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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외 2편 / 김 학 명

장대명화 2025. 10. 21. 02:36

                           길상사 / 김 학 명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 왔다. 많이 오고 싶어 했던 사찰이다.

 

이 절집의 이야기는 주위로부터도 듣고 글을 통해서도 읽었는데 흥미롭고 또 시간 속에 사람들의 사연들이 촘촘히 녹아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이 곳의 이야기를 시작한 김영한의 다른 이름, 진향과 자야 그리고 백석 시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마음을 아파했다. 3대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을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감동하여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하였고 법정은 이 곳에 길상사를 만들면서 그녀에게는 염주와 길상화(吉祥華) 보살이라는 불명(佛名)을 주었다는 가슴 뭉클한 공간이기도 하다.

 

삼각산 길상사 현판을 지나 얼마간 오르니 제일 먼저 설법전 앞에 관세음보살상이 나와 마주한다. 아니 성모마리아상 이라고 할 정도다. 중생의 소리를 듣고 고통을 구원하는 자비로움의 표상인 그가 많이 낯설다. 지금까지 사찰에서 보던 전통적인 관음상과는 전혀 다르다. 1.8m 정도크기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얼굴은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듯 우수에 젖은 표정 이다. 머리에는 봉우리가 달린 화관을 쓰고 있으며 단발머리에 가느다란 눈, 오똑한 코,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한 작은 입을 가졌다. 가슴에는 목마름을 구원하는 감로수가 든 정병(淨甁)을 가지고 있는데 꼭 안고 있어서 마신다면 누구라도 진한 따스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는데 내게는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반겨 주는 느낌이었다.

 

사실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음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세히 알지 못한 것이다. 듣고 알고 있던 그가 지금 눈앞에 딱 마주하고 있으니 느낌이 참 야릇하다. 그저 놀랍다. 어떻다고 표현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마음으로 밖에 느낄 수 없을 뿐이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소녀의 순수함과 어머니의 지혜로운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반가사유상의 고민하고 사유하는 모습도 보이는 듯 하다. 현대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이고 담담하면서도 세련미가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단아하고 고요하다.

 

경내를 돌아봐야 하는데 초입에서 만난 관음상이 나를 붙들어 세우니, 움직일 수가 없다. 그저 눈을 맞추고 한참을 바라보다 발 길을 뗀다. 범종각, 극락전, 법정스님의 공간인 진영각과 그가 사용했던 나무의자, 길상화 사당과 공덕비. 그리고 제일 궁금했고 보고 싶어 했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공덕비에 적혀있다. 시주 당시 가액이 1,000억 원 정도였는데 기자가 엄청난 재산을 내놓느냐는 질문에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했다는 것 아닌가.

 

이곳저곳 돌아보는 시간에도 줄곧 관음상이 자꾸만 머릿속을 두드린다. 왜 그런 모습일까. 왜 성모마리아상을 세웠을까. 나의 이런 생각이 잘 못 된 걸까. 그러면서 둘러보는 둥 마는 둥 한 바퀴를 돌고 어찌된 영문인지 다시 성모마리아상 앞에 아니 관세음보살상 앞에 또 우두커니 서 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관음상의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옆 한편에는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 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최종태 교수가 조각을 했다고 적혀 있었는데 이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우선 가톨릭 신자이기도한 조각가 최종태 교수의 저서를 찾아 읽어 보았다. 이 관음상은 법정스님이 종교간 화해와 영원을 상징하는 것을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하여 이루어졌는데 그는 평생 소녀의 이미지와 여성의 모습을 조각해온 작가였다. 여성은 이성적 대상이 아닌 이상을 향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했으며 관음이 남자였다면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로 미루어보면 작가의 마음 속 관세음보살은 이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예술의 근원적 가치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관음상이 성모마리아를 닮았다고 내 느낌을 직관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아니 할 수 없다는 표현이 맞을 둣 하다. 심오한 철학을 가지고 오랫동안 구상하고 열정으로 만든 작품을 단순하게 말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음을 어떻게 시각화 할 것인가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통해 영혼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것이 성모를 넘고 관음을 넘어 경계가 없음을 표현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훌륭한 예술은 무얼까. 어느 경계를 허물고 또 초월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기존의 관념을 버리고 익숙하게 알고 있는 형태를 넘어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은 누구나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나는 종교에 문외한 이지만 그 긍극의 목적은 고통을 줄이고 사랑과 자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그러므로 표현 방식이 다르고 형태가 다르더라도 이해의 폭을 넓히고 아름다움을 서로 존중할 때 공감을 갖을 수 있지 않을까.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생각의 틀에 가두지 않는 것을 법정 스님은 무소유라고 하였다. 늘 그런 마음으로 구도를 하였던 그의 뜻에 따라 제작된 관세음보살상은 그 자체가 큰 의미라고 하겠다. 또 예술로 승화시키고 생활 속에 반영한 상징적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특정한 종교의 관념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틀을 넘어 보편적 가치를 실현 하는 것이 어쩌면 모두의 염원 인지도 모른다. 관세음보살상은 그런 바람과 함께 앞에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종교와 예술, 철학에 대한 질문의 시간과 사유의 틈을 건네주는 것은 아닐까. 한 조각의 예술이 눈을 타고 내 안으로 들어와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 이른다. 지금도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상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나를 보고 있다.

 

                                            풍경소리 / 김 학 명

 

 땡∼땡 땡그랑. 땡∼땡 땡그랑.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산허리를 돌아 산사로 내려 앉으면 풍경이 흔들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굴려 놓는다.

산내음이 그윽한 마알간 공기를 살며시 가르는 그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을 밝게하고 편안하게 한다. 햇빛을 받은 이슬방울이 영롱해진 모습으로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라고 할까 고요하고 신비롭다.

맑은 마음,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속의 눈에서 벗어나 참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가진 풍경은 언제나 마음속의 깨우침을 두드린다. 산사는 늘 그렇게 마음을 끌어 안는다.

 

  산사에서 소리를 내는 사물(종, 북, 운판, 목어)은 인위적으로 힘을 가해야 하지만 풍경은 그런 울림을 원하지 않는다. 종처럼 장엄하거나 북처럼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저 하늘에 맞닿고 눈비와 달빛과 바람이 함께하면서 울리는 자연의 소리, 내 스스로의 소리를 내고 싶어한다. 내가 내는 내 안의 울림 그것이 참소리이고 본성이며 깨달음의 소리가 아닌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작고 갸날픈 앙증맞은 소리이지만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건 맑은 자연의 울림을 들려주기 때문이고 천상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풍경은 울림의 소리속에 향기를 실어 나른다. 솔잎을 떨어뜨리며 부산하게 소나무 숲속을 지나가는 바람이 풍경에 살포시 볼을 부빈다. 댕∼댕 소리가 울려 퍼지면 세상은 온통 솔잎향기가 퍼져 나간다. 땅에도 깔아주고 세상에도 뿌려주고 하늘로 오른다. 울림의 소리가 클수록 향기는 진하고 은은한 여운이 오랫동안 멈추지 않는다. 한여름 긴 낮에 달구어진 몸을 식히려 바람을 찾아 헤메다가 축느러진 어깨를 어쩌지 못하고 눈을 뜬채 살며시 잠이 든다. 그것도 잠시 비가 내리면 정신을 번쩍 차리고 울림의 소리에 집중한다.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강하게 불면 가슴아픈 사연들이 한꺼번에 솟구쳐 속이 후련하도록 큰소리로 한없이 운다. 어느덧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피어나면 일곱빛깔 희망의 울림을 아픈이의 가슴에 심어 놓는다. 울긋불긋 단풍이 산하를 덮으면 풍경도 달빛으로 꽃단장하고 화려한 오방색으로 뽐내는 처마와 사랑을 나누며 애정의 향기를 소리에 싣는다. 흰눈이 소리없이 내리는 날은 산사도 소리없이 밤을 지새고 풍경도 침묵으로 고뇌의 시간을 갖는 날이다. 하얗게 부서지는 지난날의 기억속에 흔들리며 상처받았던 시공의 어느시절 절절이 이어온 나를 회상한다. 아픈 흔들림이 있어 행복했다는 회상속에 아침을 맞는다.

 

 대애댕 대애댕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흔들리는 아픔을 맑은 영혼으로 되살려 깨달음을 얻으라고 본성에서 토해내는 울림을 들려준다. 그 울림이 나를 깨어나게 하고 주위도 깨어나게 한다. 그렇다. 우리는 삶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며 산다. 흔들림이 아픔이라고 상처라고 말하지 말라. 아픔은 늘 울림과 찾아와 소리를 내듯 깨달음을 준다. 이것이 인생에 성숙함을 더해주고 참사랑을 깨닫게 한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한번은 필요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흔들림이 작은데도 색이 바랜 소리를 내지는 않았는지, 큰 흔들림에 상처받고 인생을 다 잃은 것처럼 행동하진 않았는지 사색의 골목을 들여다 보자. 그리고 풍경처럼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어떤 향기로, 어떤 소리로 품어내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늘 흔들림에 감사하고 흔들릴 때마다 풍경 같이 좋은 소리로 또 좋은 모습으로 나도 주위도 본성의 깨달음을 얻어야 하지 않을는지. 

 

                                            노을빛 아리랑 / 김 학 명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10월 어느 날 정북동 토성에서 노을빛 아리랑이라는 공연이 열렸다.

소나무 몇 그루가 서있는 토성 언덕을 무대 삼아 휘황찬란한 조명은 배제하고 석양의 실경에서 펼쳐지는 실루엣 뮤지컬이다. 서산을 넘어가는 태양이 눈높이에서 마주치니 역광이 되어 사물이 검게 실루엣으로 보여 진다. 그러면 배우들의 몸동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윤곽으로 보여 분명하고도 세밀하게 내 안으로 다가온다.

공연의 내용은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 그리고 그 속에서 피여 나는 청춘 남녀의 사랑과 전쟁으로 구성됐다. 결혼을 하자마자 국토를 침략하는 적군을 맞아 장렬히 산화하는 영원한 이별을 다룬 숭고한 이야기를 절절히 표현한다. 가상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나의 아버지와 선조들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잔잔히 보여준다. 안타깝고 애절하고 가슴을 후벼 파듯 아프다.

해가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 길게 아쉬움의 그림자를 늘이고 노을이 붉음을 토해낸다. 하늘과 토성은 물론 주위의 벌판과 하천, 배우와 관객 모두가 황금빛으로 물이 든다. 아침빛이 희망이라면 노을빛은 그리움이 바탕이 된 감성의 빛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따스한 어머니의 품속 같다. 어느 조명이 이처럼 부드럽고 웅장하고 멋질 수 있을까. 어느 누가 배우뿐 아니라 관객과 주위 모두를 아름다운 조명으로 비추면서 황홀한 공연을 만들 수 있으랴.

언젠가 토성의 공연처럼 자연환경에서 펼쳐진 멋진 가무극을 본적이 있다. 중국 리장에서 인상여강(印象麗江)이라는 공연이었는데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장이머우 작품이라고 했다. 5천500여 미터의 높은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거대한 노천 무대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관람석에서 바라보니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파란하늘과 산 정상에 만년설의 하얀 눈, 암갈색 산허리와 진초록의 벌판 그리고 좁다랗고 먼 길을 재현한 붉은 무대가 조화를 이룬다. 배우는 500여명으로 현지 주민이며 그들의 전통의식과 차마고도에 대한 애환과 삶을 보여준다. 직업배우들이 아닌데도 연기가 일품이다. 공연 줄거리는 남자들이 운송과 장사를 하는 마방을 조직하여 차마고도를 왕래하며 차를 팔고 말을 사왔던 모습들이다. 그 과정에서 가파르고 험준한 산길과 시시각각 변하는 고산지대의 매서운 날씨와 위험하고도 혹독한 환경을 이겨낸 가슴 찡한 이야기다.

윈난성의 인상여강이나 정북동토성의 노을빛 아리랑은 줄거리가 삶의 대서사시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척박하고 가혹한 환경을 이겨내며 내 가정과 이웃을 위하여 삶을 내던지는 휴먼 드라마다. 어떤 지역, 어느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며 누구라도 이해되고 공감하는 우리들의 인생살이 이야기가 아니던가. 무대를 통해 바라본 그들의 삶이 한없이 존경스럽고 숭고하다. 자연의 경이로움 속에 살아가는 진솔한 인생사를 조명을 멀리하고 실경에서 예술로 바라보니 그 의미가 마음에 진하게 파고든다.

사람들은 누구나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삶을 원한다. 하지만 특별한 삶과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던 위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평범하게 살아간다.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또 하나하나를 보면 같지는 않은 삶을 이어간다. 인생이 꼭 특별하거나 남보다 돋보여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다른 것 없이 살더라도 나름의 철학으로 내 삶을 사랑하고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인생이라면 어떻게 바라볼까. 수없이 봐왔던 토성의 노을빛을 오늘도 바라보면서 문득 내 인생의 노을빛 아리랑을 생각해 본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시나리오에 따라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게 연극이라면 조명이 없고 시나리오가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어쩌면 연극이지 아닐까. 그러면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써서 보여줘야 할까. 오늘도 어제 같은 노을이 삶의 여정처럼 붉게 물들며 아리랑 고개를 쉬엄쉬엄 넘어가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 아리랑 고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