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액자 / 최 장 순
어떤 풍경이 가을 벽에 오롯이 걸려 있을까. 강변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조성되어 있는 '물의 정원'을 향한다. 호수이듯 늪이듯, 멀리 운길산이 한 아름 품고 있는 정원엔 올망졸망한 꽃들이 주변을 지키고, 나비와 벌과 온갖 풀벌레 소리를 불러들일 것이다. 나무 그늘 밑 벤치는 반가운 벗을 기다리듯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시선을 넓히면 흐릿한 낙타 등 같은 완만한 산이 제 얼굴을 말간 수면에 비춰보는 북한강, 보이지 않는 물갈퀴로 고요한 수면에 길을 내고 지나가는 물새들이 보인다. 조용하던 물살이 잠시 흔들렸다가 잠잠해진다.
물의 정원을 자주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곳엔 내가 좋아하는 액자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내 마음대로 액자.' 언제부턴가 나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정원 한편에 조성해 놓은 조형물. 사각의 테두리만 있을 뿐 액자 속 그림은 내 마음대로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 단을 놓고 그 위에 세운 액자이지만, 나는 허공이라는 벽에 어느 솜씨 좋은 손이 계절마다 바람이며 햇살의 대못을 박고, 풍경을 걸어놓았다는 상상을 한다. 어른이 양팔을 벌렸을 만큼의 가로 길이와 초동의 키만 한 세로높이의 액자, 그림은 계절과 시간과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가을볕이 좋은 오늘은 윤슬 빛나는 강이 그 속에 담겨있다. 검푸른 산이 물살에 떠밀리지 않겠다는 듯 강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이거야, 이것만.'이라며 고집하지 않는 액자. 무릎을 조금 구부리면 강물 위에 묵직한 산이 얹히고 좀 더 굽히면 높고 투명한 가을 하늘이 들어온다. 화룡점정, 빨간 잠자리가 액자 안으로 들어온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돌려도 명작이다. 영화감독이 마음먹기에 따라 카메라 앵글을 돌리 듯, 전경前景이 지루하다 싶으면 방향을 바꾸면 된다. 첩첩산중의 후경後景, 그 아랫마을 풍경을 담으면 지붕 위에 얹힌 늙은 호박에 마음이 넉넉해진다. 산 중턱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천년고찰 수종사에 앵글을 맞추면 쟁그렁 쟁그렁 풍경소리가 네모난 틀을 열고 들어온다. 열차가 강에 제 그림자를 떨구며 산허리에 밑줄을 주욱 긋는다. 액자 속으로 들어온 열차를 타고 어딘가로 무작정 떠나고 싶다. 마음이 가는 대로 얼마든지 풍경을 넣을 수 있는 액자는 오래도록 바라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자연, 이곳에서 나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오묘함과 신비로움을 즐긴다.
모든 것은 다 제자리가 있다. 하늘과 산과 땅, 억새와 갈대, 길과 다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들은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만큼의 간격으로 함께 존재한다. 그것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다는 듯 오래도록 묵묵히 그곳을 지키는 것들은 거부감이 없다. 잘난 체하거나 도드라진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볕을 받은 액자가 정원 한쪽에 또 다른 액자를 만들어놓는 오후 3시, 액자가 바닥에 내려놓은 제 분신은 마름모꼴, 시간마다 달라지는 '그림자 액자'다. 오전과 정오, 그리고 오후 내내 제 그림자의 모양을 바꾸거나 크기를 조절하는 저 액자 속으로 들어가 나도 풍경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운길산을 막 넘어가려는 긴 햇살이 장방형이 된 내 그림자, 이 순간만은 내가 주인공이다. 그림자는 실제의 나보다 훨씬 커졌다. 어린 시절 등잔불 주위에 모여 앉으면 벽에 복사된 그림자는 마술처럼 크기가 달라졌다. 표정은 지워졌지만, 낄낄거리는 소리만으로도 그림자의 기분을 헤아릴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모아 까르르 웃음을 짓곤 했다. 오늘은 저 혼자인 그림자가 외롭다. 누가 곁에 있기라도 한다면... 아쉬운 마음에 마음속 한 사람을 그 안에 세운다. 포개어 둘이 하나가 되고 떨어져 다시 둘이 되는 그림자. 어스름도 지나고 나면 액자는 어둠만 가득 담고 있을 것이다. 그림자를 데리고 노는 동안 조금은 쓸쓸했던 생각도 어느덧 사라진다.
물의 정원을 서성거리면 하루에도 몇 번씩 거쳐 가는 마음의 파동도, 울컥 솟아오르던 모난 감정도 고요한 강물처럼 차분히 가라앉는다. 시끌벅적한 세상을 벗어난 시간, 복잡하고 피곤했던 생각들을 말끔히 비워낸다. 공중을 맴도는 물잠자리처럼. 퍼드득 날고 있는 한 무리의 작은 새처럼, 정원의 일부가 된 내가 한껏 가볍다.
그러고 보니, 정원이 품고 있는 늪도 그림자 액자다.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물살로 흐려놓은 수채水彩.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풍경이다. 나는 방향을 틀어 액자에 강을 담아본다. 강물에 이끌려온 풍경들이 화폭 가득 들어앉는다. 그때, 일렬로 꼬리를 문 자전거 행렬이 지나가고, 가볍게 마음으로 밟아보는 페달, 풍경이 흔들리는 액자 속, 거꾸로 강을 달리는 자전거 실루엣이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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