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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라인 이 여자의 살길? / 장영희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1. 5. 13.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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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라인’이 여자의 살길? / 장 영 희

 

 8월 초에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입원하고 나서 며칠 후 어느 독자가 책 한 권을 보내왔다.

 제목은 ‘무념’이었다.

 모든 병의 근원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과정에서 생기므로 집착의 끈을 놓고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무슨 병이든 낫게 마련이라는 내용이다.

 

 무념무상…. 맞다. 난 무엇이든 복잡다단하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이리 따지고 저리 분석한다.

그건 직업병이다.

 문학 교수라는 직업이 남이 써 놓은 작품을 분석하고 파헤치고 학생의 페이퍼를 이리저리 비판하는 것이다

 보니 무엇을 봐도 비판하고 분석하는 게 버릇이 된 모양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책을 덮고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며칠간 텔레비전만 보기로 했다.

 평소엔 텔레비전 볼 여유가 별로 없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텔레비전만 보면서 소일하기는 처음이었다.

 제 버릇 개 주나. 마음먹고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한 지 채 한 시간도 안 돼서 난 프로그램마다 사사건건 걸고넘어지기 시작했다.

 저 드라마는 구성이 왜 저 모양인지, 대사는 왜 저렇게 재미없는지, 저런 프로그램은 교육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오락성이 있지도 않아 제작비가 아깝네….

 

일곱 살짜리 조카 민수와 어떤 광고를 보고 있을 때였다.

 여자가 ‘땡벌’이라는 노래를 개사하여 “무더위에 지쳤어요, 땡볕 땡볕. 난 너무너무 싫어요”라고 응석조로 노래하면 남편 역할의 남자가 야비한 표정으로 ‘에어컨을 사 달라고, 사 줄까 말까, 사 줄까 말까’ 약 올리다가 함께 에어컨을 사러 간다는 내용이다.

 

 민수가 물었다. “이모, 저 아저씨가 저 아줌마 에어컨 사 주는 거야?”

 아이 생각에 마치 자신이 장난감 사 달라고 응석 부리면 엄마가 사 주듯 아줌마가 아저씨에게 응석 부려서 에어컨을 획득한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못 말리는 직업병이 다시 발동했다.

 좀 확대 해석하면 이것은 분명 남녀차별이다.

 에어컨이면 당연히 가정 전체를 위한 물건인데 남자에게 재정권이 있기 때문에 여자는 교태 부리며 간청해야

겨우 얻을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차제에 광고를 열심히 보았다.

 아예 연필까지 들고 하루 종일 광고에 나타난 남녀의 모습을 적어 보았다.

 분명 남자와 여자의 모습에 선입견적 차이가 있었다. 여자가 나오는 광고 대부분이 몸과 외모와 관계있었다.

 

 옷은 거의 가슴을 다 드러내고 어쩌다 웃옷을 제대로 입었다 싶으면 아래를 거의 벗은 모습이었다.

 보일락 말락 짧은 치마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음료 광고가 있었다.

 ‘여자의 피부는 권력이다’라고 소리치는 여자, 휴대전화를 들고 미친 듯 혼자 춤추는 여자가 있었다.

 넓은 챙 모자를 쓰고 해변용 의자에 누워 하늘을 향해 다리를 번쩍 들어올리며 여자가 까르르 웃는 이유는 새 냉장고를 샀기 때문이다.

 

 정말 보기 민망할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고 로봇과 함께 몸을 흔드는 여자가 광고하는 것은 가스보일러다.

 전문성이나 재력과는 상관없이 새로운 냉장고와 세탁기에서 행복을 찾고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이 턱의 V라인과 몸의 S라인이라는 듯, 아름답게 보이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말하는 게 광고 속의 여자다.

 

 이에 반해 남자의 광고 콘셉트는 바로 ‘세상을 움직이는 멋진 힘’이다.

 마천루 꼭대기에서 넓은 하늘 저편을 바라보며 세계로 나아가는 야망을 태우는 것은 꼭 남자여야 한다.

 정보기술(IT) 산업, 최고경영자(CEO), 세계적 비전과 관계되는 광고에는 어김없이 남자만 등장한다.

 

 광고에 나타나는 남자와 남자 사이의 관계는 우정이고 여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는 질투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말이 없어도 통하는’ 멋있고 진중한 관계이고 어머니와 딸은 함께 살 빼려고 운동하면서 ‘밥통 살까, 뭐 살까’ 하고 의논하는, 친하지만 참 사소한 관계이다.

 

 예가 끝없이 많지만 텔레비전을 보면서 애꿎은 동생에게 화내고 흥분했다.

 동생이 무념무상은 고사하고 나아 가는 병도 도지겠다고 텔레비전을 꺼 버려 난 할 수 없이 보던 책을 다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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