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복으로 / 이부림
시장 가방을 양손에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쾅! 하고 뒷문이 닫히자마자 좌석 아래 두고 내린 생선봉지가 생각났다. 바로 뒷문을 두드렸지만 움직이기 시작한 택시를 두어 걸음도 따라가지 못하고 서버렸다. 달려가는 택시를 무슨 수로 세울 수 있겠는가.
제수(祭需)로 쓰는 생선은 항상 미리 준비해 두었는데 이번에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제삿날이 당장 내일로 닥쳐왔다. 그 동안 경동시장에서 장을 보아왔다. 제기동에 있는 경동시장은 약령시장으로 유명한 재래시장이지만 큰 도매 시장으로 제사에 쓰일 건과류나 생선 과일 등 싱싱한 물건들을 마트보다 싼값으로 한꺼번에 살 수 있어 편리하다. 시댁이 서해와 가까워서인지 제사상에는 꼭 홍어를 쪄서 올린다. 홍어나 머리가 달린 생닭은 명절에도 미리 주문하기 전에는 동네시장에서 구하기 힘들고, 생선은 오늘 밤으로 간도 쳐야 하는데, 동네에서 마련 할 수 있는 것들은 들고 내리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챙기지 못하고 내린 것이다.
집에까지 오는 동안 운전기사님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라디오에서 60년대 얘기가 나오자 서울에서 명문 대학을 다니면서 4.19에 앞장을 섰던 젊은 시절이 있었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에는 경제부처와 한국은행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제는 퇴직하고 쉬다가 자가용 겸 택시영업을 한 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듣다가 낯 선 여자 손님에게 자기 자랑도 꽤나 한다 싶어서 나도 4.19 세대라고 한 마디 했더니 얘기가 술술 풀렸을까. 자신도 장남이라 부모님의 제사를 모시는데 부인이 늘 고맙다고, 조상님 덕인지 고희를 넘기고도 건강해서 이렇게 운전 할 수 있어 감사하며 지낸다고. 짧은 동행이었지만 한 사람의 일생을 듣느라 물건도 두고 내렸나 보다.
닭은 백숙용으로 대체하더라도 홍어는 어떻게 하지? 일 년에 여려 차례 제사를 모시지만 한 번도 빠트린 적이 없었는데, 막막했다. 가방을 양손에 들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냥 차도 쪽에 서 있으려니 택시를 기다리는 손님인줄 알고 택시들이 멈췄다 지나간다.
무거운 짐들을 대문 안에 살짝 밀어 넣고 큰길로 나왔다. 다시 장을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빈 택시를 기다리고 있자니 4차선 도로 건너편에 택시 한 대가 멈추어 섰다. 차창 밖으로 얼굴을 쑤욱 내민 기사님이 누구를 부르고 있다. 손님을 태우려고 호객하는 것 같아 멀뚱히 처다 보았더니 “물건 놓고 내리셨죠?” 하며 오라고 손짓한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횡단보도도 아닌데 뛰어 갔다.
“아하, 반갑습니다. 거기 아직 계시다니.”
큰 소리로 나보다 더 반색을 한다. 달아나듯 사라져버린 택시가 어떻게 되돌아와 내 앞에 나타났을까. 분명 꿈은 아닌데…….
“뒤에 오던 택시기사가 그러는데 손님이 내린 택시 문을 급히 두드리는데 분명 무슨 사연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마침 두 차가 신호대기에 걸린 틈을 타 내 차 옆으로 와서 알려주던 군요.” 하면서 기분 좋게 웃는다. 그러니까 기사님은 그 말에 뒷좌석에 두고 내린 물건을 확인하고는 가던 차를 돌려 내가 내린 곳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내린 곳이 바로 우리 집 앞이었지만 들어가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어디로 갔는지 모를 텐데, 물건을 행여 돌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다시 와 준 기사님이 정말 고마웠다. 더욱이 떠나는 차만 바라보고 섰던 여자가 걱정스러워 앞의 기사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또 한 분, 전혀 모르는 그 기사님도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만약에 우리 집이 골목 안에 있었다던가, 내가 다시 시장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던가,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시장으로 가고 있었다면 분명 기사님은 허탕을 쳤을 것이다. 다행이 그 차에는 다른 손님이 타지 않았고 두 차가 함께 신호에 걸린데다가 내가 머뭇거리는 시간이 맞아 떨어져서 세 사람의 행동이 릴레이 하듯 연결되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삶이 인연과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잠깐의 인연이었던 승객을 위한 그들의 선택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가. 또한 이러한 복을 받도록 우리 조상님도 거들어 주셨으리라 여겨진다.
묵직한 봉지를 차에서 꺼내면서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제사 잘 모시세요.” 하더니 이번에도 금방 출발해 버렸다. 갑자기 찾아온 기쁨도 잠시, 또 후회하고 말았다. 명함이라도 받아 두던가 차번호라도 보아두었으면 후일 감사하다는 통화라도 할 텐데…….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한 인도에서 젖는 듯 마는 듯 내리는 는개를 맞으며 한참을 서 있을 뿐이었다.
수필집 [우리가 꽃갑이라네] 제2집에서
작법 해설
필자가 이 작품을 비평대상 작품으로 선정한 목적은 소재와 작품의 관계, 즉 <소재와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에 관한 생각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수필문학의 태생적 특성은 소재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시도 하지 않고, 소설, 희곡, 동화도 하지 않는 일이다.
지난 현대문학 1세기 동안의 수필문학이 처음부터 ‘여기의 문학’, ‘서자문학’ 소리를 듣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신변잡기’ 손가락질을 면치 못하고 있는 원인이 소재 자체를 작품을 제재로 삼는다는 벽을 창작론적으로 뛰어넘지 못한 데에 있었다.
수필의 그 같은 문제의 원인은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상의 특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같은 문제의 출처가 거기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책임은 소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필이 신변잡기 소리를 들어온 책임은 전적으로 수필문학에 관해서 학(學)을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있다.
왜 그런가? 저들이 진정으로 수필을 문학이라는 글자의 학(學)으로 여긴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현대문학 이론의 개론서 한 권이라도 독파하고 ‘붓 가는 대로’와 비교 연구해 본 후에 수필문학에 관한 글도 쓰고 강연도 했어야 될 것이다. 그랬더라면 진작에 수필문학은 달라졌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현대문학 이론에서는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은 이론으로 성립이 안 되기 때문이다.
무릇 어떤 글을 문학 장르로 구분하여 비평하기 위해서는 그 글이 <창작>이거나 <창작적>인 작품이어야 된다는 것이 절대 조건이다. 그러나 지난 1세기 동안의 수필계에 발표된 수필론은 그 어디에도 수필 창작론은 한 줄도 없었던 것이다. 필자의 [창작문예수필 이론총서] 5권이 최초 유일의 수필창작론이다. 이것이 수필이 처음부터 ‘여기의 문학’ 소리를 듣기 시작해서 현재까지도 ‘신변잡기’ 소리를 듣고 있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창작론에서는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수필문학의 창작방법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필자가 이 작품을 비평대상으로 삼은 까닭이 이 점에 관한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먼저 ‘수필’이라는 것이 진정 <창작 · 창작적>인 문학이 되려고 한다면 소재는 소재일 뿐이라는 사실부터 분명히 인식해야 된다. 그러므로 소재 자체만을 나열해 놓은 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 아닌 소재의 나열, 즉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소재자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글’이란 어떤 글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소재의 정체성부터 밝혀야 된다. 소재는 본질상 사실의 세계이고 역사이다. 사실의 세계, 즉 역사는 우주에서 온 우주인 이야기라 할지라도 시간적 순서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바로 이 점, 시간적 순서에 의해서 일어난 소재의 이야기를 시간적 순서대로 서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난 1세기 동안 절대 다수의 수필이라는 글들이 신변잡기가 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재를 시간적 순서대로 서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최초의 문예창작이론은 바로 이 질문 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서구 문학 이론의 시조라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있었던 일을 있었던 일 그대로 쓴 것은 역사일 뿐이지 창작문학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창작이 되는가? 있었던 일, 즉 소재가 문학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플롯작업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플롯작업이란 사건들의 창조적 배열을 의미한다. 즉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의 본질적 방법은 구성작업(플롯)에 있다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참조)
이 작품의 경우를 보자. 이 작품의 소재를 시간적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제삿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경동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 (장을 본 후 택시를 탔다는 이야기는 생략되고) 택시 안에서 기사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집앞에 도착하여 택시를 내렸다. 택시가 떠난 다음에야 생선봉지를 놓고 내린 생각이 났다. 가방을 들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차도에 서 있다가 일단 나머지 짐을 집에 들여 놓았다. 다시 생선을 사러 가기 위해서 택시를 기다린다. 그때 건너편에서 어떤 택시가 멈춰서더니 손짓을 한다. 아까 생선봉지를 놓고 내린 그 택시 기사였다. 차번호라도 알아둘 걸, 자책하며 감사한다.
이상이 이 작품의 소재를 시간적 순서대로 적은 사건의 전말이다. 만약에 작가가 이 작품을 이상과 같은 시간적 순서대로 서술하고 말았다면 이 작품도 또 한 편의 신변잡기 수법의 작품이라는 혐의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작가는 주저 없이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 버렸다. 구성작업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은 시간적 순서를 깨트리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본질상 구성작업은 소재의 시간적 발생 순서를 깨트리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이 시간적 순서를 깨트리고 있다.
서두 : 집앞에 도착하여 택시를 내렸다. 택시가 떠난 다음에야 생선봉지를 놓고 내린 생각이 났다.
전개 1 : 제삿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경동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
전개 2 : (장은 본 후 택시 탔다는 이야기는 생략되고) 택시 안에서 기사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전개 3 : 다시 ‘ 집앞에 도착하여 택시를 내’린 서두의 현재시점으로 돌아온다.
전개 4 : 가방을 들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차도에 서 있다가 일단 나머지 짐을 집에 들여 놓았다. - 이 장면은 서두 ‘ 집앞에 도착하여 택시를 내렸다.’ 이후의 사건이다.
이후의 전환점, 대단원까지는 소재의 순서대로 진행된다.
이상의 구성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의 최소한의 기본 구성법을 볼 수 있다. 최소한의 기본 구성법이란 무엇인가? 작품의 서두를 가능한 현재시점 사건으로 잡을 수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개부분을 과거 시점의 사건으로 돌아가 서술해서 거슬러 올라온다는 것이다.
소재는 본질상 시간적 순서에 의한 사실의 세계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중에는 필히 현재 시점의 사건으로 잡을 수 있는 사건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서두 선택 조건이 시간적으로 현재 시점으로 잡을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만은 아니다.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 작품을 하나의 창조적 세계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서두가 아니면 안 된다. 그 같은 창조적 세계의 관문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현재시점의 사건으로 서술 할 수 있는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작가적 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이 같은 서두 찾기라는 최소한의 구성법에 의하여 누구도 ‘신변잡기’수법의 작품이라는 혹평을 할 수 없는 <창작적>인 작업을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이상과 같은 구성법이 아닌 또 다른 구성법을 시도 해 본다면,
“무거운 짐들을 대문 안에 살짝 밀어 넣고 큰길로 나왔다.
(중략)
큰 소리로 나보다 더 반색을 한다. 달아나듯 사라져버린 택시가 어떻게 되돌아와 내 앞에 나타났을까. 분명 꿈은 아닌데…….”
위의 문장을 서두에 놓는 구성법도 시도해 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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