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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향(蘭香)의 향연 / 김 규 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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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대명화 2025. 4. 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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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향(蘭香)의 향연 / 김 규 련

 

난초가 몸을 풀었다. 산고를 견디며 대공을 밀어올리기 나흘, 마침내 순백의 영롱한 꽃을 피웠다. 철골소심, 너는 가늘고 긴 잎새를 쭉쭉 뻗어내어 그 맵시가 청초하고 날렵하다. 튼실하고 짙은 광택이 빛나서 철골 같은 굳센 느낌을 준다. 꽃 색은 백설 같은데 그 향기 깊고 그윽해서 소심이란 이름을 얻었나 보다.

 

모든 식물은 흙에 뿌리를 내린다. 허나 너는 모래, 그것도 깨끗한 모래톱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하지 않고 우로雨露를 받아 산다. 그것이 너의 본래 생리며 기품이다. 철골소심의 향기는 십 리에 퍼진다고 옛 선비들은 너를 두고 향문십리​香聞十里라 했던가. 너의 꽃떨기는 순수하고 깨끗한 우주의 정기에서 태어났다. 나는 기쁨으로 너를 맡기 위해 몸과 마음을 삼가 기다렸다. 너의 처소인 베란다며 나의 거실이며 침실도 정갈하게 손질해 뒀다. 부엌에서 잡냄새가 나지 않도록 마음을 쓴다. 내가 신앙하는 절대자에게 조석으로 바치는 인조향도 너의 은은하고 신비한 향기로 바꿨다. 아침저녁 수시로 확확 풍기는 너의 향기는 내 서실에 가득 스며들어 문심文心과 文情으로 흘러내린다.

 

너의 두 대공에 달린 꽃망울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피었다가 마침내 날개 돋친 흰 나비가 되어 은하로 날아오른다. 잔해는 바닥에 남겨두고 무두가 하늘을 승천하는 보름 동안 나는 난향의 향연을 즐기려 한다.

 

창밖에는 유월의 산과 들이 짙은 녹음으로 창해를 방불케 하고 있다. 망초꽃, 제비꽃, 참나리꽃 등, 여름 꽃들이 손짓해도 문밖 출입을 삼가고 진종일 너와 마주 앉아 있다. 사무치게 그리던 정인을 만난 듯, 바라만 봐도 내 영혼이 맑아지는 이 법열을 어찌하랴.

 

사위가 어둠에 묻혔다. 새벽이 다가오도록 잠이 오질 않는다. 막설차를 달여 한 모금 입안에 깔아본다. 오늘 밤은 나를 괴롭히는 불면증이 되려 축복이라 할까. 은근한 난향, 창에 부딪혀 쏟아지는 달빛, 천연한 대금 소리, 적멸이 흐르는 고요, 부질없이 쌓였던 생의 허무며 무상이며 한이 녹고 삭고 씻겨 내린다. 텅 빈 가슴으로 느껴보는 이 충만감. 철골소심, 너의 공덕이 크다고 하리라.

 

너와 내가 한 몸이 되어 동거할 동안 내 마음은 이따금 밖으로 뛰쳐나와 꿈과 환상의 세계를 유량해 봤다. 구름 따라 흘러가는 풍류객이 되어 산천 경계 유람하며 음유시인이 되어봄도 즐거웠다.

 

오늘은 우객羽客이 되어 명산대천을 탐방해 보려 한다. 우객은 옥황상제를 신봉하며 언젠가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귀천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 꿈이 아니던가. 신라의 천재, 우 불 선을 통달한 고운孤雲 최치원이 생각난다.

 

그는 신분의 벽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신선의 길을 택했다. 경남 하동 화개동에 마지막 시 한 수 남기고 지리산으로 자취를 감췄다.

 

전설 같은 우객은 흉내도 낼 수 없어 생각을 지워버리고 선객禪客의 길을 나서 본다. 무문관武門關 수행에 참여해 보려고 백담사 무금선원無今禪院을 기웃거린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찰나로 시간의 흐름이 멈춘 곳, 무금의 뜻이 깊어 마음이 끌린다. 좁은 독방에 몸을 가두고 외부와 단절한 채 화두 하나 들고 목숨 건 수행을 해야 한다. 하루 한 끼 공양과 묵언 정진-,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어 발길을 돌린다. 어쩌면 속인은 속인답게 사는 범부의 삶이 행복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남은 철골소심의 꽃 한 점이 뚝 떨어진다. 극락에 산다는 묘음조妙音鳥의 노래 같은 낙성落聲을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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