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냇내, 그리움을 품다 / 허정진(제9회 천강문학상 대상) 외 4편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3. 8. 15. 22:20

본문

                              냇내, 그리움을 품다 / 허정진(제9회 천강문학상 대상) 외 4편

  냄새는 그리움이다. 문득 아니면 울컥, 그때 그 어느 날의 흔적과 시간을 찾아 영혼의 빗장을 푸는 알레고리이다. 갓 볶아낸 커피 향기, 담장너머 청국장 냄새, 새로 갈아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 그 목도리에서 그 사람의 언어와 체온과 숨결이 느껴지는 체취, 꽃그늘을 지나다 흠칫 돌아보는 향수 내음. 가슴이 먹먹한 날, 무심코 잊고 살아왔던 먼 기억들이 일상을 툭 치고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운 냄새들이 있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커피나 꽃들이 가진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눈을 감고도 그 사람의 땀과 체취만으로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 후각수용체 신경은 특정 냄새에 대해 한 가지 세포만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냄새에 대한 정밀한 뇌 지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식욕을 느끼거나, 좋다거나 불쾌하다거나, 위험을 감지하거나, 모든 생물체에 있어 후각은 먹이를 찾을 때 혹은 포식자를 피할 때 그리고 짝을 정할 때 등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적한 시골마을로 이사를 했다.
  아직도 드문드문 고즈넉한 옛 풍경의 모서리들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무채색 계절에 홀로 반짝이는 샛노란 모과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숨구멍이 열리고 새콤한 향기를 토해낸다. 겨울로 들어서면서 해가 노루 꼬리만큼이나 짧아져 퇴근 무렵이면 벌써 주위가 어둑신하다. 어둠이 깔려 사방에 적막이 깃들면 산동네 공기는 금방 싸늘해진다.
  동네어귀에 차를 주차하고 고샅길로 들어서면 어디서 따라오는지 매캐한 연기냄새가 코를 알싸하게 만든다. 고문서를 거풍하듯 잘 마른 장작 타는 냇내다. 보일러 시설뿐인 내 집에서 나는 냄새일리는 없고 아마도 옆집 누군가 군불을 지피는 모양이다. 모닥불처럼 냄새가 따뜻하다.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낯선 상황에 내 볼일이 아니라는 듯 애써 외면하지만 그것쯤 아랑곳없이 발걸음마다 곰삭은 기억들이 밟혀온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선다. 혼자 사는 집에 반기는 불빛 하나 없는 대신 옆집의 연기냄새가 무단 침입해 자기영역 표시하는 짐승들처럼 만연체로 차지하고 있다. 별빛 총총한 밤의 청취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작 냇내와 어우러져 달밤의 정감을 한껏 부추긴다. 귀 기울이면 어느 LP판 턴테이블에서 야상곡 멜로디가 댓잎 사이로 은은하게 흘러나올 것 같다. 지그프리트 바르헤트의 감미롭고 부드러운 첼로와 섬세하고 잔잔한 피아노 반주는 어떨까. 아궁이 앞에 군불을 지피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연주자의 그림자처럼 불현듯 눈앞에 그려진다.
  장작불이 활활 타오른다. 시커먼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세찬 불길이 성난 황소 뿔처럼 울끈불끈하다. 탁, 탁, 탁, 장작 타는 소리. 불땀 좋은 마른 장작들이 죽비 터는 소리를 내며 나이테마다 옹이진 경전을 읽어내고 있다. 몸에 흰 연기를 칭칭 감고 방고래를 향해 기세 좋게 타들어가는 불길이 마치 젊은 시절 열정과 욕망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던 날들을 보는 것 같다.

  기운차게 타오르던 장작불이 어느 정도 사위어들면 부지깽이를 뒤적거리며 멍하니 불꽃을 바라본다. 삶의 아픔과 시름도 순간 잊어버리고 무념무상에 빠져들 것 같은 궁극의 순간이다. 이글거리는 황금빛 불꽃이 고흐의 인상주의 그림처럼 사뭇 몽환적이다. 빨갛게 불덩어리를 안은 장작개비 사이로 자기도 모르게 삶의 미련과 후회의 탄식을 내뱉기도 하고 까닭을 알 수없는 연민과 그리움이 몰려오기도 한다. 등짝은 바깥 찬바람에 서늘한데 불꽃을 맞댄 얼굴은 매운 고추라도 삼킨 듯 화끈거린다.
  군불 때는 일이 쉽지는 않다. 요령을 제대로 터득하려면 눈물깨나 흘려야 한다. 나무마다 특성을 잘 알아야 하고 바짝 마른 가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매운 연기가 꾸역꾸역 밀려나오기도 한다. 불을 빨리 키워볼 욕심에 한꺼번에 장작을 많이 밀어 넣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바람과 불길이 잘 들도록 숨구멍을 틔어 놓는 공간이 없었기에 오히려 따뜻한 불씨가 죽고만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공들이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지나고 보면 이해와 관용, 배려와 여유가 늘 아쉬웠다.
  저 불길이 온 방안의 구들장을 뜨끈하게 데울 것이다. 바깥은 세찬 눈보라가 몰아쳐도 뜨거운 제 몸의 온기를 지닌 구들방은 밤새 식구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날은 저녁 무렵부터 내리던 함박눈이 밤늦도록 소복이 쌓여가고 있었다. 긴 겨울밤을 톡톡 분지르며 바느질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이불을 걷어차며 단잠에 빠진 어린 자식들을 다독거리기도 하고 문풍지가 떨릴 때마다 아랫목에 앙구어놓은 밥주발에 걱정스레 눈길을 주곤 하였다. 엄동설한도 꾸벅대는 길고 긴 겨울밤, 아마도 달팽이 같은 시간을 아껴먹던 평온 같은 것이 아니었나싶다. 일터에서 밤늦게 귀가한 아버지는 고흐의 자화상처럼 동여맨 목도리에 새파랗게 얼어붙은 노동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런 날은 어린 눈에도 아버지란 존재를, 누군가의 어깨가 된다는 것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해본 것 같다. 굳은 손을 부비며 아랫목 구들장에 추위를 녹이는 아버지의 등 그림자를 보면서 비로소 오늘밤에도 가계도 하나가 완성된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날은 왠지 늦잠을 자고 싶었다. 뒹굴뒹굴, 혼자 뒤늦게 눈을 뜨면 창호지에 비치는 아침 햇살은 한없이 따사로웠고 군불 땐 방 안은 마치 누군가의 품에 꼭 안기어 숨이 막히도록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자폐증에 빠진 겨울이다.
  올해는 유달리 춥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외로움이 가중된 모양이다. 저 옆집의 연기냄새는 누구를 위해 군불을 지피고 있는 것일까. 가족이거나,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위해서거나, 아니면 풍찬노숙 같은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자신을 위해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위해 아궁이로 달려가 불을 지피는 그 모습은 아버지일수도, 오래된 친구일수도, 아니면 효심 많은 자식일수도 있다. 저녁안개처럼 온 동네에 내려앉은 냇내가 ‘관계’에 대한 목마름처럼 아득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군불을 지핀 적이 있을까. 한 사람의 가슴이라도 제대로 따뜻하게 데워본 적이 있었을까. 따뜻한 온돌도, 화로도, 연탄불도 되지 못해 아직도 내 구들장은 냉돌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덜 마른 나무로 방을 데우겠다고 불쏘시개만 아궁이에 쉴 새 없이 넣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은 꾸역꾸역 역류하는 매캐한 검은 연기처럼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다.
  고맙다며, 미안하다며, 감사하다며 왜 진작 말하지 못했을까. 이해관계 없이, 희생하고 있다는 군소리 없이 열의와 정성을 다해본 적이 있었던가. 내게 좋은 것, 편한 것, 필요한 것에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숨겨진 삶의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외면했던 것은 아닌가. 나의 안녕과 평안만을 바라며 불목을 찾아 등짝을 지지기만 했을 뿐 찬바람 부는 바깥에서 들뜬 마음으로 방구들을 데우는 역할은 하지 못했던 지난날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감정은 소중한 일이다. 가족이거나 친구나 연인일수도 있겠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었어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거나 아니면 상처받은 기억의 흔적들일 것이다. 그 그리움은 뒤늦은 깨달음일수도, 속죄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힘으로 오늘을 반성하며 사는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세상살이가 자신만만해서, 내 잘못은 없다며 스스로 당당해서, 그래서 되돌아볼 그리움도 없이 사는 삶은 빈 수수깡처럼 얼마나 쓸쓸한 일일까. 그때 그 일은 순전히 내 잘못이었던 것처럼, 후회와 원망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따스한 아랫목의 온기를 가슴에 품고 살아볼 일이다.
  온기를 느끼고 온기를 주는 것.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로 경계를 넘어 온정이 생겨나고, “고생했어!” 한마디로 힘들었던 고통마저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잘 데워진 구들장처럼 삶이란 그 뜨끈한 온기로 추운 겨울을 함께 헤쳐 나가는 일이다.

수필 부문 대상 수상소감
허정진 (필명 허석)

말과 글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다. 적당히 온기 있는 언어는 주위의 슬픔을 감싸주지만 싸늘한 언어는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다. 말 한 마디, 글 한 문장을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이유다. 수필의 품격과 향기와 영혼도 결국 글쓴이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나의 언어도 구들장 같은 따뜻함이고 싶다. 사자후나 거대 담론도 아니고, 난해한 긴장이나 함축도 아니고 그저 이른 봄날 훈풍 같은 작은 언어이고 싶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맑고, 밝고, 건강한 글이고 싶다. 사회의 부정직, 부조화, 불균형에 대한 관심마저 따뜻함을 최대의 무기로 삼고 싶다.

뜻 깊고 권위 있는 상을 받아서 기쁘다. 무엇보다 천강홍의장군이 주는 상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속리와 영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가시밭일수도 있는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그 순결함이 좋았다. 창작 활동의 내력으로 삼아 정진하겠다.

수필부문 심사평
내면 성찰과 사유의 감각적 표현

‘하늘이 내린 의로운 문학상’인 천강문학상 제9회 수필부문 결심에 오른 작품은 26분의 작품 78편이었다. 결심에 오른 만큼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심사척도인 문학성을 지닌 작품들이었다. 이미 등단한 수필가이거나 등단 임박한 문인들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학성 높은 수준작들이었다. 그 중 한분의 작품은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군을 기르는 작품으로 최종심까지 심사위원을 괴롭혔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아버지의 혼불>, <그 골목의 필경사들>, <개와 늑대의 시간> 그리고 <냇내, 그리움을 품다>이다. 이 네 편의 수필을 놓고 대상과 우수상을 결정하는데 많은 고심을 해야 했다. 이들의 작품들은 기성 수필의 수준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그 나름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골목의 필경사들> <개와 늑대의 시간>은 문제가 있었다. <그 골목의 필경사들>은 인터넷 탐색 결과, 같은 제목의 수필이 1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최종심 대상작으로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작가의 다른 수필인 <청에 젖다>를 최종심 작품으로 놓고 심사하였다. 그리고 <개와 늑대의 시간>은 같은 제목의 영화가 있었음이 탐색됐지만 개의치 않기로 하고 심사에 임했다.

그 결과, 대상으로 허정진의 <냇내, 그리움을 품다>로 결정하고, 우수상으로는 안희옥의 <청에 젖다>을 결정하였다.

허정진의 <냇내, 그리움을 품다>은 “냄새는 그리움이다”로 첫 문장을 시작한다. 그 냄새의 정체는 군불이다. 이 군불 냄새, 냇내는 우리에게 잊혀진 후각언어이다. 그 냇내를 모티프로 한 이 수필은 작가가 한적한 시골마을로 이사하면서 체험하게 되는데, 그 냄새를 통해서 작가는 인간의 다양한 냄새와 젊은 날의 장작불과 같은 열정과 욕망을, 그리고 먼 옛날의 군불 때던 기억을 환기하면서 사유한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거나 아니면 상처받은 기억의 흔적들일 것”이며, “그 그리움은 뒤늦은 깨달음일 수도, 속죄의 순간이 될 수도 있”음을 사유한다. 그 사유의 깊이는 철저한 자아성찰을 결과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부분이다. 장작불꽃을 바라보며 “삶의 아픔과 시름도 순간 잊어버리고 무념 무상” 속으로 빠져 드는 작가의 상념. 그리고 “자폐증에 빠진 겨울”에 “저녁 안개처럼 온 동네에 내려앉은 냇내가 ‘관계’에 대한 목마름처럼 아늑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정서 표출과 깊은 사유는 후각언어가 부족한 한국어에 대한 극복방식의 하나인 표현구조를 시각과 정신적인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의 최고상인 대상으로 결정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우수상으로 결정한 안희옥의 <청에 젖다>는 대금 소리를 모티프로 한 수필로 청각적 이미지를 살린 작품이다. 이 수필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소리를 따라 새떼가 날아오른다. 천변의 갈대들은 중모리로 춤을 추고 만추의 은행잎이 꽃비처럼 흩날린다.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소리가 강물처럼 유장하다”가 그것인데, 청각이미지를 모티프로 하는 수필임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이미지로 공감각 전이시켜 쓰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다분히 시적 감각이 뛰어난 작가로 보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도식적인 표현구조를 쓰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그 참신함을 반감시켰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청’, 대금의 청공에 붙인 떨림판 역할을 하는 갈대속의 얇은 막의 소리를 감각적으로 혹은 일상적인 삶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되어 우수상으로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두 분의 수상에 축하를 드리며, 아쉽게 최종심에서 제외된 두 분께서 그 가능성에 박수를 보낸다. 또한 선외의 작품이지만 <망우당께 보내는 편지1>외 두 편의 서간체수필을 쓴 분께서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곽재우 장군을 기르는 마음과 수필창작의 실험성을 과감하게 시도했다는 점에 특히 박수를 보낸다. 다음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유한근 (문학평론가 · 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냇내 ㅡ 물건이 탈 때 나는 연기의 냄새새

 

                                                         쇠꽃, 향기 머물다 / 허 정 진

 

둥글둥글한 버섯들 군생처럼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시골 마을이다. 한해의 결실을 보고 난 뒤의 들판은 허무인지 여유인지 텅 빈 충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담장 너머 등불처럼 붉게 매달린 홍시가 방학 때마다 외갓집 오고 가는 길목처럼 정겹기만 하다. 숲속 어딘가에서 갑자기 허공으로 높이 날아오른 새가 폐곡선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선들선들한 바람이 조붓한 돌담길을 따라 마을을 안내하듯 앞장선다. 오래된 시골집이다. 귀향을 염두에 두고 잠시 머물 거처를 찾던 중이었다.

 

뒤란에서 불어오는 대숲 바람, 호박넝쿨 타고 오르는 낮은 돌담, 우물가 옆에 돌확이나 숫돌이 주인 잃은 빈집을 지키고 있다. 한때는 올망졸망한 자식들 앞세운 일가족이 등가죽 따뜻하게 살던 집이었으리라. 사람 냄새 들썩거리던 온기는 사라지고 시간의 덫에 걸린 풍경만 먼 산 뻐꾸기 울음처럼 휑뎅그렁 남겨졌다. 눈길 머무는 대문 옆 허청에 가지런히 놓인 농기구들이 눈에 띄었다.

 

조가비처럼 닳고 닳아 뭉툭해진 호미며 낫, 손잡이가 낡아 푸석이는 괭이와 삽, 헛간 안쪽에는 오래된 보습이나 쇠스랑도 동면하듯 웅크리고 있다. 사용한 지 오래되어 하나같이 쇠붙이마다 붉은 녹이 슬었다. 비록 낡고 오래되어 볼품없지만, 주인과 함께 평생 한 몸이 되어 살았던 삶의 도구들이다. 한 가족의 역사이고 주인의 생애가 그대로 읽히는 것 같다. 이제 모두 먼 세상으로 떠난 지금, 살아생전 주인이 쏟았던 새척지근한 땀내만 낙오병처럼 남아 침묵 속에 묵은 시간을 붙잡고 있다.

 

저 쇳덩이에 이끼처럼 달라붙은, 붉은 강낭콩보다 더 서러운 쇳녹이 처연하게도 보인다. 시간의 모서리마다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쇠의 부식은 또한 스산하고 처량하다. 불그죽죽한 녹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죽기 전에 피는 것이 꽃이라면, 차갑고 단단한 무쇠가 온몸을 불태워 열정을 쏟은 후에 비로소 꽃이 되는 것을 눈앞에 지금 보았다.

 

녹이 뱉어낸 쇠의 꽃, 마지막 제 목숨을 소신공양하는 듯 온몸에 불을 질러 붉은 융단을 펼쳐놓았다. 잎도 줄기도 없이 마냥 붉기만 한, 기름기 빠진 무쇠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생生을 비워내고 있는 것일까. 향기 또한 인고의 시간만큼 비릿하고 시큼하다. 짐 진 삶의 무게를 버텨내느라 평생 단내 나는 통증만 꿀꺽꿀꺽 삼켰던 모양이다. 대뜸 꽃말이 궁금해지는 것은 웬일일까.

 

이제는 녹슬고 부식된 쇠붙이지만 처음에는 대장간 불내 풀풀 날리며 날렵한 자태를 뽐냈으리라. 세상 무슨 일이든 감당하려는 듯 당당하고 강단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마른 땅이든, 진 땅이든 주인과 함께하는 길을 두려워하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밤낮도 없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척박한 농토를 일구느라 바윗돌에 온몸이 부딪쳐도 참고 견뎌냈으리라.

 

보릿고개를 이겨내고 생때같은 식솔들 목숨을 거두느라 고난의 세월을 주인과 함께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 식구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식들 도시로 보내 공부시킬 수 있을까. 오장육부를 떼어주고 뼈를 갈아 자식 몸에 붙여주느라 모든 것을 수고하고 희생한 땀내를 저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앉으나 서나 일밖에 모르는 지난한 삶에 지친 몸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는 날들이었다.

 

만추의 낙엽 하나가 그 메마른 무게로 계절을 바꾸었듯이 작고 시커먼 쇠붙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내력을 가졌다. 녹진한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살이 빠져나간 자리에 쇠골이 깊어졌지만, 그들이야말로 특별하고 위대한 우리 부모들의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온몸에 흙내가 물씬 밴 저 쇳덩이 하나하나가 삶의 전부이고, 생을 버텨낸 유일한 무기였을 그들의 노고가 눈앞에 그려진다.

 

저 쇠꽃은 희생과 헌신 뒤에 얻을 수 있는 영광의 빛이고 결이다. 비록 내 몸은 닳고 부서져 없어지지만,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뼈를 깎는 아픔과 고통을 참고 견뎌낸 땀이고 눈물의 결정체다. 그래서 쇠의 우담바라이고, 어둠 속에 반짝이는 염화시중의 미소일지도 모른다. 평생을 오체투지로 걸어온 저 쇠꽃이야말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천둥에도 꺾이지 않는 꽃 중의 꽃이다. 벌 나비 날아든 적 없지만, 그 어느 보석보다 빛나고 향기로운 꽃이다.

 

저 녹슬어 사라져가는 쇠꽃이 노인 얼굴에 검버섯을 보듯 슬프게도 느껴진다. 인생처럼 한 줌의 가루가 되어 자연으로 회귀하는 일이다. 그러나 꽃이 된 녹은 또 내일의 씨앗을 함께 품고 있는 셈이다. 사라져간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탄생을 위한 눈부신 산화일지도 모른다. 원래의 본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생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다행한 일인가. ‘사라진다’를 힘주어 읽으면 ‘살아진다’가 되는 것처럼 다시 원점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제 세상을 등지고 붉게 물들어 가고 있는 저 쇠붙이들이 어쩌면‘녹’이 될 수도 있고 ‘꽃’이 될 수도 있는 경계를 생각해본다. 힘든 삶이라고 좌절과 포기로 손을 놓는 것과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뒤에 얻어지는 결과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고통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비록 쇠하여 없어질 몸이지만 삶의 끝머리가 녹이 아니라 꽃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살아볼 일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열정을 다해 노력하다 맞이하는 종말은 아름답다. 저 농기구의 붉은 녹도 대나무처럼 자기의 모든 힘을 다 쏟아내고 죽기 전에 단 한 번 피우는 무쇠의 열꽃이 아니던가. 생애 마지막에 피는 찬연한 꽃, 물과 햇볕 없이 소금기로 자라는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뜨거운 꽃이다. 호미는 호미대로, 곡괭이는 곡괭이대로 지나온 삶의 비문 같은 쇠꽃에 손을 얹어보면 가을 햇살 가득한 그리움이 손금 사이로 배여 나올 것 같다.

 

                                                                    소통의 언어학 / 허정진

 

 패스트푸드점에 가끔 간다. 나이가 들어선지 아무래도 낯설고 불편한 장소인 것이 사실이다. 무인주문기 사용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주문받는 젊은 친구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다. 웅얼웅얼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입도 벌리지 않은 채 복화술처럼 말한다. 노화된 청력 때문인지, 전문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요점을 놓치고 만다. 마지못해 되물으면 똑같은 말투로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사실은, ‘나이 든 사람이니까 말을 좀 천천히,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해주면 좋겠다.’라는 요청인데 이해를 못 한 것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그런 것쯤 아랑곳없다.

그럴 때마다 덜컥 서러움이 앞선다. 어쩌다가 벌써 늙어서 세상 물정과 감각도 무뎌진 노인이 되어버렸나 자책을 한다. 늙어서 무시당한다는 기분 이전에 세상밖에 멀리 떨어진 것 같은 소외감과 무력감이 몰려온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이해도 하지 못한 채 지레짐작으로,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가 스스로 안타깝다. 남의 말을 혼자 유추해 때로는 동문서답하는 자신이 계면쩍고 안쓰러울 때도 있다.

말을 주고받는 이유는 소통을 위해서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 좋은 의도, 좋은 목소리를 가졌어도 의사전달이 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말투나 표정, 손짓, 발짓, 눈짓, 자세, 옷차림 등 비언어적 기호들을 사용하는 이유도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다. 상대가 내 말을 알아들어야 이해와 교감도 가능한 일인데 내 할 말만 다 했다는 식이면 허공에 내뱉는 소음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말이란 자기의 생각을 소리로 전달하는 수단이다. 제한된 어휘 내에서 가장 잘 들어맞는 단어를 골라 사용한다 해도 전달에는 늘 부조화가 발생한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직업과 나이, 거주지역 등에 따라 집단문화의 차이가 있다. 개인적인 가치, 정서, 관습, 학습, 정보 등에 따라 받아들이는 우선순위가 다르고 이해나 인식의 비중에도 차이가 있다. 유머를 유머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웃음 코드가 서로 달라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그러한 사실을 간과한 채 상대방도 자기와 똑같은 줄 착각하는 데 있다.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상대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하고, 격려나 조언에서 한 말들이 유세나 간섭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염화시중처럼 말이 없어도 마음과 마음이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소리 공양한답시고 말이 너무 많아서 소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심코 뱉은 한마디 말 때문에 서로 간에 오해와 혼란이 일어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성의를 보인다는 것이 잔소리가 될 수도 있고, 상투적인 위로가 때로는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돌아보면 나부터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소통이 안 되면 상대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먼저 트집부터 잡았다. 주의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지 의심부터 하려 들고 답답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속으로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내가 다 알아듣고 있는데, 내가 하는 말을 왜 못 알아듣느냐고 다그치며 거들먹거리지 않았나 모르겠다.

상대가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은 결국은 내가 말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지 않고 내 기준으로, 내 방식으로만 이야기해서이다. 본심을 숨기고 왜곡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빗대어서 말하는 때도 있었다. 말에 요점과 두서가 없거나, 부정확한 발음이나 음절이 불분명한 말투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소통 장애의 원인은 상대에 대한 무관심과 무성의, 무례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남의 말이 알아듣기 쉬운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잘나고 이해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위해 알아듣기 쉽게, 요령 있게 이야기를 해서이다. 이야기 주제를 미리 언급하고 말을 꺼낸다거나,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한다든지, 요점을 간결하게 표현한다든지, 못 알아들으면 다른 용어로 바꾼다든지 성의와 배려를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내가 하는 말이 어려워 혹시 되묻지나 않았는지, 내가 하는 말이 아리송해 불편하지나 않았는지, 밑도 끝도 없는 유행어나 막무가내로 줄임말을 남발해 당황하지나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같은 말을 하여도 그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어느 소설에 나온 이야기다. 퇴근한 남편에게 아내가 당신 요즘 회사에서 점심은 뭘 먹느냐고 묻는다. 설렁탕이나 비빔밥이나 육개장, 뻔한 일인데 그게 뭐가 중요한 일이냐고 남편이 화를 내며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내는 남편의 섭생을 생각해 균형 있는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물었던 것이다. 둘 다 잘못은 없다. 다만 의도를 먼저 표현하고 내용을 물었다면 그런 오해는 없었을 것을, 말보다 소통과 교감이 문제였다.

내가 만든 소리는 나의 언어가 되어 완성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그가 듣고 싶은 말, 내가 하기 쉬운 말보다 그가 알아듣기 편한 말이 어떨까. 거기에는‘말’에 앞서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먼저다.

 

 

                                                                그림자 / 허 정 진

 

밀정처럼 은밀하고 자객처럼 민첩하다. 소리를 들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울퉁불퉁, 각을 세운 벽이나 진창길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앉으면 저도 앉고 일어서면 같이 서고, 앞서다가 또 뒤따라오며 소리 없이 움직인다. 때로는 그늘 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내면의 진실과 겹쳤을 뿐 존재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 번도 옆길로 새지도 않고 귀찮아 쫓는다고 도망가지도 않는 영원한 삶의 동반자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배신하거나 거부하지도, 변하지도, 다른 욕심을 내는 법도 없이 내 곁을 지키는 수호천사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나의 영혼이며 이력서와 같다.

부처의 자비도, 예수의 사랑도 그림자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오체투지도 마다하지 않고, 낮은 곳에 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환희와 영광에 나서는 법이 없어서 언제나 빛의 뒤편에 위치한다. 그는 공평하고 평등해서 인종이나 빈부, 이념, 못나고 잘난 사람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채도와 밀도로 존재한다. 화려한 옷차림과 고혹한 향기도 그림자 앞에서는 무채색일 뿐,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어느 한쪽 치우치는 적이 없다.

그는 내 육체와 영혼의 가교역할을 한다. 제 몸을 다 드러내었어도 영혼이 없이는 만져지지 않고, 제 눈을 다 뜨고 있어도 마음이 없이는 실체를 볼 수 없는 법이다. 외면의 그림자는 나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지만 내면의 그림자는 나의 영혼을 지배한다. 그렇다고 흔적을 남기거나 상처 주지는 않는다. 세상의 온갖 허물과 과실을 지켜보지만 고해성사 받는 신부처럼 침묵으로 일관한다.

자기 그림자에도 발이 걸려 넘어지던 때가 있었다. 세상은 앞과 뒤, 오르막과 내리막, 빛과 어둠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높고 멀리만 쳐다보고 살다가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 땀에 절고 노동에 지친 기다란 내 그림자와 만난 적 있었다. 예쁜 풀꽃들이 남발하는 계절이었으나 노을을 등진 어깨 축 처진 그림자 하나가 바닥에서 휘청거렸다. 새삼 낯설었다. 그것이 오히려 나의 실체이며 현실적 자아 인식의 계기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내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고 허상 속에 살았다는 사실이 더 슬프기만 했다.

그림자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내 자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있었다. 사나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서 부와 명예를 얻었다.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는 사나이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나이는 그림자를 되찾고 싶었다. 죽은 뒤 자신의 영혼을 파는 조건으로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었으나, 사나이는 거래를 거부하고 그림자가 필요 없는 세상으로 방랑을 떠난다. 사람에게 그림자는 무엇일까?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림자는 있어도 없는 존재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실상(實像)이 아닐까.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 마음속에 감춰진 꿈과 욕망을 그림자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면의 자아를 숨기고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똑같은 틀에 맞춰 살아가고 있지만 진정한 자기 모습은 그림자처럼 굴절되거나 왜곡된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둑처럼 자신의 그림자를 들키지 않기 위해 어둠 속에 숨어 도망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자는 나의 주인이고 주연이다. 내 마음이고 나 자신이다. ‘나도 나를 모르고,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내가 있다.’라는 노래 가사도 있다. 내 자신인 그림자를 통해 화해와 용서와 성찰도 가능하다. 항상 붙어 있는 데도 없는 것처럼 자신을 돌아볼 기회도 없이 사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몸만 있다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뭇잎이 흔들려 바람을 보는 것처럼 그림자는 빛의 존재, 어쩌면 그 사람의 영혼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림자처럼 살았다는 말은 타인에게 순종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림자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는 말도 자신보다 남을 위해 희생과 헌신으로 살았다는 말이다. 내 아버지도 그랬다. 조실부모하여, 당신을 밝혀줄 한 모숨 햇빛도 없어 일찌감치 남의 눈칫밥 먹으며 그림자처럼 살았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젊어서는 자기 삶이 없었고, 자신의 욕심과 주장이 행여나 가족에게 불편이 될지도 모를까 봐 늙어서도 자식 뒤편에서 그림자로 살았다. 지금 와서 자식 된 처지에서 돌이켜보면 그것이 참으로 미안하고 안타깝다.

창호지 너머 호롱 불빛 아래 앉은뱅이책상의 등 그림자가 그립다. 빛을 등 뒤에 두고 네가 내 앞에 서면 우리는 둘이면서도 하나가 되는 것도 그림자 덕분이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이해관계만 생각하고 결과만 중시하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누구에게도 키다리 아저씨 같은 그림자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차별이나 편견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빛 아래 분명 그림자는 있었지만 바빠서, 힘들어서,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아예 돌아보지도 않고 살았다. 땡볕 아래 잠시나마 그늘이 되어 쉼터를 만들어 주기는커녕 남의 햇빛을 가린다거나, ‘일식’이 되어 주위를 어둡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살아야겠다.

그림자마저 언젠가 없어지는 날 있을 것이다. 내 곁을 떠나는 날, 잘 살았노라고 서로 위로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한 생을 함께 했던 내 그림자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어 어느 동네 겨울 별자리의 문지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끼, 꽃으로 피어나다 / 허정진

 

오래된 시골집이다. 처마 밑에 제비집처럼 한때는 올망졸망한 식구들 들썩거리며 살았던 곳이다. 새벽을 알리는 장닭 울음소리, 아래채 가마솥에는 소 여물죽이 끓고, 매캐한 연기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정지문 사이로 쿰쿰한 청국장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뒤란 대숲을 출렁이며 바람이 지나가면 수다스러운 참새 떼 마당으로 몰려왔다가 한꺼번에 지붕 위로 날아오르곤 했다.

아침마다 싸리 빗질 자국 선명했던 그 마당에 이제 제멋대로 자란 잡초들로 무성하다. 먼 산 울음 같던 쇠마구간도 주인 없는 어둑한 동굴처럼 휑뎅그렁 남겨져 지나간 세월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사람 냄새 물씬하던 온기는 사라지고 기름기 빠진 빈집은 여름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초라하기만 하다. 눈길이 머무는 구석진 자리마다 허연 거미줄이 묵은 시간을 켜켜이 쌓아놓았다.

먹감나무 아래 그늘진 장독대에는 이끼들이 자리 잡았다. 우물터와 돌확, 그늘진 기와지붕, 나뒹구는 세월의 부유물마다 그 빈자리를 메꾸고 있다. 허물어진 돌담마저 청태의가 차렵이불처럼 돌 층계참을 둥글게 뒤덮고 있다. 하루를 탁발해 하루를 사는 민달팽이들이 뿌려놓은 조그만 채마밭 같다. 오래된 가문을 지켜온 수호신이기라도 한 듯 푸른빛의 이슬방울을 머금고 침묵 속에 빠져 있다.

줄기인지 잎인지 구분도 없는 여린 손이 세상을 향해 한없이 꼬물거린다. 녹색 비단 치마를 두른 새색시처럼 사뭇 곱상하고 음전한 자태다. 갈맷빛 실타래 풀어 십자수 놓는 밤마다 한 땀 한 땀 시린 눈물이 발묵하듯 번져갔을 이끼, 허공을 가르는 청둥오리 떼 시퍼런 그리움을 뚝뚝 떨구며 아침을 밟고 지나간 세월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부드러운 존재가 이끼다. 살아남기 위한 가시나 독성 하나 품지 않았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척박한 곳에서도 견뎌내고 우주공간에서도 생존 가능한 식물이라고 한다. 겉보기에는 연약하기 그지없지만,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살아있는 끈질긴 생명력 앞에 고개가 수그러진다.

산에 이끼가 없으면 죽은 산이 된다고 한다. 산불이 나거나 흙이 무너져 맨땅이 드러난 곳에서 맨 먼저 나타나 정착하면서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는 식물이다. 이끼가 자라면서 생긴 부식토 덕분에 식물들이 뿌리내릴 수 있고, 이끼 스스로 작은 동물들에 안식처와 먹이를 제공한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생물체이지만 알고 보면 숲과 지구의 옷이며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준 셈이다.

그래서 꽃말도 ‘모성애’인가 보다. 억척같은 삶 속에서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과 헌신도 마다하지 않는 그 생애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한 법이라고 했다.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 푸른 제 목숨을 소신공양하는 이끼, 관다발이 없어도 자식들 들썩이는 숨소리만으로 배가 부르다. 목숨과도 같은 자식 사랑, 이끼 같은 삶을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의 곡진한 생애가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한다.

힘들고 외진 자리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다. 윗목보다 아랫목이었고 이글거리는 햇살보다 눅진한 달빛에 더 익숙했다. 나무나 꽃도 되지 못하고 해나 별이 되기를 꿈꾸지도 않았다. 어머니란 자리는 남 앞에 빛나거나 화려한 존재가 아니었다. 기꺼이 음지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더럽고 어려운 일을 가리지 않았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식구들의 그림자로 살면서도 누군가의 버팀목이고 받침대 역할에 생을 다 바쳤다.

이끼에게 꽃이 있었던가. 헛꽃만 피고 져 벌 나비 날아든 적 없지만 파르스름한 녹태에 달빛 향기 가득하다. 말보다 손발이 앞서고, 머리보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고유의 냄새가 난다고 한다. 이끼를 먹고 자란 은어에게 수박 향이 난다고 했던가? 어머니 품에는 안정과 평안을 주는 수더분한 향기가 있다. 원시적이고 태곳적인 느낌, 인류의 시원이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을 것 같은 느낌, 절대적인 사랑이란 그렇게 순결하고 정결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일도 없고 바닥을 벗어나 본 적도 없다. 맨바닥이면서도 뿌리인 모성, 돌 틈마다 자란 이끼가 석축을 견고하게 만들 듯 비바람 맞으며 어머니는 삶의 고빗사위를 견디어내었다. 살아내기 위한 하루하루가 생의 마디였으며 걸어가야 할 길목 하나하나가 삶의 곡절이었다.

뼛심을 다하느라 잃어버린 여자의 손, 닳고 닳은 빈손이면서도 내 자식 생각하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고 한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고, 어떤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은 수호자였다. 고단한 무릎을 펴지 못한 달팽이들의 숲이며, 꺾이고 부러지지 않는 바람이 쉬어가는 안식처가 그곳이다. 그래서 이끼에서는 흙내가 나는 모양이다.

늦더위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 댓돌에는 누르스름한 이끼들이 삶의 더께처럼 달라붙어 있다. 삭정이마냥 거죽뿐인 무게로 등걸잠을 자는 어머니를 마주 대하는 듯하다. 저렇게 죽은 듯이 말라비틀어져 있지만 한바탕 소나기 긋고 지나가면 푸르게 살아나 꿈틀거린다. 자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말라하다가 먼발치에서 발소리만으로도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는 어머니가 그렇다. 아마도 이끼는 어린 새들의 날갯짓 소리를 듣고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달의 순례를 마친 그믐처럼 이제는 바늘에 실 꿰느라 헛손질만 하는 노모가 마음 아프다. 추운지 더운지, 밥은 먹었는지, 그저 무탈한지, 늙수그레한 자식들 안위를 챙기느라 마음은 아직도 종종걸음이다. 밥 잘 먹고 아픈 데 없다는 한마디가 어머니의 하룻밤 안식과 평안을 담보한다. 상처는 감추고 그리움은 숨기느라 순하고 느린 눈빛에는 주술처럼 자식 잘되라는 기도만 정화수로 남았다.

목마른 어둑새벽, 돌담 곁에 비손하는 어머니가 보인다. 빛다발 들자 움츠러드는 응축과 희생의 세월이었다. 침묵과 기도만으로 반짝이는 별빛처럼 가슴 언저리 텃밭 하나 푸른 융단처럼 일구며 살았던 어머니, 흘림체로 쓴 삶의 비문 같은 이끼에 손을 얹어보면 비릿한 슬픔의 속살 냄새들이 손금 사이로 배여 나올 것 같다.

우리 살던 옛집에 해지면 분꽃 피어나고 이끼 낀 돌담 아래 귀뚜라미 소리 들린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