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을 이고 앉은 여자 / 오 경 자
질투가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공인된 명언은 아니지만 동의할 사람도 있고 아니라고 도리질을 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워낙 변변치 못하다 보니 그만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터라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그도 그럴 법한 말인 것 같다.
나이 서른씩 돼 가지고 뜨뜻미지근하게 만나서 그저 그렇게 큰 탈 없이 한 30년 살았기에 망정이지 뜨겁게 좋아하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린 짝꿍을 가졌더라면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덤비고도 남았으리라.
강화도 전등사의 대웅전 처마 자락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 조형물이 관심의 표적이다. 무심히 보면 그냥 사람인가, 원숭이인가 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자세히 보면 여인이 꿇어앉아 머리에 지붕을 이고 앉은 형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분명 그것은 여인에게 지붕을 받치고 앉아 있도록 깎아 놓은 것이다. 전등사를 지을 때 대목(도목수)이 절 아랫동네의 주막집 아낙과 눈이 맞았다. 객지에 오래 나와 있던 대목의 외로운 마음은 그 아낙에 의해 뜨겁게 달구어졌다. 공임을 받는 대로 아낌없이 갖다 바치며 사랑을 익혀갔다. 대목에게 있어 그 여인은 심신을 다 바친 연인이었다.
어느 날 주막에 내려간 대목은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 여인이 흔적도 찾을 길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소문 끝에 알아낸 사연, 동네 사내와 단봇짐을 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대목의 불타는 가슴에 기름 되어 부어졌다. 몇 날 몇 밤을 일손도 놓은 채 여인을 기다리며 반 미쳐 돌아가던 대목이 드디어 마음을 잡고 다시 끌과 망치를 들었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사내는 몇 날 동안인가를 열심히 나무만 깎고 다듬었다. 그 조각품은 자기를 배신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상으로 대웅전 기둥 위에 놓이고 기와가 올려졌다. 제 마음을 찢어낸 죄과로 영영토록 무거운 지붕을 이고 앉아 있으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사랑을 배신한 여인에 대한 징계, 가부장 사회에서 여과 없이 동조되었을 이 이야기는 진위 여부야 상관없이 당연한 논리로 받아들여지고 회자되어 전설이 되었으리라.
탑이나 건물 등 건축물에 동물이나 사람을 새겨서 기둥으로 쓰는 예들은 많이 볼 수 있다. 구례 화엄사의 사자 탑도 사자들이 탑신을 받치고 서 있다. 그리스 신전도 여인상들이 미끈미끈 기둥으로 세워져 있다. 이것 역시 지붕을 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조각물들에 전등사처럼 슬픈 전설이 딸려 다니지 않는다.
내 것인데 나를 버리고 가다니 이런 죽일 X이 있나? 어디 한 번 맛 좀 봐라. 이런 차원의 질투심이 무릎 꿇려 만년 세월 지붕을 이고 살게 한 이 여인 앞에서 흘릴 남편들의 김빠진 웃음 한 자락이 입가를 스쳐 지나간다. 변심한 애인이 괘씸해 손에 쥔 연장으로 만년 형벌을 깎아낸다면 조선조 여인들은 수 없는 시앗을 볼 때마다 바늘로 풀각시라도 쪼아대야 했을 것 아닌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수제비를 끓이다가 변심한 남편의 형상을 밀가루 반죽으로 떼어 수제비 국물에 퐁당퐁당 떨어뜨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 잔인한 발상인가 싶었으나 그런 생각조차 감히 해 볼 수 없었을 지난날 우리 여인들의 찌들린 억압이 콧등을 찡하게 한다. 변심해서 아예 자취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한집에다 어엿이 첩을 들여앉혀 놓고 사는 남편, 투정 한번 못해보고 시부모 봉양까지 여축없이 해내며 시앗 비위까지 맞춰야 했던 그 여인들의 속이 재가 되기도 전에 수 없는 형상들을 짓고 태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에 가면 성당 뒷면 추녀 끝에 물받이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서 있다. 그 조각품들 중에 유독 하나가 색다르게 눈길을 끈다. 자세히 보면 신부님의 형상이다. 신부님이 목을 내밀고 서 있는 형상으로 뻗혀 내려와 있는데(사선으로) 그 입으로 물이 토해져 내려오게 되어 있다. 이 신부님 형상 물받이가 두 가지의 전설을 지니고 있다.
노트르담 사원을 지을 때 재정책임을 맡았던 신부님이 부정을 저질러서 그 벌로 물받이로 만들어 토해내는 형벌을 오래도록 받게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은 좀 다르다. 공사를 총감독하던 신부님이 어찌나 무섭고 지독히 일을 시켰던지 일꾼들이 벼르고 별러 그 신부 형상을 만들어 슬쩍 물받이의 일원으로 끼워 넣어 분풀이를 했다는 설이다. 재정담당 시부님 쪽보다는 공사 총감독 신부 쪽의 전설이 더 수긍이 가는 것은 어쩐 일일까?
잘못에 대한 공식적인 처벌로 이런 해학적인 방법을 썼을 리 없을 것 같아서이다. 아무튼 그 신부님 형상 물받이를 보면서 짓궂은 웃음 한 자락이 내 입가를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처벌의 연유야 다르지만 골탕을 먹여야겠다는 발상이 전등사 이야기와 똑같다는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동서양이 왕래도 잘 안 했을 때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비슷한 생각들을 했을까? 인류가 얼마만큼 살고 나면 비슷한 생각들을 하는가 보다.
변심한 여인이 괘씸해 지엄하신 법당 기둥 위에 앉혀 놓고야 마는 사내,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조각했음은 분노의 극치를 표현해 내고 있음이렷다.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뭉게구름 한 무더기가 선녀의 모양새를 만들다가 지유며 흘러간다.
그런 질투나 저주의 사연보다 절을 짓는 동안 집에 가는 일은 고사하고 여인의 옷깃조차 스칠 수 없었던 금욕생활의 연속이었던 목공이 아내가 그리워 자신도 모르게 여인 조각상을 깎아내 자신의 뜻을 담아 법당과 함께 오래도록 보존코자 처마 한 귀퉁이에 소중히 끼워 넣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질투의 화신이 깎아낸 저주의 조각품이 아니라 사랑이 승화해낸 예술품이 저기 올려져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전설을 지어 내린 사람들이다. 내 나름의 신 해석을 하고 나니 이를 악물고 앉아 있는 것 같던 그 여인상이 경건한 표정으로 근엄하게 내려다본다.
사랑, 어떤 것이 옳은 해석이고 정의일지 나도 모르고 앞으로도 어느 누구인들 정답을 알 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갖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나 다 해주고 싶은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만 다해 주어야지, 나만이 해주어야지, 나를 대신할 그 누구도 용납될 수 없으니 사랑은 곧 질투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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