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 / 김 희 자
섬과 섬을 잇는 다리 여섯 개를 지나 그리운 땅을 밟았다. 꿈결에 듣던, 밤잠을 설치게 했던 고향이다. 보물섬이라 불리어지고 있는 남해는 조선시대 때 정쟁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유배지였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유배객들이 귀양지에서 절망을 딛고 문학의 꽃을 피운 곳이다. 몇 해 전, 이곳에는 시대적 운명으로 인한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했던 유배객들에게 빛을 주고자 문학관을 세웠다. 귀양살이를 했던 옛사람들의 기록이 없었다면 어찌 그들을 그리는 유배문학관이 세워졌겠는가. 생이 절정일 때가 있다면 필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암울했던 시절에는 유배지였지만 지금은 보물섬으로 거듭나고 있는 남해다. 어둡고 답답한 시대가 흑黑의 세상이었다면 유배문학의 산실이 된 지금은 백白의 세상이 된 섬이다. 문학관 마당에는 당시의 처참한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물살 센 노량해협을 건너온 수레가 지칠 대로 지쳐 있고 티끌 같은 섬으로 귀양살이를 온 귀양객이 탈진한 수레 속에 앉아 있다. 한양에서 수레로 달려온 천리 길과 뱃길 시오리. 삶과 죽음을 가르는 노량해협을 건너 여기까지 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화전花田을 만들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구운몽九雲夢을 엮었던 서포西浦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유배문학관으로 든다.
언제 생이 마감될지 모르는 귀양길, 유배라는 서술어가 숙연하게 만들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빛을 발하고 있으니 기록의 힘은 대단하다. 고독은 예술가 내면의 잠재적인 예술성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나 진배없다고 했다. 고독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은 저마다 섬의 세계에서 예술을 낳는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섬에서 그리움 삭이는 법을 배우며 붓을 들었던 것이다. 작가라는 이름표를 어줍게 달고 고향을 찾은 내게는 그들의 존재가 더 큰 의미로 다가선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은 훗날 이렇게 희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문학관 안으로 들어서자 귀향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이의 심정을 그려낸 상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들의 팍팍한 삶이 그대로 전해져 와 가슴이 쓰리다. 전시물 중, 흑黑과 백白을 상징한 조형물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백척 간두에 선 유배객의 심정을 대비시켜놓은 조형미술이다. 흑과 백 사이에 내려온 동아줄이 침묵하고 있다. 한 가닥 내려온 외줄이 절박함을 그려낸다. 생과 사의 기로, 기약 없는 유배 길에서 실오리 같은 희망을 던져주는 동아줄이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무언가를 붙들고 싶어 하는 심정을 곧잘 표현해 놓았다.
흑과 백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삶과 죽음, 가장 절망적인 때와 희망적일 때를 생각하며 대조적이 두 세계를 그려본다.
흑黑, 절망을 상징하는 어둡고 좁은 공간이다. 적막뿐인 공간 속으로 들어가 혼자가 되어본다. 지난날의 출세와 부귀영화도 하룻밤 꿈만 같았을 귀양객이 되어본다. 아무도 없는 막막한 섬에 서보니 깊은 외로움만 몰려온다. 모두 버리고 왔으니 더 이상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마음대로 오갈 수도 없고 품은 뜻을 펼칠 수도 없으니 동아줄을 잡을 수밖에, 유배지에서 오직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서책을 곁에 두고 글을 쓰는 일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뜻을 그려 낼 수 있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는 붓이었으리라.
창호지로 낭창낭창 스미는 갯바람에 흔들리는 등불, 희미하니 등불 아래서 붓을 적셨을 시간들이 스쳐 간다. 생사의 기로에서 그나마 붓으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으니 천만다행이지 않는가. 고독을 견디는 자만이 위대해진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깊은 고독과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고독과 위기의 순간이 오히려 좋은 스승이 되어 꿈을 꾸게도 만든다. 절망의 땅, 유배지에서 문학이라는 찬란하니 꽃을 피우며 희망을 노래했으니 그들을 기리는 오늘이 있는 것이다.
어두운 공간 속에 들어와 있는 나 또한 고독에의 진한 향수가 있다. 믿었던 세상이 나를 버린 듯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울 때가 있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에 덴 듯 신산한 삶이 위궤양을 일으키고 출혈이 생겨 빈혈을 일으켰다. 내 목숨 하나 던져버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붙이들을 생가기하면 사라질 수 없었다. 흑과 백의 경계에 있는 저 동아줄처럼 나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백白, 어둠이 그치고 새날이 오는 희망의 공간이다. 누구나 절망의 끝에 서게 되면 희망을 갈구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 동아줄을 힘껏 당기며 오를지도 모른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서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귀양살이를 하던 옛 문호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바깥세상을 동경하며 글을 썼듯이 나 또한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붓을 들었다.
옛 문호가 절망과 고뇌 속에서 꿈꾸던 세상을 그렸듯이, 나 또한 몸을 사르며 영혼에 풀무질을 해댔다. 밤이 새도록 상상의 풀무질을 하다 보면 찬연한 순색의 언어가 얻어지기도 했다. 깊어가는 포도주의 맛처럼 지친 내 심신에 윤기를 적셔준 것이 수필이었다. 절망적인 세계, 세상에서 분리되어 외톨이가 되어보아야 존재의 가치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놓치고 있는 삶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을 때 백白, 희망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생기지 않았으리라.
우리는 살면서 흑이 아니면 백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넓고 깊숙이 생각해 보면 흑과 백의 논리가 같은데도 말이다. 이곳에 설치된 흑과 백의 조형을 보면 어두운 곳에 숨겨진 사물도 밝은 곳에 숨겨진 형상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검고 흰 것은 바로 내 마음이 보는 세계일 뿐이다. 눈은 흰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은 어둠으로 깃들기도 하고 검은 것을 보면서도 희망을 떠올리니 말이다. 수시로 변하는 것이 마음이니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찌 검고 흰 것을 분별할 수 있으랴.
흑과 백 사이에 내려온 동아줄을 힘껏 잡아본다. 흑과 백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면 누구나 백에 손을 들 것이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빛을 발할 수 없고 동아줄의 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 반쪽은 또 다른 반쪽과 하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절망은 희망을 위해 존재하며 꽃을 피운다.
공空 / 김 희 자
마음을 내려놓고 싶을 때 찾아갈 곳이 있다면 복이다. 언제 오라고, 언제 가겠노라 하지 않아도 아무 떄나 마음을 들이밀 수 있으면 그 길이 자유롭다. 집을 나설 때 내리던 눈이 남으로 갈수록 비가 된다.
산으로 들자 안개가 자우룩하다. 쭉쭉 뻗은 소나무 숲은 온통 안개 바다이다. 산마루에 올라서자 암자가 아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암자는 침묵하는 안갯속에 잠겨 있다. 영축총림의 선원禪院극락암에는 수도승들이 깨달음을 향한 동안거에 들어있다. 여여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지붕 너머로 대나무 숲이 보인다. 안개 숲에 잠긴 암자가 대숲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그 풍경은 먹물로 그린 수묵화 같지만 그 안에는 모든 빛이 침묵하며 녹아있다. 침묵의 세계는 텅 빈 공空의 세계와 진배없다.
겨울 암자의 매력은 텅 비어 있음에 있다. 뜰에는 적요만이 깃든다. 스님들은 풀리지 않는 화두를 들고 아득한 시간의 어귀를 서성인다. 적막한 풍경 속에서 처마 끝에 우는 풍경소리는 더욱 명징해지고 시련의 세월 속에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절제의 시간이 깊어진다. 내가 겨울 암자를 찾는 연유는 세상의 시간으로부터 단절된 곳에서 진실한 내 영혼을 불러 세우고 깨어있게 하기 위함이다. 종교를 떠나 자연과 하나가 되면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못 위에 극락으로 가는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즐거움만 머무는 곳 극락인가? 한 계단씩 발걸음을 옮겨 여여문안으로 들어서니 암자 마당에 비가 내린다. 오늘은 정진하던 스님들도 쉬는 날이다. 처마 아래로 내려와 머무록 있으니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석등에 불이 절로 켜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자욱한 안갯속의 암자이다.
정겹게 맞아 주는 K 스님의 안경 너머로 미소가 번진다. 말수는 적지만 잔잔한 미소로 늘 지켜봐 주는 스님이다. 나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는 스님은 창호지가 발린 띠살문을 연다. 산속의 찬바람이 들어서는데도 방문을 살포시 열어둔다. 차를 준비하는 스님의 손길 속에 배려하는 마음이 들어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모든 것은 마음이 좌지우지한다더니 뽀얀 창호지에 그 마음까지 새겨진다.
말차를 자연스레 휘젓는 스님의 손에 눈길이 머문다. 열다섯 나이에 산으로 들어 자연인이 되고 싶었다는 스님이다. 차를 준비하는 손길이 온전히 자연인의 모습이다. 푸른 거품이 이는 말차를 입에 넣자 씁쓰레한 자연의 맛이 입안 가득 번진다. 마당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차를 마신다. 앙금처럼 남아 있던 속세의 미련을 말차가 말쑥하게 씻어준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자연 속에 묻히고 싶었건만 입구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마음이 쓰인다.
일 년 동안 써 둔 글을 다듬느라 원고와 씨름을 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겨루기 연습을 했지만 씨름 마당에서 패배했다. 화려한 무대 뒤에 서리는 외로움처럼 모든 것이 끝났다 싶으니 공허해졌다. 긴장을 풀면 몸이 아프다고 하더니 바로 꽃 진 후에 새가 우는 격이었다. 혼신을 다했던 터라 후회는 없었지만 꼬박 이틀 동안 한기에 들었다. 힘들고 아프고 무거운 것들은 더 얻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 삼 일째가 되던 날 겨우 정신을 세우고 극락암으로 왔다. 내 안에 머무는 소원함을 말끔히 비우고 싶었다.
차를 마시며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절에서 하는 말씀이 곧 시詩라 한다. 듣는 것도 공부니라. 척추, 나를 바로 세우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도 공부다. 말과 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시며 신은 곧 자연이니 자연과 가까워지라. 바짝 세운 등 뒤에서 가는 빗소리가 들린다. 처마에 매달린 주렴 사이로 새소리가 들리고 침묵하는 암자에서 나는 깨어난다.
따스한 차 한 잔까지 손안에 있으니 인생살이가 다 녹아있는 셈이다. 한 잔의 좋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침묵할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내면을 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 복잡한 속세에 사는 내가 공空에 든다는 말을 어찌 담겠는가. 하지만 산중에 들어 자연과 마주하면 텅 빈 충만을 느끼기도 하여 평온해진다.
찻잔을 내려놓고 나와 절집 마당을 거닌다. 젖은 마당을 걸으니 마음까지 연해진다. 자박자박 걷는 발아래서 흙냄새가 난다. 샘가에 침묵하고 선 비 한 자루도 참선에 든 것 같다. 감로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다. 내리던 비가 하얀 눈으로 변하여 암자 뜰에 앉는다. 나풀나풀 내리는 눈을 보며 하룻밤 묵고 싶지만 이 또한 욕심임을 안다. 나를 찾는 길이 따로 있을까. 밖으로 보이는 세상도 침묵 속에 잠긴 듯하다. 속세의 연을 끊을 수 없는 나는 이렇게 자연 속으로 드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비울 수 있다.
여여문을 빠져나와 기다리는 사람에게 다가서니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녹아들 기다림이 아니다. 배려하며 참아준 남편이 고맙기만 하다. 집을 나설 때 내리는 눈을 보고 위험하다며 기어코 따라나선 남편이다. 기다림이 지루했을 터인데도 아무런 말이 없다. 그는 늘 그랬다. 고통스런 세월을 뒤로 한 채 침묵하며 자리를 지켜온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의 곁에서 침묵하며 함께해야 할 사람이 바로 나다. 세상사 복잡하고 힘겹지만 단순하고 묵묵하게 살아가는 지혜만 지닌다면 살아볼 만한 세상이다.
모든 것은 마음 안에 있다고 했다. 현세에 사는 속인에게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을까. 주어진 삶에 정성을 다하며 묵묵하게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공空에 머무는 것이리라. 언제나 나보다 침묵하는 남편이 운전대를 잡는다. 북쪽으로 가는 도로에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뀐다. 훈훈한 차 안에서 설핏 잠이 들었던 나는 오늘의 호사에 마음이 허공처럼 고요하다.
배짱 / 김 희 자
만물이 제 깊이를 가늠하고자 눈을 뜨는 봄이다. 유연하게 누운 지붕 너머로 연초록 잎들이 사근사근 어깨춤을 춘다. 긴 겨울이 떠난 자리에 봄이 찾아와 자리를 틀었다. 그늘진 구석구석을 봄볕이 들어가 보시를 한다. 봄 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영원히 머무는 곳, 천년을 하루로 산다는 부석사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가고 왔다. 스쳐 지나간 시간들은 저마다 세월의 흔적을 남기듯 배흘림기둥에도 하나 둘 금이 가 있다. 봄물이 도는 육신을 배흘림기둥에 의지하며 살포시 기대섰다.
등에서 묵직한 기운이 느껴진다. 조화로운 미와 무수한 시간을 떠받들고 선 배흘림기둥의 자태에 고혹된다. 배흘림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볼록하게 깎는 기법으로 고개를 사뿐히 든 지붕 추녀를 받치고 섰다. 둥그스름한 기둥이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유해 보인다. 추녀를 받친 기둥의 높이와 굵기가 듬직한 중년의 모습을 닮았다. 진득한 배짱이 없었다면 천년이 훌쩍 넘는 일월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으랴.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빛을 발하는 만물들도 돌고 도는 자연에서 만들어진다. 이 기둥 또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끈기와 고집으로 긴 세월을 버텨 왔으리라. 침묵하는 기둥도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세월의 강을 건너온 이야기가 살금살금 말을 걸어온다.
부석사의 역사는 무량수전을 변함없이 지탱하고 선 이 배흘림기둥의 배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진중한 기둥에 기대어 서 있으면 등에서 뿌듯함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사랑이듯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보이는 법이다. 눈을 크게 뜨면 도처에 지혜가 숨어있고 스승이 널려 잇다.
배흘림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배짱 두둑한 사람의 불거진 배처럼 튀어나와 있다. 둥글게 튀어나온 기둥이 참으로 배짱 좋게 생겼다. 마당에서 올려다보아도 옆에 서서 기대어보아도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용모다. 가까이 다가서면 설수록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은 뚝심이 철철 넘친다.
배짱이란 뱃腸, 뱃속에 있는 장기들을 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담이 크다, 대담하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하는 표현들은 배짱과 관련된 말이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내부가 튼실하게 채워져 있으면 배짱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근성과 뚝심, 끝까지 투쟁하려는 기백과 내공이 없으면 배짱은 생기기 않는다. 배짱 두둑한 배흘림기둥을 보고 있자니 은근한 배짱으로 후배들을 소중하게 어르는 s 선생님이 산자락에 떠오른다.
후배들을 지도하며 이끄는 S 선생님의 생김새는 배흘림기둥과 흡사하다. 훤칠한 키와 듬직한 몸매, 툭 불거져 나온 뱃살이 배흘림기둥과 닮은꼴이다. 몸담고 있는 문학회를 우뚝 세우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기둥의 역할을 하는데 손색이 없다. 문학회의 기둥이나 다를 바 없는 S 선생님은 늘 그 자리에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은근하게 나아가는 고집이 있다. 조금도 굽히지 않고 버티어 나가는 성품이나 태도가 배흘림기둥의 배짱과 꼭 닮았다.
사업을 멀리한 지 이십여 년이 넘었지만 삶을 즐기며 배짱 두둑하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수필에 대한 애정 또한 한결같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토론회에 참석하여 자리를 지켰고, 매일 한 편의 길을 필사하며 나아간다. 흔들림 없이 나아가기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오래도록 한자리에 머물러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과 의지를 나는 배짱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모여 어울리는 곳에서는 뜻밖의 분란이 일어날 수 있다. 가끔 문학회에 흔들림의 조짐이 보이며 ㄴ누구보다 염려를 하고 소리 없이 훈훈한 향기로 사람들을 보듬고 채워왔던 분도 그였다.
S 선생님의 매력은 한결같은 마음과 진득한 버팀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심중에 후배들을 양성하고 어르는데 뒷심이 된다.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속내를 드러내놓지도 않고 오직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기둥이 된다.
그의 은근한 고집은 배짱과 다를 바 없다. 언젠가 S 선생님은 술자리에서 죽음에 대해 두렵지 않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 말속에는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고 삶에 대해 자신감이 넘쳐났다.
흔히 우리는 배짱이라는 말을 건방지다는 말로 오해를 하고 있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S 선생님의 말처럼 배짱이란 어떻게 하겠다고 단단히 다져 먹은 속마음, 조금도 굽히지 않고 배를 내밀며 버티려는 성품이나 태도를 뜻한다. 봉황산 자락에 선 이 배흘림기둥도 세월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무량수전을 떠받치고 서 있다. 두둑한 배짱이 없었다면 감히 지킬 수 없는 일이다.
나의 배짱은 어떠한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처럼 내 삶에 배짱이 생길 때는 언제쯤일까? 나에게는 튀어나온 뱃살도 없고 삶에 대한 배짱도 두둑하지 못하다.
글쓰기에 대한 배짱 또한 넉넉하거나 풍부하지 못하다. 아직은 어설픈 글쓰기의 길을 걷고 있지만 문단에 이름을 올리고 나니 서서히 자신감이 붙는다. 미처 설익어 재치 있는 이야기꾼은 못되지만 작가란 당연히 글로써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는 두보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나아간다.
신산한 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날들이었지만 하루하루에 정성을 다하다 보니 삶에 대한 내공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생각이 심오하고 한이 깊어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듯 수필도 삶이 치열해야 제대로 된 수필이 탄생한다고 했다. 조금씩 배짱이 늘고 나니 한 걸음씩 걸어온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 배짱이 생기더라는 말속에는 한걸음 진화된 생에 대한 애정과 깊이가 들어있다. 나도 등단 오 년, 십 년차가 되면 배짱 두둑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에 신물이 나면 가끔 찾아드는 곳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배짱 두둑한 느낌처럼 삶이 여물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 때나 쓸데없는 배짱을 부리거나 내밀면 민폐가 된다. 허나 최선을 다한 삶 앞에서나 성실하게 산 시간 앞에서는 배짱을 내놓아도 괜찮을 성싶다. 인생의 가장 큰 위험은 배짱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배짱만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 아꼈지만 어쩔 수 없이 비껴간 인연에 대해서도 상처받기보다는 배짱 좋은 기억으로 남긴다면 사랑의 기억 앞에서 한층 성숙해지지 않겠는가.
한 시대의 이야기를 품고 묵묵하게 서 있는 배흘림기둥, 천년을 하루같이 괴고 선 이 기둥처럼 나도 매사에 배짱 두둑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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