고 온 나는 엉겁결에 그 소란한 잔치에 동참하게 되고 말았다. 우리네 인생에는 예상치 못했던 일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복병처럼 숨어있는 삶의 우연성에 화가 나고 좌절할 때도 더러 있지만 오늘처럼 또뽑기에 당첨된 것처럼 기분이 괜찮을 때도 있다. 오늘 만큼은 밥과 술이 다 공짜란다.

 

 우리가 방안에서 식사를 하는 사이 바람 한점 없는 오목하게 자리한 앞마당에서 말복제는 시작되었다.

 사랑채의 격자창 너머로 언뜻 보이는 손바닥만한 뒤뜰의 풍경이 새삼스럽다. 나지막한 돌담위로 기어오르는 담쟁이, 오래 방치하여 낡아진 쪽마루 틈으로 듬성듬성 돋아난 잡초, 지금은 여느 집 꽃밭에서 사라져 가는 창포와 이름모를 풀들이 어울리어 어둠이 채 내리기전 어스름에 미동도 없이 수묵화 한 점처럼 걸려있다.

 그 옛날 아사녀가 살던 신라의 뜰이 내 유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억겁의 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듯하다. 한 순간에 천년의 세월을 함께 본 감격으로 나는 잠깐 가슴을 적셨다.

 

 박식한 제주의 제문은 원고도 없이 열대야의 공기를 더욱 달구며 끝도 없이 이어져갔다.

 

 “ 삼복더위 물러나게 해주시고, 잡귀신은 써억 물러가고... ”

 

 열 살.

 그해 여름도 참으로 더웠다. 마른장마 뒤에 찾아온 무더위에 논은 턱턱 갈라졌고 어쩌다 부는 바람조차도 흙먼지를 싣고 와 대청마루에 뾰얗게 끼얹고 갔다. 별 할일도 없고 심심했던 나는 해수욕장으로 동무네 집으로 실없이 쏘다니느라 새까맣게 그을린 채 급기야는 앓아눕고 말았다. 고열에 시달리어 입술은 논바닥처럼 갈라졌고 눈앞에 자꾸 헛것만 보였다. 어머니가 약방에서 사온 만병통치약인 아스피린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심한 몸살이었다. 숨만 쌕쌕 거리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가라앉아 누워있기를 사흘.

 할머니가 큰 용단을 내리시는 듯 어머니께 이것저것을 지시하셨다. “ 야가 복 땜을 억시게도 하는갑다. 더위를 먹어도 단디도 먹었데이. 저거 대추나무 잔가지 좀 많이 꺾어라. 잎은 훑어내고 푸욱 삶거라. 그라고 숫돌에 칼도 좀 갈아놔라. 방서 좀 해야겠다.”

 한낮이 되자 할머니는 사막 같은 마당 가운데에 멍석을 깔고 나를 눕히고는 가마니 하나를 옆 솔기를 타서 덮어씌웠다. 한참을 그렇게 있자니 먹은 것도 없건만 속이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시작되고 눈이 뱅뱅 돌고 땀은 콩죽같이 쏟아졌다. “아 내가 죽었구나. 그래서 지옥에 왔구나.”하고 지옥을 실감하고 있자니 가마떼기를 획 젖히며 할머니가 대추나무 삶은 물을 양철 양동이에 거의 반을 내게 끼얹었다.   그리고는 박 바가지에 한가득 담은 대추물을 대문에 확 뿌리고 날을 세워 시퍼렇게 갈아놓은 부엌칼을 대문 밖으로 있는 힘을 다해 냅다 던지며 소리쳤다. “ 예끼! 이 요망할 귀신아 썩 물러가거라. 여거가 어디라꼬? 금쪽 겉은 내 새끼 속에서 썩 나오너라. 니가 있을 곳이 아이다. 다시 한 번 나타나면 요절을 낼끼다. 병마고 뭐고 잡귀신은 써억 물러 가거라!!”

 

 할머니의 호통은 비장함으로 가득 차서 마당으로 대문 밖으로 찌렁찌렁 울렸다. 그때 내 속에서 무엇인가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고 할머니는 바가지까지 밟아서 산산조각이 나도록 부셔버렸다. 그리고 굵은 소금 한 움큼을 대문 밖에다 휘익 흩뿌리고는 빗장을 질러 대문을 잠궜다. 잠시 후 어머니는 대청마루에 나를 눕혀놓고 부채질을 자꾸 자꾸하며 “ 병원에 좀 가라하믄 될낀데. 병귀신 쫒다가 멀쩡한 아 잡겠다.”하시며 마음대로 말조차 할 수 없었던 시집살이가 서러운지 훌쩍훌쩍 울었다.

 할머니가 던진 칼에 맞아 죽었는지 그 뒤로 지독한 병귀신은 내게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 둘을 낳을 때를 제외하면 병원에 가서 누워 본적이 없으니 참으로 신통한 노릇이다. 그날이 말복이었다.

 

 앞마당에는 말복제가 끝나고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는지 북 치고 장구치고 걸쭉한 목소리로 창(唱)하는 여자 목소리에 어깨 들썩이는 소리로 흥겹다.

 그득하게 한상 차려놓고 신명님께 절 한번 하고는 “ 서민들 잘살게 해주시고, 처녀 총각 짝지어 주시고, 무더위도 물리치고, 잡귀신도 썩 물러가게 해주시고...” 오만 소원 다 빌어대니 참으로 고약하고 나약한 게 인간의 심사다. 그러나 어쩌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닥쳐올 재앙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에겐가 부탁하지 않고 누구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을 때의 그 외로움과 절망을 어찌 견디랴. 나는  사람들이 갖는 신명에 대한 의뢰심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일련의 의식들이 설령 허사임을 안다 할지라도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면 이루어 질수 있다는 희망, 그 실낱같은 희망 하나를 건지는 것만으로도 샤머니즘은 다른 모든 것을 상쇄(相殺)하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문 옆에는 새로 세운 솟대가 우뚝하다. 장대 위에 새를 놓아 하늘 가까이 올려 보냄으로써 소망과 희망을 전하고자 하는 풍습이다. 입구에 세워져 부정을 막고 좋은 기운은 못나가게 하는 정령(精靈)의 역할을 부여받은 솟대다.

 

 여흥을 뒤로 한 채 돌아서 나오는 길목에서 올려다 본 하늘에 보름달이 두리둥실 떠올라 찜통 같은 복더위 속에도 저 홀로 차다.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어찌 별과 달 뿐이랴. 우리들의 소망도 희망도 모두 쏘아 올렸는데….

 오늘 내 마음 속에 장대 위 기러기 한 마리 얹은 솟대 하나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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