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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 / 감자꽃 핀 자리 ㅡ 김 정 태

장대명화 2026. 5. 19. 10:13

                                   바람소리 / 김 정 태

 

바람은 제힘만으로 앞서가는 바람을 밀고 간다. 그러면서 바람은 제소리는 내지 않는다. 흔히 바람 소리라고 하는 것은 바람이 어딘가로 밀려가며, 그곳에 있는 물체에 닿아 섞이고 포개지며 감기는 과정에서 나는 소리이다.

담양의 대숲을 지나는 바람은 댓잎을 비비고 흔들어 소리를 만든다. 이것은 댓잎만의 소리도 바람만의 소리도 아니다. 순천만 갈대의 사운대는 소리나 억새의 서걱거림도, 실은 그 들의 몸이 바람과 비벼져 내는 소리이지 바람 자체의 소리는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바람은 제 소리를 제 목청으로는 내지 않고 다만 포개지고 감긴다.

그런 과정에서 바람은 물체의 냄새를 제 몸에 섞는다. 이럴 때 바람과 소리와 냄새는 치정癡情의 관계로 얽힌다. 이 무슨 망발인가. 바람은 제 몸을 내주어 물체를 비비고 섞어 소리를 낳고, 소리를 내던 물체는 품고 있던 냄새를 바람에 포갠다. 이들 셋은 어떻게든 떨어질 수 없어 서로에게 연민을 얹는다. 우리가 듣는 바람 소리는 바람이 섞인 풍경이고, 소리는 풍경으로 기억되는 게 아닐까. 고창의 들녘에 일렁이는 청보리밭 군무를 소리 없는 영상으로 보고 있어도 우린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기억하는 풍경에 바람 소리가 배어있고, 내 몸에 닿는 바람의 느낌이 기억을 소환하여 풍경으로 펼쳐진다. 바람에 닿고 감겨도 소리는 나지 않을 것 같은 몸속의 어디에선 때로는 바람 소리를 듣곤 한다. 그것은 어느 봄날의 따스한 바람이기도 하고, 뉘엿뉘엿 노을진 가을 저녁의 풀냄새에 섞여 오기도 한다.

때로 바람은 스산한 상처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혀로 핥으며 살아내는 삶처럼, 바람은 상처를 핥을 때도 있다. 느닷없이 불어온 바람은 대책 없는 아픈 삶의 충동을 데려온다. 어쩌다 바람이 가져온 이런 충동은 길 위의 삶 하나를 위태하고 무질서하게 만들기도 한다.

봄날의 바람은 꽃잎을 데려가 흙에 눕힌다. 바람이 꽃잎을 데려가 잠재우는 풍장風葬의 그 끝이다. 겨우 며칠 나뭇가지에 꼭지를 대고 있던 꽃잎이 바람에 날릴 때, 꽃잎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닿는다. 양분을 공급받던 꼭지가 나무에서 떨어졌다면 꽃잎의 생은 이미 저문 것인데, 어쩌자고 바람에 실려 자신의 끝을 저토록 화려하게 장식하는가. 무리 지어 나는 꽃잎들을 앞질러 분분하게 날리는 꽃잎은, 꽃상여 앞에서 휘날리는 만장輓章처럼 나부끼며 길을 연다. 이때 풍장의 풍경은 절정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럴 때 바람은 소리 없는 연출자이고 꽃잎은 주연이 된다. 주연은 스스로 연기하지는 않는다. 오롯이 연출자의 몫이다.

바람은 내 몸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그러면서 까맣게 잊은 내 기억을 느닷없이 내 앞에 펼쳐 보이기도 한다. 풍경으로도 오지만 어느 때는 가뭇없이 몸에 닿아 남아있는 기억에 포개지고 비벼지기도 한다. 몸에 닿는 바람은 기억인지 바람만인지를 난 구분하지 못한다. 바람이 바람만으로 바람을 밀어가듯, 바람이 내 몸속의 오래된 기억을 밀어 풍경으로 되살린 건지 난 알 수가 없다. 그도 아니면 바람이 자신의 창고에 있는 내 기억을 날아와 내게 가져다준 건지 구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람이 내 기억을 소환해 준 것이라면, 바람은 내 기억의 주머니라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상념일 뿐이다. 귀가 순해진다는 나이를 훌쩍 넘어섰는데 바람의 어떤 소리도 구별하기란 여전히 내 몸 밖이다.

남도를 여행하며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다. 제 몸의 무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바람에 의지하지 않고 어느 순간 느닷없이 수직으로 뚝 떨어진다. 바람에 꽃잎 하나하나를 떼어주고 데리고 가는 대로 사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매화나 벚꽃의 개별적 생의 끝과 사뭇 다르다. 바람이 부는 날의 동백은 후드득 떨어진다. 문득 있었던 것이 문득 없다. 이때도 바람은 소리를 내지 않고, 떨어진 동백은 구접스레 땅 위를 구르지 않는다. 바람은 마치 소임을 다한 듯 뒤따라오는 바람과 포개져 가던 제 길을 간다. 나는 동백 앞에서 순결한 바람의 끝을 만난다.

 

내 몸에 닿는 모든 것에 민감해 있던 사춘기 시절의 어느 날,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바람결에 들었다. 그것은 바람이 전하는 바람 소리였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기에 나는 그 바람의 무늬와 질감을 아직 알지 못한다.

어머니를 힘들게 한 것이 아버지의 독선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한 여인의 삶을 등한시한 사건은 어머니의 가슴 속에 피고 또 피는 한의 꽃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한낱 바람같이 지나쳐도 좋을 중년 남성의 낭만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세찬 바람을 온전히 받아내야 했던 것은 어머니의 몸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풍류와 낭만이 깃든 잠깐 스치는 바람쯤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파 몰아치는 첫새벽처럼 문을 열고 바람살을 안고 간 건 어머니 혼자였다. 바람을 몰고 왔던 아버지는 철없이 덩달아 펄럭이던 두루마기 앞자락을 여미고 태풍 지나간 밤 아침을 맞듯, 실바람마저 재워 놓고 선산에 잠들었다. 이제는 자식의 얼굴조차 희미해져 가는 구순의 어머니는 그날의 모래알 섞인 돌개바람 소리를 기억하고 계실까, 아니면 기억의 창고가 있을 것 같은 바람 이는 곳에 어머니의 기억이 풍경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자칫 젖어버린 속옷을 갈아입혀 드리면 뽀송한 요대기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소녀, 바람은 소리 없이 제길 인양 스쳐 지나갔지만 소녀의 가슴에 쌓였을 모래바람 일던 날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다.

바람은 어디든지 가고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바람이 머문다는 것은 이미 바람이 소멸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일 터인데 우리는 '바람이 잦아드는 것'을 흔히 '바람이 잔다.'고 한다. 그날에 불어와 어머니가 들어야 했던 바람 소리는 가뭇없이 가라앉는 당신의 몸속 어디에서 자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바람의 무늬와 질감을 몸에 새기고 있는 건 아닐는지.

지나가는 바람은 무언가에 부딪쳐 소리를 낸다. 어릴 적 동구 밖에서 불어온 바람은 고샅을 지나고 삽짝을 들어서서 마당의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고, 부엌 궁둥이에 감기며 숨을 거뒀다. 그런 바람은 봄에도 불고 가을에도 불었다. 여름의 바람은 맨살에 감기어 칙칙하고, 겨울의 그것은 깊게 파고들 어 소란하고 매정하다. 예고도 않고 대중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충동적이고 무질서하다.

신라의 바람과 백제의 바람결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7세기와 21세기 바람의 성정이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바람이 일고 사그라진다는 것은 우주의 과학 원리를 들먹여야만 설명이 가능하니 사소한 일은 아닐 터, 삶의 길 위에서 바람 소리는 들리고, 들어야 할 때가 있다.

바람의 소리인지 바람이 무엇엔가 스며들어 내는 소리인지를 구별해야 할 나이가 된 듯하다. 하지만 아직 귀가 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스스로에게 연민을 얹을 뿐이다.

대숲에 가고 싶다. 억새와 갈대숲에 눕고 싶다. 창창한 청보리밭 가운데 서 있어 보면 어떨까. 눈 내리는 추운 날, 같이 하얘진 자작나무 숲이면 또 어떠랴. 댓잎 소리, 억새와 갈대의 사운대는 소리, 청보리가 눕고 일어나는 춤사위에 배어있는 소리, 자작나무의 속살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싶다.

바람이 실어와 펼쳐놓은 풍경만으로 바람의 소리를 듣고 싶다.

 

                                  감자꽃 핀 자리 / 김 정 태

 

저절로 서있는 마당 한편 감나무에 올해도 감꽃이 피었다. 덩달아 서 있는 듯 무심한 목련은 꽃잎을 떨군 지 오래다. 제 몸의 무게만으로 목련의 꽃잎은 수직으로 떨어진다. 바람에 날려 사선을 그으며 춤을 추듯 생을 마감하는 다른 꽃잎을 되레 나무라는 것일까. 그냥 있다가 문득 뚝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은 바닥에 발을 굳게 디디고 가는 바람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목련꽃잎이 바람에 떠밀리는 때는, 이미 제 모습을 잃고 누렇게 변색 되어 삶의 무게를 덜어냈을 때다. 덜어내 가볍긴 하되 색은 꺼무튀튀하다. 그때쯤 나무는 연둣빛 물감을 제 몸에서 풀어낸다.

나란히 서서 같은 양의 볕을 받고 바람도 쐬지만 감꽃의 생애는 목련과는 사뭇 다르다. 감꽃이 한창 필 때, 꽃은 나무에 가득하고 떨어진 꽃은 바닥에 무더기로 눕는 것인데, 누운 감꽃에는 아득함이 배어 있다. 그 아득함이 감꽃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하니 난 감꽃의 아득함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봄볕을 다 쬐고 초여름 볕이 내리기 시작할 때, 감꽃은 초록 이파리 사이에 숨어 핀다. 얼굴을 쉽게 내밀지 않아, 초경을 앞둔 딸아이의 요동치는 마음을 겉으로만 보고 변화를 모르듯 언뜻 알아채기 쉽지 않다. 볕을 받던 감꽃은 무리 같으면서도 개별적이어서 각각 시나브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꽃잎을 분산시키지 않고 통으로 떨어진다. 떨어진 꽃은 포개져 무더기를 이룬다. 감꽃은 땅위에 내려앉았지만 목련의 그것처럼 땅에 발을 디디지 않고 다만 땅 위에 얹힌다. 얹힌 감꽃을 바람이 데리고 간다. 꽃 진 자리에 아기 손톱만한 열매가 달린다. 열매를 두고 내려앉은 감꽃은 까맣게 변색되어 간다. 피어난 감꽃은 생을 마감하고 개별적으로 뒹굴지 않고 바람이 부는 대로 구르다가 낮은 곳에 포개져 마치 한 덩어리처럼 모여 있다. 그것은 생의 끝을 합장(合葬) 의식으로 치르는 듯하다. 땅에 얹혀서 그 신산한 제 몸통을 통째로 볕에 말린다. 까맣게 변한 감꽃의 생애다.

‘환갑이나 넘기겠느냐’ 하시던 어머니는 구순을 넘기고 이태를 더 살아내고 계신다. 늘 방안에 누워 미동도 없다. 살 겉이 물러 약을 발라 드리면 볕에 꽃잎 말라가듯 꾸덕꾸덕 해진다. 그 과정은 늘 심란한 것이어서 바람이라도 쐬라고 창문을 열면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다. 바람과 볕에 까매지는 것을 아시는 건지. 그렇게 마르며 까매져 끝에 닿는다는 것을. 물어볼 일도 아니지만 물어도 대답을 아니 하실 것이다. 뒷일을 보는 것조차 힘들고 때론 잊기도 한다. 기억은 풀어진 실타래처럼 엉켜 추슬러 되감기엔 시간이 넘어서 앞질러 가고 있다. 그 시간을 부릴 수 없으니 나는 도리가 없다. 어쩌면 풀어 헤쳐진 실은 어느 지점에서 끊어진 게 분명하다. 이제 실타래에 남아 있는 실은 잘 사려 감는다고 해도 몇 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 한 움큼도 되지 않을 풀어진 실타래 같은 기억의 저편에 감꽃이 피고 지고 말라가고 있다.

어릴 적 앞집에 고목이 된 감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그 해, 시집을 온 열여덟 새색시 내 어머니가, 배가 고파 나무아래 누워있는 소년 인민군을 부엌으로 데려와 밥을 먹였다던 아득한 추억의 감나무이다. 그때, 마지막 감꽃이 지고 있었다고 기억이 있던 어머니는 말했었다. 사실과 전설은 이제 구분되어지지도 구분할 이유도 없다.

어린 시절의 봄날, 아침잠에서 깨면 앞집 감나무 아래로 뛰어가곤 했다. 노란 감꽃이 바닥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실로 꿰어 감꽃 목걸이를 만들거나, 더러는 주우며 먹기도 했다. 꽃 속에 숨어 있던 개미가 놀라 기어 나오면 개미보다 더 놀라 입안의 꽃을 뱉었다. 달착지근한 맛이 아까시아꽃 보다 맛이 순했다.

잠에서 깨 마당에 서서 눈가 졸음을 지우려고 할 때, 어머니는

“앞집 감나무 아래 가보렴. 누나 거기 갔다.” 하시곤 했다.

누나와 함께 주은 감꽃 그득 담긴 바구니를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때,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뿌듯했다.

“막내 바구니가 누이보다 그득하네. “

어머니가 하시던 그 말이 그때는 왜 그리 좋았던지.

미동도 않던 어머니 방에서 기척이 났다.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다가 몸이 불편할 때 짧게 내는 나름의 구조 요청 신호라는 것을 안다. 방안은 냄새가 가득했다. 이불을 들추고 돌아 뉘였다. 기저귀 밖으로 뒷일 본 것이 노랗게 새어나와 있었다.

대학시절인지, 졸업 후 결혼하기 전인지 어머니와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눈 일이 있었다. 서향이던 마루에 앉아 앞산에서 내려오는 저녁노을을 등으로 받으며 칼국수 반죽을 밀고 계셨던가. 어쩌다 똥 싼 일이 화젯거리가 됐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우리 남매들 똥 이야기를 유쾌하게 하시던 어머니와 얼굴을 찡그리며 얘기를 나누던 일이, 저녁 하늘을 힘껏 물들이고 산으로 가라앉는 순간의 해처럼 또렷하다.

“엄니, 자식 똥이라도 여하튼 똥은 더럽잖수. 그래, 삼남매 똥을 다 치우며 농사일을 어찌 하셨소? 집안 일거리가 적은 것도 아니고.”

어머니는 그때 그러셨다. 들에 갔다 오면 기저귀는 기저귀대로 나뒹굴고 똥 범벅을 한 애는 애대로 울고 있었다고. 이불 위에 똥을 싼 것을 보면, 감꽃이 떨어져 마르기전에 움푹한 곳에 쌓여있는 것 같았다고. 내 새끼 똥을 맨손으로 치웠다고.

그러기는 하거니와, 지금, 어머니의 뒷일 본 것이 내게 감꽃으로 보일 리 만무다.

“엄니 날 부르면 되잖소? 왜 더럽게........”

아, 이 말은 입 밖에 낼 소리가 아닌데....... . 이미 늦었다.

벌어지는 일만으로도 기막힌 일인데, 더 기막히게도 쓸 데 없는 말까지 부조하고 나선 꼴이 됐다. 아니꼬운 자식의 자리에서 들이댈 만한 말이 아니란 것쯤이야 진즉 알고도 남는데, 무릅쓰고 가야할 길에서 번번이 쑤셔 박힌다.

어머니의 뒷일 본 것을 기저귀에 욱여싸서 방문을 나서는데 눈앞이 뿌예져 벽에 똥 묻은 기저귀를 뭉갤 뻔했다.

감꽃이 무더기로 말라가든 낱개로 흩어져 개별성을 유지하든, 떨어진 감꽃의 끝은 말라간다는 것일 터인데, 사람의 일을 앞에 놓고 보편성이라는 단어로 밀어붙이면 내 어머니의 지금 삶은 그저 그런 일이 되고 마는 것인가. 떨어지면 마르는 것이고, 나이 들면 흐려지고 가벼워지는 보편적 상황에서 내 어머니의 삶도 뭉뚱그려 그 범주에 넣으면 불민한 자식은 맘이 편해질까. 이런 모든 것들을 누군가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으나 될 말이 아니기에 묻지 않는다.

물을 데워 몸을 씻기고 뽀송한 요대기를 골라 앉혀드렸다. 모자간에 서로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은 없다. 당신이 내게 했듯, 몸을 씻겼다. 갈아 입혀드린 윗옷 헐렁한 목 사이로 어머니의 낮아진 젖무덤이 안쓰럽게 붙어 있다. 가슴 양쪽으로 감꽃 진 자리에 떨구지 못한 감꽃이 까맣게 매달려 있다.

감꽃 핀 자리, 거기가 내 생의 시원(始原)인데.

 

<김정태>

j-tae42@hanmail.net

『수필과비평』 수필 등단(2016) 『딩아돌하』 시 등단(2019)

수필집 『밥과 똥을 생각하며』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충북지부장, 청주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