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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 장 미 숙

장대명화 2025. 9. 26. 09:24

                                                    빚 / 장 미 숙

 

그가 살짝 웃는 듯하다. 좀처럼 보지 못한 표정이라 반가움이 앞선다. 그런데 웃음 뒤에 숨은 차가운 눈빛을 보고 만다. 멈칫, 목까지 올라온 말이 들어가 버린다. 그는 날 향해 있으나 장벽 같은 게 가로 놓인 것 같다.

 

주위 사람들과 사물이 바뀌었지만 장소는 여전히 낯익다. 그는 매번 같은 곳에 앉아있거나 서 있다. 나는 갑작스럽게 그를 보기도 하고 존재를 의식하며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매번 그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누군가의 방해로 영상은 깨지고 환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일쑤다.

 

새벽에 눈을 뜨면 깊은 어둠 속, 잔상으로 얼마 동안은 꿈인가 생시인가 혼란스럽다. 그러다가 현실을 인지하면 또렷한 형상들은 사라지고 안개 속처럼 희미한 이미지만 남는다.

 

끈질긴 꿈이다. 그는 왜 내게서 떠나지 않는가. 아니 내가 그를 꿈속으로 부르는 것일까.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사람의 꿈을 계속 꾼다는 건 감각 너머의 일이다. 의식과 관련 없는 무의식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늙지 않은 모습으로 꿈속에 등장한다.

 

과거의 사람이고 끝난 인연이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혹여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 그것조차 모른다. 그에 관한 정보는 아는 것 이상에서 더 추가되지 않았다. 대충 짐작하기로 나이는 여든 전후반일 것이니 생사를 가늠할 수도 없다.

 

인생은 예측 불가능하고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이 생의 길을 바꿔버리는 건 흔하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이십 대의 어느 한때 만난 사람이 꿈이란 형태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건 묘하다.

 

열일곱 살, 언니 손에 이끌려 처음 취직한 곳은 어느 산업체였다. 직원을 구한다는 공고문을 보고 찾아갔지만, 시골에서 갓 올라온 소녀에게 공장건물은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농촌의 풍경 외에 본 일이 없던 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장에는 남자와 여자 비율이 반반이었고 백 오십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한다고 했다.

 

건물은 디귿 자 모양으로 이 층에는 긴 복도가 전체 건물로 이어져 있었다. 꽤 넓은 마당과 정원, 식당을 갖춘 중소기업이었다. 와이셔츠 비닐 포장지와 단추 등이 주 제품인 공장은 여러 부서가 있었고 나는 가공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가공부는 제품을 생산하고 불량을 선별한 뒤 포장과 납품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넓은 작업장에는 커다란 기계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십여 명의 사람들 속에는 나와 같은 또래의 여직원이 대여섯 되었다. 그들은 일이 손에 익은 덕분인지 뭐든 능숙했다. 옆에는 인쇄부로 그곳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가공부와 인쇄부 중간에 현장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에는 과장과 계장, 그리고 여사무원이 근무했다.

 

일하고 돈을 벌 수 있어서 좋았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작업환경은 한없이 열악했지만 견딜만했다. 하루 열 시간 이상의 중노동이 이어지고 야근을 밥 먹듯 해도 힘든 줄 몰랐다.

 

육체노동의 피로가 가슴을 누르기 시작한 건 현장사무실에 대한 로망이 싹트면서부터였다. 로망에 바람을 넣은 사람이 그였다. 그는 당시 과장이었고 여러 부서를 관리했다. 내게는 하늘처럼 높게 느껴지던 직책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내 글씨를 주목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때 가슴에 작은 싹 하나가 움을 틔웠다. 그는 내게 현장관리를 맡겼고 희망은 구체적으로 변했다. 추위와 더위 속에 노출된 현장이 아닌, 사무실의 아늑함을 선호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부서를 위해 일했다. 당시 활발하던 분임조 대회 준비를 위해 종일 바닥에 엎드린 채 차트에 그래프를 그리고 글씨를 썼다. 마침 사무실 여직원이 결혼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싹은 조금씩 자라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른 부서의 관리자가 계장이라는 직책으로 우리 부서에 투입되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고 사무실에는 자리하나가 더 늘어났다. 그때부터 과장과 계장 사이에 묘한 기류가 생성되었다. 과장은 무능력자로, 계장은 능력자로 흘러가는 분위기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새로 온 계장은 내게 많은 일을 시켰다. 나는 서서히 계장 쪽으로 기울어졌다. 꿈이 그쪽에 있을 것만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주위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믿었고 머잖아 과장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고 말했다. 과장은 외톨이처럼 보였고 큰 키가 작아 보이기까지 했다. 계장은 점점 내게 구체적인 미래를 이야기했다. 사무실 근무는 거의 확정된 듯 장담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사무실로 들어간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더 큰 충격은 계장이 다른 부서로 가버린 것이었다. 나는 끈 떨어진 조롱박이 되었다. 학력 때문에 사무실 직원으로 뽑힐 기회마저 없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팔 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리숙한 산골 소녀가 이십 대를 온전히 바친 직장은 한낱 물거품 같은 것이었다.

 

결혼 후 친구로부터 계장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회사의 시나리오에 희생된 건 계장과 나인지도 몰랐다. 그는 부장으로 승진했고 여전하다고 했다. 나는 경쟁이 치열한 세상을 읽지 못한 패배자였다.

 

그걸 인정하면서 훌훌 털어버렸는데 단지 그에 대한 미안함만은 남았다. 그는 나의 보잘것없는 능력을 인정해 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루지 못한 꿈이나마 꾸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비록 내가 트이지 못해 착각 속에 빠졌을지라도 바닥의 삶에서 고개를 쳐들게 해주었다. 그로 인해 붓글씨를 배웠고 세상의 이면도 접했다. 무지를 털어버리고자 무던히도 애쓰게 된 것도 그의 영향력이 컸다.

 

한때 꿈이었던 사무실의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미끄러운 곳을 겁도 없이 오르고자 했던 용기, 혹은 무모함, 그는 내게 약이었을까 독이었을까. 정확히 정의할 수 없다. 빚으로 남아 그때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 중 하나가 되었다. 덕분인지 과거가 가끔 중요하게 인식된다. 어쩌면 이렇게 나는 그에게 진 빚을 갚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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