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종 소리 깨어나다 / 제 은 숙
이곳에 오고 싶었다. 목숨이 다한 용왕의 아들과 그를 따라나선 수만의 물고기들이 돌로 변했다는 곳. 왕자는 미륵돌이 되어 석괴로 잠든 신하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비가 내리면 석심石心에서 퍼지는 종소리를 듣게 된다는 신비한 전설이 깃든 장소이다. 어느 영화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오열하던 남자를 생각한다. 끝끝내 찾지 못한 인연 대신 그의 귓전에 울리던 경석 소리를 나도 듣고 싶었다.
만어滿魚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쉬이 찾지 않았을 작은 사찰이다. 무더기로 쏟아져 내린 돌덩이들이 일제히 미륵전을 향해 엎드렸다. 계곡을 가득 메운 시커먼 돌 무리 앞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물고기의 모습은 찾기 힘들다. 억지로 보고자 하는 욕심이 신들의 물길이 열리는 순간을 가로막는가. 너덜겅 사이로 길게 뻗은 길이 보인다. 신묘한 소리를 확인하고자 사람들이 두드린 곳마다 돌면이 번질거리고 바래져 선명한 띠를 이루고 있다.
두드린다고 열리는 문이 아니다. 수천 년 세월 동안 고고히 흘러온 돌강은 쉽사리 속을 내보이지 않는다. 전설의 비밀을 푸는 열쇠. 그 뜻을 알아내는 사람에게만 출렁이는 형상을 드러내고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어신魚身의 실체를 보여줄 터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미세한 움직임을 찾으며 물고기의 출현을 기다린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다는 고래나 전설 속 물고기로 불리는 돗돔, 포세이돈의 마차를 끌었다는 해마와 슬픈 설화에 나오는 인어까지 떠올렸으나 헛수고이다. 돌 고기는 나를 비웃듯 변신할 기미가 전혀 없다. 사람들이 낸 희끄무레한 길을 따라가며 애꿎은 돌덩이만 내려치다 되돌아온다. 텅텅 둔탁한 소리만 울릴 뿐 듣고자 했던 음은 아니다. 내가 다녀온 길을 미륵전 바위가 가만히 굽어본다.
이곳으로 이어져 온 발길들을 떠올린다.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로는 까닭을 알 수 없다.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까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혼을 부르는 이름이라면 형체가 없을 터. 너덜지대를 걷다가 처음 절을 지은 가야인의 마음으로 정신을 모으면 해답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자연과 용신에 대한 경외심.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은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여겼던 믿음이었다. 그 신념들이 모여 천지간에 물고기를 불러낸다. 눈앞에 보이는 검은 돌무덤은 육체요, 생명의 너울로 꿈틀거리게 하는 믿음은 영혼이 된 셈이다. 물고기의 일신은 바람과 비에 깎여 푸석해졌지만 신앙만은 선명하게 살아남아 넋의 소리로 울려 퍼진다. 그 울림을 읽을 수 있는 감각이 신어神魚의 영역을 열고 경돌의 쇳소리를 듣게 하리라.
첫눈에 반한 여자가 만어의 전설을 들려주었을 때 영화 속 남자는 믿지 않았다. 여자의 아버지는 월북한 지식인이었고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힘든 시대였는데도 남자는 이별을 애써 부정했다. 그는 숨어 버린 연인을 찾아 헤매다 만어들의 땅에 다다른다. 안개 자욱한 돌 골짜기에서 목 놓아 울며 마침내 이별을 받아들인다.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종소리 또렷하게 들려온다.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믿음이 결계의 장막을 걷고 여자의 진심을 전하는 석종을 쳤을 테다. 시대가 만들어낸 거짓을 꾸짖는 경종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고 부르짖는 돌의 북소리.
이곳에 와서 세상 너머의 소리를 들으면 내 삶을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기 시작한 소리들을 찾을 수 있을 듯도 했다. 채워지지도 비워지지도 않는 욕심들과 싸웠다. 마음에는 날이 섰고 육신은 닳아서 움츠러들었다. 상처가 쌓여 일상을 좀먹었고 어떤 욕망은 썩어서 고약한 냄새를 피웠다. 영혼은 나날이 탁해지고 내 안에는 무겁고 시끄러운 소음만 가득하였다. 이 자리에서 증오로 각인된 기억들을 비워내고 묻혀 있던 맑은 옥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삶의 본질을 여는 방법도 알고자 했다. 순리대로 살면 편안해진다는 평범한 기대를 품었다. 폭풍우를 뚫고 나는 어린 새의 날갯짓과 꿈을 향한 청춘의 순수한 열기와 밤을 꼬박 새우는 어미의 비손으로 세상이 가득 차기를 바랐다. 그래야 깎아지를 듯한 인생의 협곡에서 돌종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수많은 걸음걸음이 암괴에서 물고기가 깨어난다고 믿으며 이 땅으로 모일 리 없다. 사람살이의 끝이 허방일 리만은 없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으로 메워야 하는지 아직 모른다. 미미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더욱 막막하다. 다만 살아내려 애쓴 흔적과 누군가를 살리고자 했던 손길에 온전히 그 존재를 믿어주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몫을 쟁이느라 사소하게 지나쳤던 애틋한 음성을 기억하며 내면의 소리를 찾으러 왔다. 여기에 어리석었던 과거를 버리고 돌탑을 쌓는다. 위로 올라갈수록 가벼운 돌을 얹어야 중심이 서듯 나이를 먹을수록 안을 비워야 본심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듣는 모든 소리는 내 안에서 나왔다. 고대인들이 믿음 하나로 석신石神을 깨웠듯 내 속에서 튀어오르는 소리들로 넘어진 현생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오랜 후에 돌의 계곡이 풍화되어 자취 없이 사라져도 굳은 마음만은 오롯이 남아 백골석白骨石을 받들 것이다. 사람 또한 소멸될 몸으로 태어났지만 누군가에게 기억될 존재이다. 아무도 지지해 주지 않는 생인들 어떠리. 아직 끝나지 않은 삶에서 곡진한 흔적들이 세월의 골짜기를 채울 때 물가 모래 언덕 위에 나직한 흙성 하나 지으면 그뿐. 파도가 밀려오면 끝날 운명이지만 내가 살았다고 믿으면 내 생은 분명 거기에 있다. 스스로를 믿는 순간, 눈앞에 놓인 돌강과 선계를 흐르는 신화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돌 껍질이 터지고 만어들이 서서히 되살아난다. 안개가 자욱이 밀려온다. 어디선가 석종 소리 깨어나는가.
'추천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소리에 관하여 / 고 경 숙 (1) | 2026.05.05 |
|---|---|
| 빗금 / 류 창 희 (0) | 2026.05.05 |
| 말 / 최 민 자 (0) | 2026.04.27 |
| 제11회 항공문학상 대상 ㅡ 할아버지의 굳은 살 / 이 규 근 (0) | 2026.04.26 |
| 2023 좋은수필 베스트 10작품 / 다림줄. 외3편 ㅡ최 운 숙 (0) | 2026.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