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 / 김선화
피었다. 큰 품을 드리운 벚나무에 꽃이 만발했다. 고개를 젖혀 둘러보아도 벙글지 않은 송이가 없다. 둥실한 몸통을 찢고 나온 줄기에서도 벙싯 웃고, 아치형 너울의 가지에서도 망울들이 한껏 입을 열었다. 한데도 전혀 수선거리지 않고 우아한 품격이 느껴진다. 그 아래를 걷는 이들이 죄다 선계(仙界)의 그림이 된다. 나도 꽃잎을 이고 서성이며 그림 속에 묻혔다가 구경꾼이 되었다가 하는데, 불현듯 뜻을 이룬 사람의 흔흔한 모습이 연상된다. 그것이 묘하게도 팽이 치는 장면과 맞물린다.
팽이를 돌린다. 갸름한 끝점에 쇠구슬 박힌 나무팽이를 곧추세운다. 손가락 굵기의 채에 수술을 달아야 짝이 맞는데, 무턱대고 채찍질만 해대서는 팽이가 돌 리 만무하다. 몇 번 뒤뚱거리다가 나자빠지기 일쑤다. 우선 손에 기를 몰아 바닥에 세워야 하는데 이 과정이 녹록치 않다. 글 쓰는 사람이 온 정신을 가다듬어 서두를 시작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팽이가 막상 돌기 시작하면 몸뚱이를 채찍으로 돌려 쳐야 한다. 섣불리 힘만 써서는 실패하기 십상이고, 강약의 세기를 조절하며 밑동과 몸통에 고루 반주를 넣어야 탄력을 받는다. 문장의 호흡조절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작은 것을 돌리기 위해 채찍을 든 사람은 등짝이 후줄근해지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다. 온몸의 기가 팔에서 손목으로 내리 달린다. 그다음 영육 간 최대의 기운이 팽이에 전이된다. 상념의 뜰에 투영되는 물상들이 걸러져 손끝을 통해 원고지에 가닿는 이치이다. 이러한 조율이 적절했을 때, 고맙게도 팽이는 빙글빙글 원을 그린다. 구상에서 구성으로, 구성에서 문장으로, 그리고 문장을 통한 의미들이 시나브로 글을 끌고 갈 때이다.
이 맛이 쏠쏠하여 팽이 윗면의 나이테를 따라 색을 입히기도 한다. 그리고 나면 세상이 돈다. 둥그렇게 노랑, 빨강, 파랑…. 그 어우러짐이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로 다가온다. 무(無)에서 유(有)를 찾아 형상화 시키는 작가도 이때는 비로소 자기가 그려낸 생의 무늬를 확인하게 된다. 미온 상태였다가 점차 강렬하게, 그러다가 서늘하게…. 의미의 공간들이 축을 중심으로 자리를 확보한다. 그 언저리엔 아무리 미미한 샛가지들이라 해도 얼씬할 틈이 없다.
팽이의 회전에 가속도가 붙으면 채찍을 쥔 팔의 노동은 한결 줄어든다. 손목의 힘만으로도 가능하다. 쉬엄쉬엄 밑동을 건드려준다. 돌고 있는 것이 그 톤을 유지하게끔. 채찍이란 보조 장치가 있다는 정도만 알리면 된다. 그럼 그 깜찍한 것은 끄덕끄덕하며 맴돌다가 정정에 이른다. 도는 듯 제자리에서 반경 이동을 하지 않는다. 알록달록한 색상들도 경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채를 든 사람은 물론이고 구경꾼들조차 무아지경에 도달한다. 정점이다. 이를 두고 “동 섰다~!”고 너나없이 환호한다. 팽이치기에서 더 이상이 있을 수 없는 클라이맥스다. 채찍은 이미 무용지물이다.
나는 이제껏, 작가란 모름지기 그만쯤에서 정신적 자리에서 노니는 사람으로 보는 데 변함이 없다. 펜을 쥔 사람이 섬세한 정신운동에 의해 새로운 의미와 만날 때 진정으로 글 쓰는 맛을 누리게 된다. 다양한 색상이 입혀진 팽이가 정점을 향해 나아가며 혼합색의 조화를 이루듯, 만 가지 생각이 응집되어 커다란 의미 하나를 이루어내는 동안 고조된 기운이 한데로 몰리지 않는다. 이 기점을 흔히 신들렸다고들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추구하는 어떤 일에 있어 그만큼 열과 성을 다한 후라야 전자에서 맛보는 절정에 도달하리라. 그때까지 얼마나 거친 숨결을 가다듬어야 하겠는가. 생에 어느 과정인들 소중하지 않을까마는, 기쁨의 극점은 누구에게나 존중돼야 할 귀한 자리이다. 인생 전반을 돌아보아도 그러한 날들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한없이 박수 쳐줘도 넘치지 않는다. 그래서 무(舞)의 경지에서 정점의 환희에 에워싸인 사람의 아름다운 미소 곁에서 경건해진다. 도는 듯 멈춘 듯 덩달아 호응하며 묵시(黙視)의 결을 읽는 것이다
바람 스치는 소리 / 김선화
체험이다. 가슴 속 대청마루에 새로운 바람 지나게 할 공간은 인생 도처에 널려있다. 난 지금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서대전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유성의 한 세미나장에서 우리가 수필을 왜 쓰는지 따져보는 시간이 있다고 한 까닭이다.
차표를 미리 끊어놓을 새도 없이 분주한 일정을 대충 갈무리하고, 토요일 오후 기우는 시각에 불같이 일어섰다. 이건 순전히 ‘불현듯’이란 기운 탓이었다. 앓아누웠다가도 내 안에서 솟구치는 어떤 소리를 만날 때는 지체 없이 움직여야 하는 게 상책인데, 그것은 거의 직관에서 오는 기운이다. 이 기운이 도진 이상 이것저것 재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럴 바엔 솔직한 내면의 소리에 따르는 방법이 그간의 경험으로 불 때 가장 현명하다.
더듬더듬 자동 예매 창구에서 표를 구하고 열차 칸과 칸 사이에 몸을 의탁했다. 철거덕거리는 쇠 이은선 위에 곱게 차려입은 내가 앉아있다. 길을 나서긴 잘한 것 같은데 아무리 돌아봐도 지금 처한 자리와 의상이 어울리질 않는다. 청바지에 무색 상의를 입고 아무 데나 철퍼덕 앉을 준비를 했어야 옳았다. 셔츠에 조끼를 입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따른다.
여느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해봤을 일이다. 언제인가처럼 선한 눈빛의 승무원이 내 높은 힐을 대우하여, 빈자리가 나면 잠깐씩이라도 앉아가라고 따스한 눈빛을 얹어 권유할 줄 알았다. 아니, 그러기 전에 승무원을 만나면 내가 먼저 특석이라도 구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승무원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자유석인데도 지정호 차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잘 지키려고 나는 열차 세 칸을 오갔다. 그러다가 연세 지긋한 아주머니 서넛이 객차와 객차 사이에 신문을 깔고 앉아 있는 옆을 지나게 되었다. 편해 보였다. 앞으로 한 시간 반을 고스란히 서서 갈 자신이 없었다. 이젠 내가 처할 자리를 아는 게 급선무다. 그들 틈에 끼자니 내 차림새로 따돌림 당할 게 뻔하다. 굳이 말을 섞고 갈 일도 아니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무릎을 맞댈 터인데 어찌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겠는가.
하여 지정호 차를 뒤로하고 한 칸을 더 건너갔다. 대학생인 듯 보이는 두 청년이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 있다. 한 청년은 출입 계단에서, 다른 청년은 짐을 얹어두는 용도인 듯한 알루미늄 층에 각각 가방을 깔고 앉아 여유롭다. 그쯤에 멈춰 선 채 객차 안을 보니 뒤쪽 구석진 자리까지 아이들이 들어차 있다. 이젠 다른 방도가 없다.
누구 곁에 앉느냐가 관건이다. 다리가 편하기로는 출입 계단에 걸터앉는 것이 나을 것 같고, 등이 편하려면 나도 귀퉁이를 택하는 것이 수월할 판이다.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간격이었다. 내가 어디에 앉아야 상대방이 덜 불편할지를 재는 것이다. 허벅지와 허벅지의 외벽(外壁)이 다소 가까운 곳에 나란히 앉는 것보다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내가 차라리 다리를 접고 앉는 게 나을 성싶어 마음을 굳힌다.
이날따라 핸드백 안엔 널따란 보자기 한 개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나도 남들처럼 신문을 구해야 했다. 마침 알루미늄 층의 청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꼭 내 작은아들 또래이다. 나도 좀 앉으려 한다니까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신문을 얼른 내민다. 그것으로 되었다. 양탄자라도 얻은 듯 흡족했다. 귀퉁이에 얌전히 신문을 깔고 7센티미터 놀이의 힐을 벗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나무들과 하늘의 솜구름을 만난다. 가끔 열차가 쉬고, 또각또각 긴 다리가 지나간다. 더러 자리가 비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예 이곳에 자리를 굳혔다. 자리가 낫다고 냉큼 들어가 앉는 것도 여간한 용기로는 어려운 일이다. 진작 승무원을 만났더라면 자리를 구할 수 있는지 점잖게 물었겠지만, 차가 두 번이나 쉬어 가는데도 유니폼 갖춰 입은 사람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번만 더 서면 서대전이다.
자리가 불편하다는 말은 아니다. 레일에 닿아 덜덜거리는 금속음이 때론 거칠어, 조금은 안정된 곳에 앉아 감상에 젖어보고 싶은 작은 욕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여행하는 맛도 비교적 괜찮았다. 오히려 내면에서는 현재의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다만 의상 때문에 남들 눈에 쉽게 띄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통로엔 청년들 둘 외엔 나뿐이라는 거다. 수다스런 아주머니들도, 껌을 짝짝 씹거나 거울을 자주 보는 아가씨들도, 은밀한 눈길을 주고받는 남녀 커플도 없다는 점이다. 서로가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신문을 읽거나, 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사념에 잠기면 그만이다. 그래도 발목까지 닿는 폭 넓은 치마를 입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오감에다 오장육부까지 흔들흔들 깨어나 요동치는 열차 안에서 마흔아홉 된 여자 한 병, 9월 하순 3시 35분에서 5시 1분 사이를 그렇게 건넌다.
목적지를 3분 남겨놓은 시각에 그가 왔다. 훤칠하니 외모 깔끔한 남자 승무원이 내 앞에 서서 예의 바르게 경례를 한다. 나는 야속함을 감추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다음 역 안내방송 소리가 들린다.
흔적을 지우며 일어서는데 접었던 오금이 아프다. 또 내재된 울림통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나는 게다. 시도 때도 없는 안팎의 교감. 잠재된 의식의 층이 깨어나는 소리. 이처럼 여여(如如)한 것들이 나로 하여금 수필의 뜰에서 거닐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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