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리네, 그 순환의 동사들/경북신문 이야기보따리 은상 수상작/이승애
경북 문경시 산북면 우곡리(읍실마을)에 어엿하게 앉은 돌리네습지가 내내 궁금했다. 마침 우리나라에서 25번째로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 떠들썩해지자 진득하게 기다릴 수 없었다. 봄이 한껏 깃발을 올리자 한달음에 내달렸다.
고즈넉한 산자락을 구불구불 돌아가는 돌림길, 연보랏빛 꽃을 조롱조롱 매단 으름덩굴 터널이 문을 활짝 열어 환영 인사를 한다. 풋풋한 산자락에 옹기종기 깃든 푸른 생명의 나직나직한 숨결을 들으며 자박자박 걷는다. 연둣빛 언어가 부드럽게 스며든다. 도심을 떠도느라 거칠어졌던 몸과 마음이 금세 순해진다.
도실재 고개를 넘으니 야트막한 자드락길 언덕에 전망대가 우뚝하다. 나선형 계단을 타고 전망대에 오른다. 크고 작은 산을 겹겹이 감싸 안은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굴봉산 정수리에 비밀스럽게 내려앉은 웅덩이가 나른하게 누워 뭇 생명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토실토실 젖살이 오른 풀과 나무들이 보란 듯 각자의 이름표를 달고 앞다퉈 번져 간다.
습지로 가는 길, 언덕 아래에 수억 년이 되었을 석화목(Petrified wood)이 길게 누웠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을 석화목을 가만히 만져본다. 켜켜이 쌓인 섬유질에서 자연의 순환이 시작된다. 다른 생명체를 키우는 거점이 되고 그 속에서 자란 생명체들은 또 다른 생명의 거점이 되겠지. 이 순환의 고리를 이룬 앳된 생명이 눈을 떠 바야흐로 봄 잔치를 벌인다.
돌리네습지는 고생대, 중생대에는 바다였다. 지각변동으로 산이 되었고, 바다에 살던 조개와 산호, 동물 뼈들이 모여 석회암지대를 이루었다. 오랫동안 빗물과 지하수가 스며들면서 산이 푹 꺼져 내려앉아 우묵한 접시 모양이 되었다. 그 바닥에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의 찌꺼기가 구멍을 막아 물이 고이게 되어 습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질학적 특성 덕택에 아름다운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다.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다.
이곳 토양은 오랜 세월 쌓인 퇴적물과 다양한 유기물과 미네랄이 녹아 만들어져 매우 비옥하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읍실마을 사람들은 이 풍요의 땅에서 지금까지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환경부는 이곳이 지닌 가치와 의미가 매우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해 2017년 국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더욱 기쁜 일은 올 2월 국제 협약인 람사르협약 사무국으로부터 인정받아 우리나라에서 25번째로 람사르습지로 지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돌리네 습지는 다양한 물고기와 들통발, 꼬리진달래, 낙지다리, 쥐방울덩굴 같은 희귀식물을 포함해 900여 종의 식물이 산다. 400여 종이 넘는 조류와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가 어우렁더우렁 함께 살아간다. 수달과 담비, 삵, 하늘다람쥐, 팔색조, 붉은배새매, 구렁이, 물방개도 여기서는 빼놓을 수 없는 식구다.
돌리네 습지는 지금 한창 공연 중이다. 여기저기서 팡파레가 울리고 잠들었던 숱한 생명이 깃발을 높이 들고 기상을 알린다. 그 사이로 차진 햇살이 양기를 보탠다. 어디선가 나타난 두꺼비가 느린 걸음으로 영역을 표시한다. 검은 모기떼가 파수꾼인 양 창을 곤두세우고 낯선 방문객 주변을 돌며 경계에 든다. 어미 개구리들의 힘찬 합창이 습지에 울려퍼진다. 물가에 다글다글 모여 헤엄치던 올챙이들이 어미들의 울음소리에 꼬물꼬물 땅 위로 올라올 기세다.
물가에 빼곡하게 발 뻗은 버드나무가 씨앗을 바람에 흩날린다. 하얀 솜털 씨앗들이 날아가다가 여기저기에 내려앉는다. 뽕나무도 질세라 연둣빛 오디를 다닥다닥 달고 손을 흔들어 댄다. 꽃 잔치로 부산했던 산수유, 생강나무, 왕벚나무, 조팝나무, 개복숭아 나무는 숨 고르기에 들었는지 고요하다. 습지 주변 곳곳에는 돌미나리, 흰민들레, 제비꽃, 양지꽃, 미나리아재비, 꽃마리, 붓꽃들이 한살이로 쏙살 댄다.
동물도 몸짓을 보탠다. 웅덩이 속은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군무하고, 그 위로는 꼬리명주나비, 흰나비, 산네발나비가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 수를 놓는다. 물가를 떠돌던 검은물잠자리도 흥이 동했는지 뱅그르 물가 위로 날아오르며 춤사위를 벌인다. 이에 구색을 갖추듯 곤줄박이가 쓰쓰, 삥, 쓰쓰, 삥 쓰쓰, 삐이, 삐이, 삐이 지저귀고, 박새가 삐 쯔 삐 쯔쯔삐 쯔쯔삐 화답한다.
아직 잠에서 덜 깼을까. 사초와 물억새 군락지가 휑하다. 봄이 여름과 배턴터치를 할 때쯤이면 이들도 힘차게 일어나 까락골, 여뀌, 가래, 나도겨풀, 며느리배꼽, 주름조개풀과 어깨동무하며 습지를 푸르게 뒤덮으리라. 그러면 개구리와 두꺼비, 뱀, 도롱뇽, 딱정벌레, 잠자리, 메뚜기, 사마귀도 활개를 치며 습지를 차지하겠지.
때마침 콩콩 뛰어오던 물까치가 날아오르더니 웅덩이에서 자맥질한다. 물고기나 새우를 낚아챈 것일까, 날아오르는 새의 부리에서 무언가 떨어진다. 물고기가 와글와글 몰려든다. 상위 포식자는 하위 생물을 먹고 하위 생물은 또 다른 생물을 먹는다. 나 또한 생이 끝나면 저들처럼 수많은 생명체의 먹이가 되고 그 생명체는 또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리라. 이 끝없는 고리는 지구를 유지하는 순환이 된다.
습지의 풍경은 소박하지만, 어느 곳보다도 탄생과 소멸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식물은 토양 속 영양분을 섭취하고 생이 끝나면 흙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의 양분이 된다. 야생동물들은 종자를 발아하고 산포하여 물질을 순환시키면서 다양한 생명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저 순환의 동사들이 멈춘다면? 내 삶의 몸짓도 오래지 않아 멎을 것이다.
생명체는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아주 작은 미물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균류까지도 공생하고 순환한다. 그러나 가장 상위에 있는 인간은 자기들의 편익을 위해 무분별한 개발과 남용으로 자연을 훼손한다. 그것도 모자라 순환의 질서까지 흐트러뜨린다. 호랑이, 반달곰, 늑대 같은 상위 포식자들이 사라지면서 먹이사슬이 깨진다. 그것이 돌고 돌아 인간의 생존까지 위협한다.
습지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길, 언덕마다 흔전만전 뻗어나가던 쑥이며 쇠뜨기, 원추리, 고사리, 취나물, 머위, 강아지풀, 쉽싸리, 환삼덩굴… 이 청랑하다. 평소 잡초라고 푸대접하고 함부로 짓밟았는데, 여기서는 말소리조차 조심스럽다. 혹여 풀 한 포기라도 발에 밟힐까, 사분사분 발소리를 낮추며 걷는다.
이 싱그러운 봄날, 너도나도 습지의 젖줄에 매달려 배를 불린다. 배가 불룩해진 습지 가족들이 서로서로 손잡고 탄소 저장고를 만든다. 점점 시들어가는 지구를 위해 그들의 콩팥이 힘차게 움직인다. 저 순환의 동사들을 보면서 나도 겨우내 잃었던 활기를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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