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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뿌리ㅡ제은숙 / 2023년제13회천강문학대상작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3. 4. 2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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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뿌리ㅡ제은숙 / 2023년제 13회천강문학대상작 

 

잠잠한 호수를 내려다본다.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처럼 물 한 그루가 천천히 흔들린다. 진흙 깊숙이 발을 걸고 굵은 둥치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가지 끝 어린 물 잎사귀들만 바람 소리에 화답한다. 저토록 푸른 물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을까. 쉽사리 속내를 보인 적이 없기에 겹겹의 결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깊은 바닥에 어떤 마음으로 가라앉았는지 짐작할 수 없다. 얼마나 웅숭깊이 뿌리내려야 저렇듯 고요한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대지 속에 물의 씨앗이 잠들어 있었다. 껍질이 열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물길을 내고 굽이쳐 흘러 금세 거대한 물웅덩이가 되었을 터. 어쩔 수 없이 삼킨 무명들과 어쩌지 못해 뛰어든 이름들을 품으며 살아온 시간. 호수의 생이란 그저 마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땅 아래로 닻을 내리고 함구하는 것이리라. 스미고 파고들어 어딘가로 뻗어 있을 물의 뿌리를 생각한다. 앉은 자리를 원망하지 않았으나 흐르지 못하는 고통은 묵직한 침묵이 되어 내리박혔다. 물면에 비친 산 그림자가 파르르 떨릴 뿐 물은 아무런 말이 없다.

먼 뿌리로부터 시작되는 물을 알고 있다. 바다로 향하는 길가 외딴 곳에 작은 샘터가 있었다. 차디찬 단물이 솟았기에 긴 세월 마을의 식수원이었다가 내가 자랄 때는 목을 축이거나 간꽃을 씻어내는 쉼터로 쓰였다. 늘 축축한 이끼가 깔려 있던 곳. 오래된 책장을 넘기거나 흙을 뒤집을 때 그 냄새가 아득히 밀려오지만 실존하는 냄새라기보다 기억에 밴 내음이어서 무엇이라 단정하기 힘들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입을 갖다 대어 물을 마셨던 행위는 고귀한 존재 앞에 예를 갖춘 제사장의 모습과 같았으리라. 찾는 이가 사라진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나이를 먹었을까. 곁뿌리로 전락하여 사그라진 밑동만 남았겠으나 박힌 뿌리는 여전히 굳건하여 아직도 신령한 물 알갱이를 간직하고 있겠지.

생은 그런 곳에서 움터야 한다.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강한 심지를 가진 모태. 혹독한 추위에도 얼지 않는 신실한 샘으로부터. 우주 만물이 아끼고 조심하여 은밀히 숨겨둔 장소에서 유리알 같은 생명이 끊임없이 솟구쳐야 한다. 어린 발등에 입을 맞추고 공손히 받들어 주는 공간에서 생명은 힘차게 발을 내딛어야 한다. 사람의 목숨도 신을 위한 축제처럼 숭배하듯 출발해야 마땅하다.

새로이 솟아난 물은 뿌리가 없기에 흐른다. 바다로 향하는 일은 그들의 숙명이므로 거부할 수 없다. 바위에 부딪히고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크고 거센 물줄기로 성장하는 여정이다. 그러나 다짜고짜 온 힘을 다해 내달린다고 모두가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않는다. 평탄한 길에 들어서면 다행이겠지만 정처 없이 헤매는 이들도 생겨난다. 바다에 닿지 못한 물줄이 낮은 땅 위에 고여 자리를 잡는다. 물은 겁내지 않고 속도를 늦추며 머무는 일에 전념한다. 단 한 가닥의 실뿌리라도 뻗기 위해 고심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길이 열린다. 발아래, 삶이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들어서기도 하지 않던가.

방황하지 않는 생은 없다. 뿌리가 가냘픈 청춘들은 더욱 연약해서 조그만 돌부리에도 쉽게 넘어진다. 자주 울컥거리고 오독대며 탁해지는 동안 세월은 급물살을 탄 듯 지나간다. 꿈은 까마득히 멀고 해는 저물어 울고 싶지만 흐느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어렵사리 뻗친 땅속줄기에 감자알 같은 자식들이 매달리기라도 하면 생의 추는 더욱 무거워진다. 정착하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 절실해져서 짙푸른 바다는 포기하고 영원히 잊어버린다. 청춘은 금이 가고 닳아서 부서졌다. 세파에 맞서고 때로는 패배하여 찬연했던 빛은 간데없다. 그러나 새롭게 돋아난 의미와 가치들로 상처는 명예로워진다. 굽은 뿌리가 억세고 질겨지는 동안 비로소 물낯은 평온해지는 것이리라.

말라버린 우물 안을 본 적이 있는가. 원천이 있으나 솟지 못하는 물이다.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 물은 스스로를 가두고 천천히 낡아간다. 텅 빈 몸체가 겉으로는 완전히 망가진 생인 듯 보이지만 메마른 밑바닥 깊숙한 곳은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일지도 모른다. 고집스레 뿌리내렸던 상흔으로 바다를 보지 않고도 대양을 품는 법을 깨우친 까닭이다. 그리하여 미련 없이 타들어가 가붓이 이울 채비를 한다. 마지막 뿌리 끝에 씨앗 하나를 감추고 물 주름을 새겨 전하며 오래 버텨낸 신념과 지혜를 남긴다. 이제 물의 씨앗은 장엄한 생의 자취를 넘겨받아 제각각 삶의 길을 찾아 가게 되리라.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다고 여긴 적이 있다. 누가 흔든 것이 아니라 몸의 뿌리가 얕았던 탓이다. 마음속 우물은 보이지 않는 심상들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서서히 말라서 바닥을 드러냈을 때 내게서 태어난 어린 생명이 두레박을 내려 나를 길어 올렸다. 그 물로 목을 적시고 세수를 하고 더러워진 발을 씻었다. 나는 어느새 어린 날의 샘터를 찾았고 다시 맑게 차올랐다. 순수한 물 알갱이였던 기억과 눈부신 씨앗을 품었던 감각은 내 몸 안에 강고히 뻗어있는 생명의 뿌리였다.

성스러운 샘이 아니어도 된다. 만물을 간직한 씨앗이 아니라도 괜찮다. 세찬 빗줄기나 흙탕물 속에서도 목숨은 나고 이어진다. 웅덩이에 갇힌 삶도 있고 바다로 가는 유랑도 있으며 드넓은 호수에 머무르는 인생도 있는 법. 저마다 강인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안으로 끝없이 걸어 들어가면 세월의 외진 모퉁이에서 청량한 샘물로 솟아나기도 할 것이다. 비록 바다에 닿지는 못할지라도 생의 근원에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물의 뿌리가 호수를 고즈넉이 잠재우듯 몸의 뿌리가 생을 단단하게 붙들어줄 것이므로.

호수 속에서 자라는 나무가 있다. 뿌리를 내린 후에는 어디도 갈 수 없는 운명이 나무를 주저앉혔다. 나무는 주어진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면 위 가지로부터 무수한 잔뿌리를 내밀어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물 또한 어쩌지 못하는 수근을 묵묵히 받들며 제 발끝에 힘을 모은다. 누군가의 삶도 가슴 한가운데로 지심至深한 뿌리를 내리는 일이라고 여긴다.

 

                     불씨 / 제은숙 / 2020년 제1회 전남매일 신춘문예 골드문학상 당선작

장작이 탄다. 불이 붙기 시작하면 확확 타오른다. 마른 나무가 몸을 뒤채며 터지고 끊어진다. 치솟을 땐 다가 갈 수도 없게 뜨거웠던 것이 잦아들면 은은한 열기와 함께 옆자리를 내어준다. 숯불은 불길을 제 속에 불러들여 스스로 발광한다. 온전히 붉은 것이 아니라 노랗거나 빨간 빛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린다. 심장이 뛰듯 두근대기도 한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어디 먼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불기운이 주는 나른함 때문이리라.

어느 가을 우리 가족은 캠핑을 시작했다. 한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줄기차게 짐을 꾸렸다. 소꿉놀이하는 듯한 기분도 좋았지만 밤이 이슥하도록 화롯불 옆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즐거움이 그만이었다. 아울러 불향이 밴 고기까지 먹으니 캠핑의 진수를 맛 본 것 같았다. 내가 불을 지핀 날이 있다. 대중없이 던져 넣었더니 불길은 날름거리며 서너 시간 만에 장작 한 꾸러미를 삼켜 버렸다. 나무가 그렇게 빨리 타는 줄 알지 못했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그 많은 땔감을 어떻게 구했을까.

나를 낳고 일주일 되던 날에도 어머니는 나무하러 갔다고 한다. 고등어잡이 배를 탔던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나는 가끔 아이를 키우는 내 일상에 어머니를 비추어 본다. 외롭게 해산하던 날의 쓸쓸한 마당과 집안일 농사일에 하루가 빠듯했던 나날들이 겹쳐진다. 주어진 일이 형벌인 듯 당신의 의지로는 끝낼 수 없었던 삶이었다. 하지만 땔감을 구하던 모습은 떠올리지 못한다. 지금의 생활과 동떨어져 아득하고 그 시절엔 누구나 그렇게 살았던 것이라고 흘려버린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엔 내 속을 흐르는 강이 너무 얕다고 자책한다.

불길을 따라 옛집 부엌에 들어선다. 겨울 저녁, 비가 내리고 있다. 눅눅해진 솔가리를 잡히는 대로 아궁이에 집어넣고 후우후우 불며 불을 살리고 있는 어머니. 연기에 기침을 해댄다. 궂은일에 가꾸지 못한 손등은 갈라져 있다. 비 오는 날은 더 빨리 추워지는 법이어서 마음이 바쁘다. 급하게 차려낸 늦은 밥상에 어린 삼남매와 어머니가 둘러앉는다. 찬밥 한 덩이에 목이 멘다. 저녁이 내려앉은 얼굴은 아침의 어머니보다 더 늙어 보인다.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것은 잠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루가 사그라지는 의식에 가깝다. 내일이면 다시 불씨를 살려야 한다.

언제나 땔감은 어머니 몫이었다. 삭정이나 팔뚝 굵기의 나무를 모아서 이고 왔다. 굵은 것은 못하니 산에 자주 가야 했다. 해 온 나무는 마당에 풀어놓고 손도끼로 자른다. 이 또한 어머니 일이다. 바싹 마른 솔가리는 갈퀴로 긁어 지게에 져 날랐다. 싹싹 긁는 소리가 재미있어 나도 해 본 적이 있다. 갈퀴를 만져보지 못하는 날에는 고사리손으로 한 움큼 쥐다가 솔잎 끝에 찔리기도 했다. 솔가리는 불쏘시개로 썼는데 화르르 타고는 금세 사라졌다. 나무하는 것은 고되지만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다녀가신 날에야 어머니는 땔감 걱정을 잠시 접어둔다.

어머니는 나무하러 갈 때 나를 데리고 다녔다. 내가 따라 다니기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가자고 했던 적이 많다. 저녁답에 서둘러 한 짐 이고 올 때는 컴컴해지는 산이 무서웠다. 어슴푸레한 나무 그림자에 놀라 운 적도 있다. 어머니도 무서워했는지는 모르겠다. 일찍 결혼한 어머니는 내가 한참 클 때까지 이십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냥 어리고 예쁠 나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느라 한 번도 그 나이로 살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니 울컥 가슴 안이 뜨거워진다.

바닷바람이 무시로 불어오는 언덕 위에 살았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과 돌담이 둘러쳐진 위태로운 집이었다. 바람이 거세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파도에 쓸리는 몽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창호지를 바른 방문은 허술했으며 외풍이 심해 코가 시렸다. 그런데도 방바닥은 뜨끈했고 늘 따뜻한 물에 씻었다. 시금치를 데친 물에 세수하고 군불 넣을 때 끓인 물로 차례차례 목욕을 했다. 불길은 밤새 방고래를 지나갔고 부엌은 냇내로 훈기가 돌았다.

아궁이는 겨우내 타올랐다. 어머니는 밥을 짓고 남은 숯불에 생선을 구워 상에 올렸다. 객지에 있는 아버지의 고봉밥은 아랫목에 묻어 두었다. 부엌 한편에는 자식들 입에 들어갈 끼니만큼 땔감이 쌓인다. 밤새 방을 덥힐 온기도 쟁여 놓는다. 어머니는 하루하루 되살아나는 불씨였고 우리 삼남매의 입은 아궁이였다. 계속 채우고 지피지 않으면 식어버리는 어둠이었다. 그것을 덥히는 일은 힘들고 때로는 무서웠겠으나 어머니는 기어코 불꽃을 피워냈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일이 어머니 삶의 전부였던 까닭이다.

저녁 아궁이를 떠올리면 어린 시절의 맛이 따라온다. 밥을 지을 때 부뚜막에 앉아서 먹는 콩이나 누룽지는 고소했다. 아버지의 자반고등어도 숯불에 구워 먹으면 달았다. 어쩌다 아버지를 만나는 꿈은 인동 꽃향기처럼 달콤했다. 밤에는 순수한 군불만이 남는다. 어머니는 새벽에도 불씨를 다스려 어린 자식들의 잠을 빈틈없이 다독였다. 어머니가 지핀 불은 자식을 향한 사랑이 되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 피어났다. 그것은 내 유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숯불이 마지막 말을 하는 듯 느리게 깜빡인다. 두근거림이 잦아들면 생을 다할 것이다. 몸을 푼 지 얼마 안 되어 산에 올랐을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어머니도 어려서 모든 것이 서툴고 힘겨웠음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닫는다. 철없었던 나의 이십대와 누군가의 목숨을 짊어진 어머니의 그때를 생각한다. 겨울이면 피가 났던 어머니의 손등과 따뜻했던 아랫목, 그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새긴다.

오래 전 어머니의 아궁이는 사그라졌지만 내 안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다. 넘겨받은 그 불씨를 감싸 안는다. 나는 지금 누구의 아랫목에 불꽃을 피우려 하는가.

 

△1978년 거제 출생 △경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수상소감]​

종일 흐리다 기어이 비가 내리던 날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전화기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습니다.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다가도 멍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작품을 보냈으나 덜컥 당선되고 보니 부담감에 걱정이 앞섭니다. 영광의 순간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수필을 배우면서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은 푸근함을 느꼈습니다. 삶에 지치고 조급했던 저에게 수필은 여유를 가지라고, 모든 삶에 의미가 있다고 다독여주었습니다. 다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손 놓아 버린 시간을 자책하고 있을 때 수필은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더 작은 것과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겨울비가 내렸으니 숲 바닥이 조금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지난 가을 내려앉은 망개잎과 으름나무 열매껍질이 부숙 될 시간입니다. 구멍이 생긴 자리에 곰팡이가 피고 푹 삭아서 한 덩어리로 뒤섞일 것입니다. 이전의 흔적은 모두 문드러져 흙과 함께 숨 쉬는 법을 익히게 될 것입니다. 바닥에 내려앉은 것들이 그보다 낮은 것들을 먹여 살리고 땅속 깊이 스며들면 이른 봄 메마른 산 끝자락에 연분홍 진달래꽃 한 송이가 피어날 것입니다. 저에게 봄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동안 제 삶도 곰삭기를 고대해 봅니다. 언 땅을 뚫고 나올 연한 목숨의 뿌리에 닿고 싶습니다. 어디서도 당당할 수 있도록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첫 독자가 되어주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부족한 글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고 따끔한 충고도 더해주시는 수필반 선생님과 영광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허점이 많은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항상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응모자 중에서 ‘아, 이것이 문학수필이구나!’ 말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한 작품 한 작품 살폈다. 수필 장르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쓴 작품이 나타나, 당선작을 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수필은 ‘사실대로 진솔하게 쓰는 글’이라고 믿고 있다. 현대문학 이론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실만을 기록한 것은 문학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된다. 문학은 생각과 느낌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인 까닭이다. 문학이 상상의 힘을 빌린다는 말은 ‘허구화’와 같은 뜻으로 이해해도 좋다. 상상과 허구는 손바닥의 앞뒤처럼 한 몸이기 때문이다. 현대수필은 문학수필이어야 한다. 찰스 램적 수필을 쓰자는 말이다. 그 대표적 작법은 ‘삶의 이야기에 빗대는 비유적 작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심에 올라온 네 분의 작품 중에 제은숙 님의 ‘불씨’보였다. 이 분의 작품 중에는 ‘경계’도 있었으나 주제를 잘 살려낸 ‘불씨’를 제1회 당선작으로 뽑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 그 불씨를 잘 살려 수필산문의 창작적 변화에 불을 댕길 것을 기대한다. 문학수필(문학에세이)의 시대를 여는데 신춘문예 골드 문학상으로 앞장선 전남매일에 감사드리며, 당선자에게는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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