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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알의 수를 기억해야 하는가 / 권 남 희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4. 12. 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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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 알의 수를 기억해야 하는가 / 권 남 희

 

 포도 한 송이를 놓고 들여다보다가 포도알이 몇 개나 달려있는지 세어 본다. '몇 개 달려 있는지 세어본다는 것도 쓸데없는 일인데 바로 잊어버릴 숫자이지 않은가. 왜 이러지?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되려나…' 그런 생각으로 숫자 세기를 포기한 채 포도를 먹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불면증을 앓으며 끊임없이 전 인생을 기억하는 일에 몰입하다 죽은 열아홉 살의 이레네오 푸네스를 묘사했다.

푸네스는 포도나무에 달려있던 모든 잎들과 가지들과 포도 알들의 수를 기억하고, 모든 숲의 나무들 나뭇잎과 그 순간까지 기억한다. 1882년 4월 30일 새벽 남쪽 하늘에 떠 있던 구름들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다. 라틴어도 몰랐던 푸네스는 라틴어 사전을 읽고 대화가 아닌 어떤 단락을 통째로 암송한다. 하루 전체를 복원하는 작업으로 하루를 보내느라 그는 잠들지 못한다. 다른 각도에서 거울을 볼 때마다 달라지는 자신의 얼굴을 이해하지 못해 화들짝 놀라는 푸네스의 세계는 풍요롭지만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만 있을 뿐이어서 플라톤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나의 기억은 쓰레기 하치장과 같지요" 푸네스는 말했다.​

보르헤스는 푸네스를 등장시키면서 기억세포가 끝없이 증식되는 세상이 올 것을 내다본 것일까. 스마트폰의 무한 기억능력을 예견한 것처럼 '기억' 해내느라 '불면증'을 앓는 사람에 대한 글을 20세기 초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잠들지 않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닮은 스마트폰을 갖고 산다. 언제 어디서나 잠들지 않은 채 저장과 기억의 반복뿐인 기기에 매달린 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정보와 자료들이 수천수만 가지의 형태로 나타나는 기적에 놀라며 검색과 입력, 무한복제와 퍼나르기에 몰입한다.​

무슨 이유인지 대용량의 기억 기계 앞에 나의 기억력은 곧 불도저에 뭉크러지고 말 형편없는 모습이다. 이제 무엇이든 굳이 힘들여서 기억하고 생각해 낼 필요가 없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검색 기계에 원하는 식당, 가고 싶은 여행지, 궁금한 인물, 읽고 싶은 책에 관한 단어를 친다. 예전처럼 내 머릿속 뇌의 지도를 꺼내거나 수첩을 열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연구하면서 따져보지 않는다. 택시를 타도 기사는 자연스럽게 검색창에 갈 곳을 입력하고 어느 길로 가야 지름길인지 실시간으로 기계가 가르쳐 주는 대로 움직인다. 경험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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