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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팔지 않는 약사 / 김 소 경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5. 4. 2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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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을 팔지 않는 약사 / 김 소 경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 약국 하나가 있다. 몇 년 사이에 주인이 세 번쯤 바뀌었는데, 이번에 간판을 건 사람은 꽤 오래 하고 있다. 어쩐 일인지 먼저와는 달리, 약국 안 의자에는 동네 사람들이 늘 모여 앉아 있곤 한다. 지나다 보면,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수더분한 인상의 여주인이 안노인들과 환담하는 모습이 보인다. 약국 규모도 점차 늘어가는 듯했다.

 

그 자리에 처음 약국 간판을 낸 사람은 중년의 여 약사였다. 혼자 산다는 그녀는 느지막하게 약국 문을 열고 저녁엔 일찍 닫곤 했다. 입고 있는 가운은 솔기가 너저분해 보였다. 가끔 들러보면 약장 안은 제대로 정돈되어 있지 않아서 어수선했다. 지나는 말로 이사 갈 생각이냐고 하면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어수선하던 약국은 문을 닫았다.

 

오래 가지 않아 새로운 이름을 걸고 약국 문이 다시 열렸다. 주인은 대학을 갓 졸업한 듯싶은 자매였다. 약국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그들은 흰 가운을 단정하게 입었으며 안에는 종일 고전 음악이 흘렀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약국 문은 다시 내려졌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선뜻 발을 들여놓기에 주춤거려지는 분위기였던 모양이다.

 

닫혀진 약국의 간판 한쪽이 처진 채 한 계절이 지났다. 어느 봄날, 약국 간판이 반듯하게 다시 걸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안으로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것 같았다. 약국 안의 긴 의자는 비어 있는 날이 없었다.

 

그 약국 여주인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은 시내에서부터 두통이 와, 집으로 오는 길에 그 약국에 들렀다. 반갑게 맞아주는 그녀에게 두통약을 달라고 했더니, 좀 쉬면 괜찮을 거라면서 찬 보리차를 꺼내 한 컵 따라준다. 그러면서 되도록이면 약은 먹지 말라고 한다. 생각지 않은 그 처방에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위 속에서 한 줄기 소나기를 만난 듯 심신이 상쾌한 느낌이었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그녀와 허물없는 이웃이 되었다.

 

약국 앞을 지날 때마다 유리문 안으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약만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궂은 일 기쁜 일들을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문 상담역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웃의 일을 내 일인 듯 마음을 열고 들어주는 것이다.

 

약을 팔려고 애쓰지 않는 약사, 그녀는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병을 낫게 한다. 그래서 그 약국은 날로 번창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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