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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소리 너머로 / 김 상 태

장대명화 2025. 12. 6. 07:36

                                  

                                     기적소리 너머로 / 김 상 태

 

철도는 내 삶에 오래도록 깃든 풍경이다. 어린 시절, 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하루의 시작이자 저녁의 끝이었고, 때론 유일한 외출의 구실이었으며, 먼 타지로 향하는 문턱이었다. 길게 뻗은 철로 위를 달리는 작은 열차 안에는 전하지 못한 인사와 한때의 설렘이 실려 있었고, 창밖의 풍경은 그 모든 감정을 조용히 받아내곤 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마친 뒤 대구에 있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기차로 통학했다. 매일 통근 열차를 타고 도시로 향하고, 저녁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좌석은 늘 부족했고, 계절은 늘 선 채로 보냈다. 그렇게 기차는 내 삶의 일부였다.

 

그 시절 우리 집엔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없었다. 대신 통금 사이렌 소리, 새벽 교회의 종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기차의 기적 소리가 있었다. 기적은 하루의 맥박처럼 일정한 리듬을 가졌다. 길게 한 번 울리면 대구행, 짧게 두 번이면 귀가 열차였다. 그 소리는 알람시계보다 다정했고, 손목시계보다 정확했다.

 

한겨울 새벽, 어머니는 통금 해제로 착각한 사이렌 소리에 밥을 짓고, 해가 뜨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웃하셨다. 그날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 앞에 조용히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마음 깊이 남아 있다.

 

기차를 놓친 적은 거의 없었다. 시간에 맞춰 달려가면 언제나 기차는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사고나 연착으로 지각하는 날은 있었다. 한 번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 교실에 도착한 적도 있다. 허무했지만, 안개 낀 산등성이와 철로 옆 들꽃, 논 사이를 지나던 노란 국화차의 뒷모습이 나를 위로했다.

 

그 시절 느릿한 통근 열차는 낭만이었다. 빠른 고속열차보다, 나는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도시락 냄새, 누군가의 한숨, 홍익회 판매원의 목소리, 그것들이 나의 성장 배경음이었다.

 

이제 그런 열차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소도시는 쇠락하고, 폐역은 늘어만 간다. 지도에서, 간판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나씩 지워진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사라짐을 따라가는 여행을 즐기고 있다.

 

최근 찾은 곳은 군위 화본역이다. 1938년 2월 1일 문을 연 이 작은 역은 2024년 12월 18일 마지막 기차가 출발하고 지금은 폐선되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화본역은 네티즌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도 뽑히기도 하였다. 나무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들리지 않는 기적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역사 한편에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급수탑이 여전히 서 있었고, 대합실엔 옛 기차표와 역무원 모자가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그 모자를 조심스레 머리에 얹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잘 다녀왔습니다.”

 

긴 인생 여정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고, 스쳐 지나가고, 때론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그리고 어느 날, 더 이상 기차가 멈추지 않는 어느 폐역에 홀로 앉아,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때 우리가 남긴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인생이라는 선로를 이룬다.

 

역 플랫폼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 보면, 열차가 다시 올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선로 위로 더는 기차가 지나지 않는다. 정적이 역을 감싸고 있지만, 그 고요는 낡고 쓸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간이 쉬어가는 소리, 기억이 머무는 숨결이었다.

 

사라져가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종종 슬퍼한다. 그러나 그 사라짐이야말로 우리의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우리가 걷는 이 길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추억이 된다. 철길은 우리를 갈라놓지만, 그 끝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결국 하나다. 떠나는 자도, 남는 자도, 결국은 같은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뗀다. 어쩌면 그 걸음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고요한 노래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