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 / 김 종 희(농민신문신춘문예당선작)
할 수 없는 것을 혹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굳이 해 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 안 되는 것을 했을 때의 묘한 후련함 같은 것, 그것은 일순간 삶의 긴장을 풀어버리면서 나름대로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누군가 그 이유를 굳이 따져 묻는다면 아직 철없는 구석이 많기 때문이라 말하련다. 금기된 것을 깰 때의 기분, 어쩌면 그런 돌출성의 행동이 내 삶의 또 다른 자양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먹을 게 많았던 다락방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어쩌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 어머니가 내어오는 다락 속의 먹을거리를 맛보면서 묘한 웃음을 흘렸던 기억은 늘 새롭게 와 닿는다. 다락은 쉽게 오를 수 없는 공간이었기에 높은 위치만큼이나 호기심도 컸다. 내게 있어 다락방은 신화의 세계였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이 그 속에 무한정 들어있었다. 현실적 존재인 내게 다락방은 이상향이었던 셈이다.
쉬이 열 수 없는 다락문, 쉬이 열리지 않는 다락문을 보면서 날마다 그곳으로의 사다리를 놓는 꿈을 꾸기도 했다. 다락으로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찾는 일은 사다리를 오르는 일보다 더 신나는 일이다. 여행을 가는 것보다 가기까지의 기다림이 더 즐겁듯 집 모퉁이를 돌아 그것을 가지러 갈 때면 가슴이 먼저 알고 뛰기 시작했다. 다락에서 무언가를 꺼내 먹는 일은 단지 행위로써 끝나는 게 아니었다. 어른들이 안 계신 집안에서의 은밀한 행위, 다락방으로 사다리를 놓는 일은 경직된 유교 사회 속에서의 또 다른 일탈을 의미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쉬이 돌아올 수 있는 적당한 거리였기에 그것은 또 다른 일상이었던 것이다.
날이 새면 사랑방으로 모여드는 종조부들. 발소리, 웃음소리마저 조심스러웠던 어린 시절. 어른들로 벽이 되어 있던 숨 막힌 정적이 정말 싫었다. 그런 까닭으로 내게 있어 고향이란 늘 감옥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내 의지대로 이동을 할 수 없었던 시절,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의지에 따라 공간 이동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게다.
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을 오르면서 어쩌면 어른이 되는 꿈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어떤 해방감을 가졌을 것이다. 다락방에 오른다는 것은 수평적인 삶에서의 수직상승이요 그것은 공간의 이동이다.
직립 보행을 하면서 인간은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문명의 발달을 가져왔다. 어쩌면 높은 곳을 보면서 사람은 꿈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꿈이 있다는 것, 그것은 삶에 대한 도전이요 자기 정체로부터 극복하는 길이다. 꿈을 찾아 길을 떠나면서 인간은 더 넓은 곳으로의 진출을 해왔을 것이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마을을 이루고 그 속에 공동체의 삶을 열어갔을 게다. 그러고보면 사다리를 오른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와 더불어 사물에 대한 인식을 주었으며 그 속에 나름의 지평을 열어가면서 존재자로서의 나의 획을 긋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다리를 오르는 일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붕에 올라 더 넓은 세상을 보았듯이, 다락방에 호기심을 가졌듯이 그건 새로운 세계로의 호기심이며 또한 능동적인 행동이다. 사다리를 오르는 일은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감이다. 그건 정체가 아니라 흐르는 일이다. 현재의 위치를 벗어나 좀 더 나은 위치로의 이동을 하는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을 몰래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모험이다. 주어진 길을 가기보다는 가보지 못했던 길을 가면서 느끼는 긴장감, 삶에서의 긴장감이란 곧 에너지가 아닌가. 사다리를 오른다는 것은 모험을 통해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니 신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관념으로부터의 탈피, 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 / 김 종 희
<고인돌의 루트>를 따라 삶과 문화의 족적을 좇아가는 프로그램을 본다. 야산에 흩어진 돌의 군락을 고인돌로 밝혀내고 민족과 문화의 이동을 풀어가는 내용이다. 돌 하나에 우주를 담고, 그 속에 암호 같은 흔적을 해석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내 감성도 비늘처럼 일어선다. 이성에 의해 질서화 되지 않는 감성으로 마음이 울렁거린다. 마치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곳을 탐험하는 사람처럼, 그럴 때 내게도 어떠한 소명의식이 생기는 것 같다. 아니 대상의 형태를 자유롭게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상상으로 정신의 절대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어 좋다.
돌의 원형 속에 숨겨진 역사적 의의, 그 속에는 체험이라는 시간이 있다. 먼 옛날 주검이 묻힌 곳이 오늘 비록 폐허가 되었을지라도 그 체험 속에 존재하는 원형은 끝없이 흐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삶에 있어서 영원성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죽음은 주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고인돌은 갑골문자를 쏟아 놓는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흔적은 회한의 장소가 아니라 상상력의 공간이다. 상상력은 단순한 돌에도 영원성이라는 생명을 불어넣는다.
학교를 오가는 산길에 돌탑이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하나씩 던져둔 돌이 만든 오름 형상의 탑이다. 처음부터 탑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 때는 돌무더기가 무덤처럼 보였다. 무덤이라는 말 때문에 일부러 먼 길을 돌아다닌 적도 있다. 그러나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돌무더기가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을 담아내면서 마침내 돌탑이 된 것이다. 돌이 영원한 것은 자연적 수명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사연 때문이다. 비록 예술적 완성도는 없을지라도 무심한 돌탑이 아름다운 것은 돌에 얽힌 전설이 기억에서 기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탑돌이를 하면서 소원을 비는 것은 아마도 그런 영원성에 대한 바람은 아닐까.
기억에서 기억으로 흐르는 영원성, 그 결과 폐허로 보였던 돌의 군락지는 역사로 환원된다. 나아가 그 속에 끝없는 심미적 만남을 추구할 때 돌은 비로소 탑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숱한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긴 세월에 이겨져 탑신에는 이끼도 앉는다. 이끼, 그것은 돌탑의 진물이다. 진물이란 외부의 어떤 것이 육화된 것이 아닌가. 그런 까닭으로 이끼는 돌탑의 언어이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이끼가 앉았다. 사람들은 이끼 같은 검버섯을 저승꽃이라고 부른다. 저승꽃이라 부를 때 검버섯은 삶의 외곽으로 밀려난 느낌을 준다. 저승꽃이라는 말 속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정경들이 사라진 우울한 냄새가 배여 있다. 그것은 자꾸만 허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저승꽃을 돌탑에 앉은 이끼 같은 것이라고 주문을 걸어 본다. 이끼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시간의 퇴적위에 움 터는 생동이기 때문이다.
숱한 시간에 곰삭은 결, 대상과 육화됨으로써 감동을 주는 돌탑처럼 어머니도 이제 탑이 되었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