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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솥밥. 등불 / 장 익 상

장대명화 2025. 10. 27. 13:00

                                           한솥밥 / 장 익 상

 

가을 단풍이 무르익어갈 무렵, 인사 발령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담벼락에 붙은 ‘하숙생 구함’이라는 스티커에 눈길이 붙잡혔다. 골목을 따라 찾아간 집은 인왕산 자락 옥인동 고지대에 있었다. 거처를 구했다는 안도감에 그날부터 바로 들어가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출근하는 사무실은 아랫동네 통인동에 있었다. 서울 생활 3년째 되는 해 봄부터 야간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사무실 가까운 곳으로 하숙집을 옮겼다. 그 집은 방이 여러 개 있어 하숙생이 대여섯 명이나 되었다. 2인 1실로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는 조건이었다. 주인은 연세가 드신 육십 대 아주머니였는데 오랫동안 하숙을 해왔던 분 같았다.

 

저녁 식사는 하숙생들이 주인집 방 앞 넓은 거실에 모여서 함께 했다. 회사원과 공직자, 지방에서 유학 온 학생 등 하는 일은 달랐지만, 식탁은 젊은이들이 내놓은 화제꺼리로 늘 풍성했다. 회사에서 근무하다 꾸중을 들었다거나, 고향에서 부모님이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다는 등 저마다의 사연이 오가다 보면 어느새 한 집 사람들 같았다. 밥을 지을 때 쌀과 잡곡이 어우러져 한솥밥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식구가 되었다.

 

마음씨 좋은 주인아주머니는 하숙생들이 저녁 늦게 들어왔을 때는 따로 밥상을 차려주지 않더라도 거실에 와서 챙겨 먹으라고 했다. 어떤 때는 저녁을 밖에서 먹고 왔어도 배가 고팠다. 그런 때면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야식으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월급날이면 2만 원가량을 봉투에 넣어서 주인에게 드렸던 것 같다.

 

무역회사에 다닌다는 룸메이트는 협상과 계약을 수행하는 직업적 특성 때문인지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영어를 잘 구사했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듯 경제·경영 분야의 책을 자주 사 오곤 했다. 좁은 하숙방의 윗목에는 책이 빼곡하게 쌓였다. 나도 그중 몇 권은 읽고 내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접할 수 없었던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눌 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은 나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와는 휴일이면 대문 앞 골목에서 줄넘기를 하고, 목욕도 같이 가기도 했다.

 

결혼할 때까지 여러 곳의 하숙집을 거쳤다. 옥인동 고지대의 하숙집에 있을 때 대구의 친구가 ‘중동 건설 현장에 취업이 되었다’라면서 서울에 올라가니 출국 전날 하룻밤을 묵게 도와달라고 했다. 독방(獨房)을 쓰고 있어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니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겨울이 막 다가올 때라 방에 냉기가 들어 따로 이불을 가져다주었고 아침 식사도 같이 차려주어 고마움의 온기를 느꼈다. 그때 30대의 주인집 아들은 막 제대하고 복직한 내 심정을 이해했던지 시내의 교통정보를 잘 알려주었던 기억도 난다.

 

마지막 하숙집에 있을 때는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만나고 있을 때였다. 주인집 전화를 이용할 때라 고향에서 아내로부터 전화가 오면 주인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잘 바꾸어주었다. 신혼생활을 그 집 부근에서 하게 되어 아내와 함께 인사를 갔다.

 

“아이고 ~ 새댁이 복스럽게 생겼네!”

 

“난 하숙을 치면서 한솥밥 먹던 사람이 결혼해서 떠날 때가 가장 보람을 느껴요.”

 

축하 말씀과 함께 축의금 봉투까지 내 손에 건네주었다. 한편, 나와 다른 집에서 하숙하던 직장의 한 동료는 주인집의 딸과 소통이 이루어졌는지, 어느 날 그 집의 사위가 되었다면서 ‘완전히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라고 했다.

 

흔히 가족을 포함, 직장 동료나 같은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을 ‘한솥밥’ 먹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 말의 의미는 ‘같은 솥에서 푼 밥’으로 단순하지만, 한 무리라는 동질성을 가진 구성원을 달리 표현하는 말인 것 같다. 넓게 보면 벼농사를 짓는 농부, 쌀가게 주인, 쌀을 구매하는 주부와 하숙생 모두가 한솥밥의 삶을 사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정성이 깃든 쌀이 밥솥에 담겨 같은 불로 익히고 뜸이 들여진 밥을 먹고 있지 않는가. 지금도 나는 하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회공동체’라는 한 솥에서 나온 밥을 먹으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유행했던 최희준의 <하숙생> 노랫말에는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가는 길에 정일랑 미련일랑 두지 말자‘라고 했건만, 하숙생 시절 함께 지은 밥을 먹고 보낸 기억과 사연은 어떤 만남보다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은 사실이다.

 

사십여 년이 흘렀다. 하숙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결혼 직전에 생활했던 통인동 마지막 하숙집 부근을 어림잡아 찾아가 보았다. 개발의 붐을 타고 건물들이 새롭게 지어졌고, 골목길도 변해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여기쯤인가 짐작하고 어느 한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니 미닫이문 여는 소리와 함께 그때 주인아주머니의 나긋했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등불 / 장 익 상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빨간색 글귀 하나가 있다. ‘부지런한 물방아는 얼 새도 없다.’ 초등학교 때 5학년 1반 담임선생님께서 일기장에 써주신 말이다. 가정 실습 기간에 논두렁의 풀 벤 이야기를 써낸 내 일기를 읽고 그렇게 적어주셨다.

 

선생님의 성함은 ‘이동철’이었다. 얼굴이 약간 마른 편에 키가 컸고 삼십 대 중반이었다. 선생님은 공부를 잘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지도를 친절하게 하셨다. 학예회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아동극 연습을 시켰다. 나에게는 할아버지 역할을 맡겼다. 반 아이들보다 키가 컸고, 행동이 어른 같은 데가 있다고 보신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표정과 대사 읽는 방법을 실감 나게 설명하고 지도해 주는 것에 친근감을 느꼈다.

 

여름방학 전, 어느 날에는 시험지 매기는 일을 도우다가 늦게서야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선생님은 우리 마을까지 따라오셔서 나를 등에 업고 불어난 도랑물을 건너주었다. 등에 업히는 순간 선생님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면서 아버지의 등에라도 업힌 기분이었다.

 

가을이 되어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하고 있는 미끄럼틀 주위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그때 선생님 세 분이 다가오셨다. 두 선생님이 미끄럼틀로 올라가자, 아이들도 따라 올라갔다. 다른 한 선생님은 그 장면을 찍었다. 남학생은 나 혼자였고 따라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아래서 사진 찍는 모습을 쳐다만 보았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아이들이 우리 선생님이 전근 가신다고 했다. 아직 학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가실까 궁금했다. 선생님은 셋째 시간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근 학교로 전근한다고 말씀하셨다. 어제 일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같이하고 싶어 미끄럼틀로 오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며 아무리 힘들어도 공부 열심히 하고 학교 잘 다니라고 당부하셨다. 그러고는 내 일기를 소개해 주는 게 아닌가. 부모님을 도와드린 이야기를 일기에 적어 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셨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선생님께서 가시더라도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이 다 간 뒤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부지런한 물방아는 얼 새도 없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중·고교 시절 어려운 고비마다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통학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서 한 시간 가까이 분주히 역으로 걸어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 어두운 논틀길을 오가며 빨간색 펜글씨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며 학교에 다녔다. 학교생활에 충실히 해서 취업하는 것이 물레에 내려보낼 물길을 찾는 지름길이고, 물방아를 얼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도서관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면서 실력을 키웠다. 십 대의 호기심으로 일탈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참고 견뎌냈다. 고교를 마치고는 애원하던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방아가 찧어낸 양식이라고 해야 할까.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야간에 학교에 다녀 부족한 지식을 보충했다.

 

관광지를 지나다 물레방아 풍경을 만났다. 장식물 수준을 넘어서는 정감(情感)을 느끼면서 철썩철썩 돌아가는 모습에 눈길이 멈춰졌다. 옆에는 오랫동안 마음자리를 지켜온 빨간색 펜글씨 등불이 자리 잡고 물레를 밝혀주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은퇴하고 맞이한 가을이었다. 추석 전 성묘차 고향을 찾았다. 가는 길목에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가 보았다. 예전의 철재 미끄럼틀은 플라스틱 터널형 미끄럼틀로 바뀌어 있었다. 학교 건물도 새로 지어졌다. 교실 쪽으로 가서 1층 창 너머로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날 그때처럼 어린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변함없이 들려왔다.

 

오십 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교단에 선생님이 서 계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 옛날 선생님께서 일기장에 적어주셨던 글귀가 창밖으로 들려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