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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모음 5편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4. 2. 10.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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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미림 - 제11회 등대문학상 최우수상

 

 ‘뒷개’는 외갓집 마을의 펄이다. 마을 뒤쪽을 꿰찬 이 뒷개는 올망졸망 이마를 맞댄 산과 산을 나무울타리 삼아 빙 둘러쳤다. 산골짝처럼 깊숙한 이 뒷개에 썰물이 지면, 밀물 속에 잠겼던 펄이 건너편 갯바위까지 쭉 기지개를 켠다. 그 가장자리를 에돌아 싹튼 파래며 이름 모르는 해초에도 파르라니 생기가 돈다. 펄 사이로 난 갯골은 앞바다로 빠져나간 썰물의 뒤꽁무닌 양 나직한 곳을 따라 굽이돈다. 젠 걸음 같은 잔물결이 수르르 갯골에 인다.

펄은 육지의 퇴적물질과 바다의 부유물질이 뒤섞인 곳이다. 하루에 두 번 밀물이 들락날락 하는 바다의 영역이라 썰물 때도 옴폭한 웅덩이마다 짠물이 고인다.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햇볕을 쬐고, 한밤중 교교한 달빛에 얼비쳐도 막 밀물이 빠진 것과 진배없이 질퍽하다. 그렇듯 옴폭한 웅덩이의 짠물, 햇볕과 달빛으로 육지의 퇴적물질과 바다의 부유물질을 염장하고 발효시킨다. 부글부글 괸 진회색은 펄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빛깔이다. 한 발 디디면 무릎까지 쑤욱 빨려 들어가 바닥에 착 달라붙고, 그 발을 빼내려면 뒤뚱뒤뚱 다리를 치대야 할 만큼 차진 힘을 함유하고 있다. 펄은 바다의 장독이다.

가리맛, 낙지, 피조개, 쏙, 참꼬막, 비단짱뚱어, 흰발농게 등 펄은 다양한 생명을 품고 키운다. 이 생명들은 밀물과 썰물의 부침에 맞장 뜨면서 먹이활동이 가능한 때를 숨죽여 기다린다. 조개류는 관자를 이용해 한 쌍의 껍데기를 열고 닫으며 밀물 속 유기물을 걸러 먹는다. 야행성인 낙지는 밤에 활동하며 밀물 속 게와 조개를 잡아먹는다. 반면에 비단짱뚱어와 흰발농게는 썰물이 돼야 꼬물꼬물 펄 구멍에서 기어 나와 부산을 떤다. 펄을 통째로 삼켜 유기물을 걸러먹고 나머지 펄은 경단처럼 둥글게 말아 다시 게워낸다.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교차하는 절반의 삶터, 펄의 생존법은 곧 물때를 맞추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간 나는 언니와 동생, 또래 외사촌들과 어울려 뒷개에 나가 놀았다. 펄 가운데 솟은 모래 등에 올라 썰물이 남긴 물결무늬를 밟으며 맨발로 마구 달음박질 쳤다. 발뒤꿈치에서 모래알들이 퉁퉁 튕겨 올라 장딴지를 때렸다. 그 뜀박질이 지치면 털썩 모래 등에 퍼질고 앉아 백합조개를 캤다. 손바닥을 모래 위에 대고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은 다음, 손등에 모래를 퍼 올려 다독다독 두꺼비집도 지었다. 그 집 속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펄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칠게 흉내를 냈다. 야, 하고 칠게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칠게가 순식간에 펄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조금 후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칠게를 향해 연거푸 야, 하며 친한 척 성가시게 굴었다. 노는 내내 갯바람을 마시고 갯냄새를 홀짝거리며 짭조름해졌다.

나는 바다하면 항상 펄이 떠오른다. 설 추석 휴가 때나 연말이면 한나절 짬을 내 들르는 곳도 순천만 갈대숲이다. 자연생태공원이 생기기 이전엔 논과 펄의 경계인 흙둑에 올라서면 바로 무성한 갈대숲이 펼쳐졌고, 지금은 나무 덱 탐방로를 따라 갈대숲을 산책 할 수도 있다. 찾는 시기 때문인지 몰라도 갈대는 늘 선물처럼 반갑고 설렌다. 갯바람과 동고동락 하는 갈대도 잎과 줄기를 사르륵사르륵 흔들고, 자갈색 갈꽃을 피우고, 시나브로 솜털 단 씨앗을 진눈깨비처럼 흩날린다. 갯가를 따라 무리를 지어 서로 모나지 않고 수수한 생김새가 조화로운 멋을 더한다. 밀물 속에 서 있을 때도 뿌리 쪽 줄기만 잠겨 꿋꿋하게 잎들을 서걱댄다. 밀물과 썰물을 모두 품은 바다의 숲, 갈대는 전혀 딴판인 망망대해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올랐을 때다. 야간산행을 한 덕분에 희붐한 새벽녘 평야처럼 드넓은 펄과 조우하는 뜻밖의 행운을 누렸다. 펄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건 처음이었다. 그 펄은 낮은 곳에서 바라보던 편편한 모습과는 달리 요동치듯 움푹움푹 꺼지고 또 솟구치며 첩첩 뻗어가는 퇴적암지대처럼 옹골찼다. 펄의 굴곡 사이사이에는 가는 물길이 촘촘히 연결되어 조금 넓은 곡선의 물길을 만들고, 또 그 물길들이 만나 절벽처럼 가파르게 깎인 갯골을 이루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 역동성은 펄 끝자락까지 거침없이 뻗어가 아스라이 가물거렸다.

사람도 펄의 생명이다. 펄이 삶터인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밀물과 썰물의 물때에 맞춰서 일상을 꾸린다. 썰물 때면 뻘배를 끌고 펄에 나가 참꼬막과 가리맛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는다. 펄 범벅이 된 분주한 일손도 밀물이 찰 시간이 되면 서둘러 펄을 빠져 나와야 한다. 나 또한 펄의 생명일 게다. 살아가면서 겪는 이직과 병고 등 삶의 밀물에 부대끼다 보면,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는 난감한 상황이 한두 번 뿐이겠는가. 통장잔고에 찍힌‘0원’을 쳐다보면서 입술을 꾹 깨문 적이 있다. 매사에 차지지 못한 난 마음마저 쪼들리는 삶의 물때를 맞추느라 늘 동분서주했다. 나를 쥐락펴락하는 삶의 밀물에 등 떠밀리고 허둥대며 눈칫밥이나 얻어먹기 일쑤였다.

조도(鳥島)다. 외갓집 마을은 그 이름이 말하듯 겨울철새들이 월동하는 보금자리였다. 초겨울 무렵 청둥오리와 쇠기러기 떼 등 겨울철새들은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뒷개로 날아왔다. 겨울방학 때 봤던 그 철새들은 종일 뒷개를 들쑤시며 해초를 뜯고 펄을 쪼며 먹이사냥을 했다. 혹시, 둑길 밑에 웅크려 매의 눈으로 훔쳐보는 내 호기심을 눈치 챘을까. 느닷없이, 서너 마리가 뒷개를 박차고 날아오르면 그 많은 철새들이 덩달아 떼 지어 날아올랐다. 나를 감시하듯 허공에 점점이 흩어졌다 모이고 또 흩어졌다가 모여들었다. 그 군무는 뒷개 하늘을 단숨에 펄 색깔로 물들였다. 이윽고, 내 호기심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을까. 철새들은 나지막이 허공을 두어 바퀴 더 돌면서 날개를 접고 사뿐히 뒷개에 내려앉았다.

비단 월동뿐이랴. 펄은 번식지에서 월동지로 이동하는 나그네새인 개꿩, 안락꼬리마도요가 휴식을 취하면서 기력을 회복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도 한다. 또한 텃새인 검은머리물떼새의 변함없는 서식지다. 정화능력이 뛰어난 펄의 생명들은 건강한 먹이사슬을 형성한다. 사철 텃새들을 먹이고, 나그네새와 철새들이 머물다 떠난 후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올 만큼 풍요롭다. 물론 철따라 날아오는 새들도 펄을 풍요롭게 퍼덕인다. 그 무리 속엔 천연기념물이며 세계적 희귀조인 흑두루미도 있지 않은가. 펄에 깃든 새들의 날갯짓은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그들이 날아오고 날아가는 먼 미지의 세상을 아득한 그리움으로 물들인다.

오며가며 들르는 남해의 바닷가였다. 한번은 썰물 때라 막 펄이 드러나는 참인데 그 물 빠짐이 매우 빨랐다. 펄로 내려서기도 전에, 맞은편 섬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초승달처럼 예쁜 포물선을 그리며 모래 등 마냥 도드라졌다. 그 길에 쪼그리고 앉아서 모래를 한 움큼 쥐고 만져보니 몽땅 패각이었다. 형체 없이 잘게 부서진 것, 아직 형태가 남아있는 소라 껍데기가 뒤섞인 채 햇빛과 물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패각은 들고나는 물살에 점점 더 잘게 부서질 터, 또 다른 생명을 품고 키우는 펄로 거듭나고 있었다.

뒷개는 툭 튀어나온 산봉우리에 가로막혀 앞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감쪽같이 산봉우리 뒤로 돌아앉아 앞바다를 잊은 듯 외톨이지만, 어릴 적 추억이 오롯한 내 가슴속 같은 곳이다. 나는 성장한 후 드넓은 세상을 품으려 뒷개를 떠났다가, 나이 들수록 소중해지는 어린 날을 찾아 말없이 돌아왔다. 여태 모래 등을 뛰어다니는 어린 나에게 내밀 성취의 꾸러미는 없다. 그것도 모르고 집게발에 묻은 펄을 조몰락조몰락 비벼대는 칠게가 반갑다. 빈손이나마 두 팔을 활짝 벌려 뒷개를 품어 본다. 모래 등이 최고였던 어린 날의 뒷개가 사실은 앞바다로 이어지는 드넓은 세상이었음을 비로소 안다. 이 뒷개에 아쉬움이 알알이 박힌 내 지난날을 부려놓고 포용과 순리의 물때를 맞춰 볼 참이다.

 

 

                             소풍길 / 오석영 - 제9회 정읍사문학상 우수상

 

 내가 기억하는 첫 소풍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줄을 서서 산에 올라간 일과 부석사란 절을 찾아 분주하게 돌아다녔던 일들이 생각난다. 점심시간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친구들 피해서 소나무 밑에서 혼자 먹었고. 비록 순 보리밥이지만 간장에 버무린 고춧잎 반찬이 꿀맛이다.

이젠 그 소풍도 멀리 가버린 채 또 다른 길 위에서 서성인다.

머리가 하얗도록 급격하게 변화를 보인 건, 얼마 전에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일어났다. 아내가 갑자기 거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순간이다. 그동안 온갖 병에 걸려 힘들어 했지만 오늘처럼 슬픔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린 적은 없다. 아내가 응급실에서 다시 수술실로 들어가 4시간을 넘기면서부터는 공포로 확 바뀌고 격한 마음이 심장을 뒤흔든다.

사람들은 나이 84세면 관을 등에 메고 다닐 나이라고들 한다. 그래서일까. 이젠 눈앞에 보이는 온갖 조각들이 바람에 채이듯 허공에 던져진 채, 나루터 마른갈대가 서걱거리며 바람에 부대기는 심정이고, 그런 것들이 시야에 잡히다가는 힘없이 멀어지기도 한다. 세상에서 죽음처럼 확실한 게 없는데 무얼 주저할거냐고. 이 순간도 아내에게 세월의 질곡이 얼룩진 채 웅장한 산 그림자가 어깨를 떠밀고 있지 않느냐고.

죽음의 카운트다운 앞에서 그동안 저지른 이율배반적인 행동과 모습들이 후회와 원망으로 물밀듯이 밀려온다. 눈속임으로 영혼의 고운 빛깔을 지니려고 천방지축 뛰어 다녔고, 함박눈 멈춘 뒤 푸른빛 둥근달 뜨기를 바란 허망한 꿈들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며칠 전 북한산 칼바위를 산행하면서, ‘산을 오르는 길은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다짐을 하고는 딴 짓을 했다. 내 능력껏 잘 걷다가도 누가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만 들리면 마음이 바쁘다. 피해의식 때문인지 빨리 가려고 온 힘을 다해 경쟁을 시작한다. 결국 앞선 채 정상에 도달할 때는 혼자서 웃지만, 비탈길에 넘어져 부상을 입을 때는 화를 내기도 했다.

정직한 모습을 유지한 채 욕심은 버리겠다고 선언을 한 자신이, 자빠지고 부상당하는 건 과거에 상처 입은 치우라고 변명만 할 건가? 차라리 고교시절이 더 솔직하고 순수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회 화해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창피한 일이지만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그때는 마음이 약해서 같은 반 학생에게 매를 맞기만 했고 싸움을 몰랐다. 잘못도 없이 무시당한 채 매 맞던 순간이 떠오르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단번에 내 귀에 꽂힌다. 눈이 뻘겋게 붓고 앞니가 나간 내 모습을 본 아버지는, 깡패 놈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길쭉한 강목을 들고 교문 앞을 지켰던 기억의 파편이 실루엣으로 다가와 파도에 쓸려가는 밤바다처럼 고요하게 흔들린다. 피안의 세계를 향해 출구가 보이는 그 길 위에서 보이는 퍼즐이다. 위선도 있었고 부끄러움을 숨기며 살아 온 삶이기에 창피하고 수치스럽다. 무늬 진 세월에서 빛나는 열매도 맺지 못했고, 윤기 난 녹색 잎을 촘촘히 만들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못했기에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삶의 마무리도 완전하지 못한 채 죽음도 자신만의 해석으로 변형된 모습만 보이는 것 같다.

이제 나를 흔드는 바람도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아 자녀들에게라도 말하고 싶다. 그동안 능력이 부족해서 잘 돌보지 못한 잘못에 대해서 먼저 용서를 구한다. 다만 살아온 경험을 되돌아보면 사람 사는 게 별것 아니고, 욕심보다는 마음 편안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그걸 어머니의 눈빛에서 본 것 같아 전하고 싶다. 어렸을 때 농촌에 살 때 내가 대문 밖을 나설 때마다 어머니는 ‘지금 어데 가느냐?’고 화사하게 웃으셨던 그 아련한 눈빛을 설명하고 싶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평소에 살던 시골집에서 목사의 손을 꼭 잡고 웃으시며 눈을 감았기에 그 모습도 빼놓을 수가 없다. 돌아가신 후 아버지 서랍 속 수첩에서 발견한 내용은 더욱 나를 놀라게 했다. 처음에 검은 글씨로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 내용을 쓴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맨 끝장에 붉은 글씨로 확대해서 쓴 글 내용에서 ‘용서 하세요’ 와 ‘죽어야 합니다.’의 글은 지금도 옹이처럼 무겁게 받아드려 질뿐이다.

우리 아버진 돌아가시면서 상속이란 표현은 안했고 나 또한 나누어 줄 재산도 없기에 할 말은 없다. 자녀들이 알아서 제사 모실 자녀에게 더 선처하고 일부는 형평성에 맞게 해결하기를 바라는데···.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누구나 가을의 누런 들판을 보면 평화스럽고 기쁜 게 사실이라고. 깨달음의 빛과 향기로운 황금들판을 볼 때 스스로 고개 숙여진다고. 형제들 간에도 벼의 황금빛처럼 아름다운 가을을 보려면 서로가 아름다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보듬으며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죽는 일은 현실과 벽을 쌓고 가는 것 일뿐 별 것 아닌 것 같고, 그동안 허무한 삶에서 정직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실천하지 못한 아쉬움만 밀려온다.

이제부터 너의 어머니는 내가 간호할 것이고, 본인의 의지로 살기를 바라는데.

난 지금 응급실 앞에서 그동안 산과 강을 헤매던 일들이 한곳에 머무른 채 유리벽을 보고 있구나. 죽음은 숨이 끊기는 순간만 의미하지 않아서 내가 여기까지 온 거고 불시에 갈 것도 알기에 그 이상은 믿음만 믿고 판단하고 싶다.

그동안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듯 한줌 모래알 같은 얄팍한 생각으로 현실의 문을 두드리며 정신없이 살았지, 어둠의 섬광 같은 확실한 흐름은 고민하질 않았다. 이젠 죽음 저편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고민하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화사한 눈빛이 또 보인다. 이젠 아버지께서 수첩에 남긴 내용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어릴 때 소풍 가듯 그렇게 가야만하지 않을까? 싶다.

 

 

 

                                 늙은 지폐 / 이성환 - 제3회 우하 박문하 문학상

 

빳빳한 기개는 어디에도 없다. 남루하고 꾀죄죄한 행색만 남았다. 표면은 누렇게 땟국물이 절었다. 주름살투성이에다 악취까지 풍긴다. 몸피는 군데군데 해져 초췌한 몰골이지만, 그나마 오른쪽 초상화 얼굴 윤곽은 변함없다. 제 몫을 다하고 떠날 준비를 마친 자의 처연함이 노골적이다.

한 줌 재가 될 화폐들이 금고 구석에 차곡차곡 쌓였다. 은행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지폐 다발을 풀어 훼손된 화폐를 분류하고 세고 묶었다. 무더기로 쌓인 지폐 앞에 전 직원이 달라붙었다. 재사용할 돈과 수명이 다 된 지전을 구분해야 하는 일. 책상 위는 물론 바닥에 종이도 아닌 것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돈을 셀 때마다 뽀얀 먼지가 날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빨리 일을 마치고 퇴근하기 위해 돈다발을 양손에 들고 발로 차며 정리했다. 눈앞에 널려 있고 쌓여 있는 돈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 일을 하다가 지폐 한 장에 눈길이 갔다. 유독 많이 구겨지고 중간이 반쯤 찢어진 지폐 초상화의 흐릿한 눈과 마주쳤다. 초상화의 옷자락은 몇 군데 더 찢기어 너덜너덜해져 종이 넝마처럼 보였다. 문득 학창 시절에 나를 노려보던 지폐가 생각났다.

돈을 원망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중학교 시절, 당시 달동네에 있던 우리 집은 하루 벌어 하루 연명했다. 친구 집에 갔다가 밤중에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길갓집의 대문 역할을 했던 미닫이문을 드르륵 여는데 빼꼼이 열린 방문 사이로 다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내 공납금을 비롯해 아이들 밑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며 언성을 높였고, 아버지는 행상 장사가 되지 않는다며 한숨 섞인 대꾸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려다 말고 발소리를 죽이며 다시 나왔다. 미닫이문 앞 계단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끔 부는 바람에 미닫이문 유리창이 덜거덩거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유리창처럼 내 마음도 흔들렸다.

그날 밤, 주머니에 학용품 구입용으로 어머니에게서 받은 지폐 한 장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천 원짜리 정도가 되었을까. 손에 쥔 지폐를 폈다. 어둠 속에서 초상화의 인물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공장에 가야 할 처지. 나는 입술을 깨물고 지폐를 찢기 시작했다. 하늘의 별 숫자만큼 조각조각 분해하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어져 땅바닥에 낙하하는 지폐. 사춘기 반항의 조각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때 깨달았다. 돈이 없으면 친구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사 먹을 수 없다는 것을. 가족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할 일도 돈이 없으면 자칫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을. 학교를 중퇴하면 주눅이 들어 끝내 자존심이 추락한다는 것을. 가난을 벗어나려면 내가 어찌해야 할지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가까스로 상고를 졸업하고 운 좋게 은행에 입사했다. 돈 보기를 돌처럼 여기는 놀라운 경험이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학창 시절 그토록 아쉬워했던 돈이 널려 있었다. 손님의 뭉칫돈도 예금 통장에 한 줄 숫자로 찍혔다. 그리도 예민했던 돈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 예금한 돈을 한꺼번에 찾아갈 때는 한 장의 수표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다. 동전이나 지폐 뭉치가 고체 덩어리라면, 수표는 그것들을 녹여 액체로 만들고 다림질한 한 장짜리 결정체. 큰돈 역시 가로 16㎝ 세로 7㎝의 사각 종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 무렵부터 시나브로 돈을 가볍게 생각했다. 은행 돈이 내 것인 양 저도 모르게 교만했던 것이다.

은행에서 장기근속 후 퇴직했지만, 여전히 돈에서 자유롭지가 못했다. 자녀 교육비에다 부부 노후자금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아내의 동의 없이 얄팍한 실력으로 재테크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때 아내의 서늘한 등을 지켜보며 시렸던 가슴의 냉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돈을 가볍게 보다가 된통 당한 셈이었다.

그때의 내 처지는 구겨지고 낡은 지폐 같은 신세였다. 부와 명예를 추구하다가 일선에서 물러나서도 번번이 헛물켜는 사람. 노화된 피부에다 신체 장기의 기능이 저하되는 나와, 화폐의 역할을 다하고 퇴역하는 지폐가 무슨 차이가 있으랴. 손상 화폐를 분류하면서 보았던 늙은 지폐는 내 삶 자체가 아닌가. 여태까지 애바른 인간을 위해 일하다가 결국 시들어 가는 화초처럼 삭아버린 존재. 이런 게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가난을 염려하고 병들어 괴로워하며 평생 전전긍긍하다 종착역에 도착하는 게 모든 것의 생生인 것을.

그런 일을 겪고 보니 예전에 은행에서 마주쳤던 헌 돈이 생각났다. 그 지폐는 수만 리를 떠돌며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시장이나 식당, 공장이나 일터로 활개 치듯 바삐 돌아다녔을 것이다. 주인을 따라 다니다 비에 젖고 악취와 오물을 뒤집어쓰기도 했을 지전. 어떤 때는 사람들과 술집에서 흥청망청, 어느 곳에선 뺏고 뺏기는 아귀다툼, 서로 치고받는 주먹다짐의 현장까지 목격했을 테다. 그러다 마멸되고 쓸모가 없어져 소각되어야 할 시간에 다다른 파란만장한 세월. 지폐라고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성싶다.

돈이 사람을 울리고, 돈이 사람을 속인다. 돈 때문에 상처받고 병들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어쩌면 돈이 자신의 의지대로 인간을 지배하고,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듯싶다. 왜 우리는 그 사람을 말하지 않고 그가 가진 돈으로 말해야 할까.

돈 때문에 깨닫고 배운 바가 많다. 어쩌다 꼬깃꼬깃한 종이돈을 보면, 내가 한때 어렵게 일하고 대가로 받았던 봉급을 생각한다. 그때의 돈은 내 몸속의 소금기를 내주고 바꾼 것이 아닌가. 그러니 구김지고 찢어졌다 하여 버려질 수는 없는 일. 재사용하도록 테이프로 붙이고 구겨진 것은 다림질로 폈던 가난한 어머니를 기억한다. 이제는 돈에 대해 균형 잡힌 감각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으면 좋겠다.

돌고 도는 돈이 사람을 교육하고 길들인다. 하지만 순환하는 게 돈만은 아니다. 뭇 생명도 인연도 돌고 도는 게 자연의 이치. 이생에서 돈이 나에게 흐르지 않는 것은 전생에 많이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다음 생애의 나에게 주려고 저축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제는 경거망동 않고 돈과 그저 친구처럼 어깨동무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 지갑 속에는 잠시 나를 찾아온 지폐 몇 장이 들어 있다. 아직은 노쇠하지 않았으니 희망의 순례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꺼내 든 지폐 속 초상화의 얼굴이 잔잔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녀는 나의 주인공 / 주재현 - 제14회 목포문학상 당선작

 

처서가 지났지만 아직 한낮은 무덥다. 역사(驛舍)를 나오니 공기가 여간 후텁지근하지 않다. 목포역에서 두리번거리다보니 커다란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옥단이길이란 문학기행 탐방로에 대한 설명과 옥단이란 여인에 대한 간략한 안내글이 적혀 있다. 광장이 크지 않아 금세 눈에 띄기도 하지만 택시 승강장 바로 앞에 붙어있으니 목포역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눈길을 주지 않을 수가 없겠다. 광고판으로 치자면 제일 비싼 자리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목포 출신의 걸출한 인사들을 제치고 명당(?)을 차지하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옥단이가 단순한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유명세에 비해 옥단이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그렇게 스쳐 지나듯 만났던 옥단이를 목포의 여러 문화 행사를 참여하는 과정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옥단이를 한번 두 번 만나다 보니 그녀가 꽤 흥미있인 인물임이 느껴졌다. 요즘은 재미있고 적극적으로 타인과 어울리는 사람을 ‘인싸’(insider의 줄임말)라고 하지 않나. 옥단이가 바로 시대를 앞서간 인싸였던 것이다.

옥단이는 1920년에서 1950년 사이 목원동 골목에서 지게로 물을 나르거나 날품팔이를 해 생계유지를 했다고 한다. 나이도 출생지도 모르는 혈혈단신의 아낙네였다. 그 외 옥단이에 대한 정보는 아마도 목포 출신의 작가 차범석의 희곡 ‘옥단어!’에 나오는 묘사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묘사한 옥단이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오동포동하게 살이 찌고 사팔뜨기인 눈이 아래로 쳐졌다. 숯검정으로 그린 듯한 두 눈썹에 붉은 볼연지와 입술연지를 했지만 미인 축에 끼지 못한다. 옷 입은 매무새도 엉성하고 말투도 어눌하니 동네 꼬마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기 일쑤고 놀림거리가 된다. 정해진 거처도 마땅치 않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래와 춤을 즐기고 근심 걱정이 없어 보인다. 1924년생인 작가가 유년시절 보았던 옥단이의 모습을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한 것일까.

정보의 여백과 인물의 결핍은 마른 창작 의지를 타오르게 할 불쏘시개가 된다. 만화 창작을 하는 나와 남편은 이런 옥단이의 매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옥단이를 보면 볼수록 그녀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어딘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인물이지만 작품 속 주인공으로서의 요건은 모두 갖춘 셈이다. 작품 속 주인공은 결핍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의 주인공으로 옥단이를 점찍고는 그녀를 뒷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옥단이의 숨결을 느끼고자 찾아간 옥단이길은 그야말로 미로같았다. 큰 뿌리에서 잔가지들이 퍼지듯 넓은 골목에서 여러 개의 좁은 골목으로 갈라진다. 폭이 너무 좁아 막혀있는 길이 아닐까 의심하며 가다 보면 골목 끝은 좀 더 넓은 또 다른 길과 연결된다. 그 모습이 우리 삶과 어딘가 닮은 듯하다. 목원동 고갯길은 얼마나 가파른지 여간 체력이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투실투실한 몸매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이 먹고 체력을 비축하지 않으면 물지게까지 지고 산동네를 올라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기 때문이다.

유달산 아래 번화한 일본인 마을에서 밀려나 산기슭을 따라 다닥다닥 자리를 잡은 조선인 마을. 여기엔 수도시설은커녕 우물마저도 몇 개 없었기에 물장수는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옥단이가 다녀가고 나서야 메마른 목을 축이고 가족들을 위한 따뜻한 밥상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물은 생명수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물의 전령으로서의 옥단이, 힘이 장사인 소녀 옥단이 등 머릿속에 갖가지 캐릭터들이 떠올랐다.

옥단이는 본업과 부업을 부지런히 했던 의욕적인 여성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투잡, 쓰리잡을 했으니 말이다. 물장수 일 외에도 자질구레한 심부름부터 마을의 행사에 빠짐없이 불려 다니며 일을 도왔다. 한창 하던 일이 고될 때쯤 사람들이 청하면 춤과 노래도 곧잘 불렀다니 스타성도 겸비한 인물이다. 게다가 품삯에 연연하지 않고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되면 그만이었다니 내 일을 하고 남을 도우며 마음의 여유까지 가진 완벽한 삶이 아닌가. 열정적이면서도 평온함이 공존하는 옥단이의 모습에 아마 그 시절 궁핍하고 핍박받던 이들은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

 

             

               '이제 일어나십시오' / 윤진모 - 제14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절들은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들은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줄 지어 남아 있다.”

일연 스님이 신라 멸망 300여 년이 지난 경주를 순례하면서 남긴 말이 오늘날에도 가슴속 깊이 파고든다.

산길을 홀로 묵묵히 걸어간다. 언론에 익히 소개된 ‘열암곡 마애불상’을 만나기 위해 며칠 전부터 무척 가슴이 설레었다. 오솔길 가에 피어난 참꽃이 간밤에 내린 비를 흠뻑 맞으면서 밤새도록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쌓았나. 진홍빛 눈물이 여기저기 엎드린 채 길손을 빤히 쳐다본다.

새갓골 주차장에서 한 시간 정도 오르면 ‘열암곡 석불좌상’과 마주한다. 부러진 불두(佛頭)의 목 부분을 이어 놓았으나 그다지 흉스럽게 보이진 않는다. 도대체 어떤 수난을 겪었기에 대웅전이나 극락보전 같은 법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빈 터에서 이 산야를 지키고 있었을까.

석불좌상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30m쯤 떨어진 비탈에 무려 80t이나 되는 거대한 화강암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엉거주춤 쪼그리고 살폈으나 마애불상이 보이지 않는다. 나도 코가 땅에 닿을 만큼 납작 엎드려 훑어보자 그제야 ‘5㎝의 기적’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철망으로 감싼 구조물 가운데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처럼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땅바닥만 바라보는 자태가 애처로워 눈길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 예전 군 복무할 적에 사흘이 멀다 하고 기합을 받던 그 ‘원산폭격’보다 더 심한 고행 아닌 고통 속에서 여태껏 수 백 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천 년을 버티다니. 부처님이 이런 모습으로도 수행하는가 싶어 마음이 몹시 무겁다.

언젠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가. 오랜 세월 속에서도 부처님 상호가 어디 하나 이지러짐이 없이 말끔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애불이 제작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진 등 천재지변에 의해 쓰러진 것으로 추측한다. 그렇다면 엎드린 채 천 년이 넘도록 참선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일찍이 천년 왕국 신라의 등불이 꺼져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만 보지 않았던가.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마저 쓰러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봐야 했던 마애불의 심정은 어땠을까.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에 의해 핍박 아닌 박해에 부딪치며 살아온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몽고군과 왜적 등 외적의 노략질 속에서 많은 문화재가 불타거나 훼손되어도 끈끈하게 견뎌온 호국불교가 아닌가. 목탁 대신 창검을 들고 적과 맞서야 했던 스님들은 부처님의 자비심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마애불은 벌떡 일어나 함께 나서고 싶었으나 어쩔 방도가 없어 그저 눈물만 흘리는 자신의 신세가 한없이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리라.

8·15 광복이 찾아왔으나 거듭되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이 땅에 검은 연기를 가득 채운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때에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제 시대도 바뀌었으니 온몸에 덮인 먼지를 털어내고 일어서려고 하나 현실은 부처님을 그대로 쓰러진 채 내버려 두었다. 많고 많은 그날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 마애불은 더 이상 꼿꼿이 서 있을 수 없어 앞으로 엎어진 채 지금도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있음이랴.

마애불의 상호는 인위적인 훼손이나 풍화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저명한 학자와 불교 관계자는 불상이 온화한 미소로 중생을 대한다고 역설한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는 것은 웃음이 아니리라.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은 꾹 다물고 눈은 지그시 감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억장이 무너져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겠는가. 지금껏 죽은 듯이 엎드려 있을 수밖에……. 그래도 두 눈에 흐르는 눈물 같은 웃음이 봄바람을 타고 따뜻하게 감싸고돌아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골짜기에 흘러넘친다.

하산 길에 이대 무리를 만났다. 흔히 조릿대와 혼돈하기 쉬운 대나무다. 화살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기에 전죽(箭竹)이라고도 불린다. 부처님을 잘 보호하고자 화살을 둘러 맨 승병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나 보다.

열암곡 골짜기에는 무수한 너덜겅이 질펀하게 깔려서 불상을 우러러본다. 수많은 남녀노소 불자(佛子)가 법회에 모여든 형상이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바위, 머리를 치켜든 바위, 엎드린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바위…… 무엇을 열심히 빌었을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염불 소리가 솔바람을 타고 나비처럼 너울너울 춤을 춘다.

동박새 한 마리가 진달래꽃가지에 앉아 “슬프지 슬퍼- 슬프지 슬퍼-” 가냘픈 울음을 토한다. 새와 나뭇가지가 함께 파르르 떨어 댄다. 이토록 오랫동안 울고 있는 열암곡 마애불상을 그냥 두고 가기엔 마음이 편치 못하다. 나도 그만 가슴이 울컥하여 가던 걸음을 멈춘 채 동쪽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미세먼지와 황사 바람이 뒤엉켜 흐릿한 산등성이에 우뚝 일어선 마애불이 속세를 향하여 잔잔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마애불상의 통곡을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까. 불교계와 문화재청 그리고 학계에서 부처님을 바로 세우느냐 이대로 그냥 두느냐로 머리를 맞대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 할 묘안이 나오지 않아 안타깝다. 혹시나 자연에 의한 밀림 현상으로 부처님 상호가 훼손될까 염려되어 코와 지면 5㎝ 사이에 검은 고무판을 끼워 놓았다. 철창으로 둘러싸인 독방에 갇힌 불상이 언제 풀려나려나.

천년 고도 서라벌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월성, 분황사지, 황룡사지 등 여러 유적들이 하나하나 발굴 정리되거나 복원 사업으로 옛 모습을 드러내려고 바쁘게 움직인다. 명실공히 경주 남산이야말로 부처님이 살아 숨 쉬는 불국토가 아니런가.

마애불이여! 이제 일어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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