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처는 웃으면서도 운다. 발도장 / 황 미 연
바람이 분다. 나무는 이때다 싶어서 거대한 몸을 살짝 비틀어 잎을 떨구어 버린다. 잎은 또 다른 봄을 기약하며 자기가 내려앉고 싶은 곳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다. 가지가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니 나무는 그래도 시원섭섭한가 보다.
큰 맘먹고 가위를 들었다. 고무나무가 키만 삐죽하게 자라는 것 같아서 품을 넓혀 보려는 생각이다. 가만히 두어도 알아서 애지를 뻗어나갈 텐데 괜한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오른 양쪽 가지를 과감하게 자른 후 그곳을 랩으로 꽁꽁 싸맸다. 감싸 놓은 가지 안에 하얀 진액이 흥건하다. 그 모습이 아이들 젖 뗄 무렵의 내 가슴을 불러들인다.
녀석이 백일이 지나자마자 모유 수유를 끊었다. 타고난 뱃구레를 양껏 채워줄 수 없었다. 젖을 떼기로 작심하고 기저귀로 가슴을 동여맸다. 녀석이 내 가슴을 헤집으며 달려들었다가 흰 장벽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젖몸살을 앓으면서도 애써 담담한 척, 녀석의 눈동자에 가서 눈부처로 앉았다. 녀석이 배가 고팠던지 단숨에 우유 한통을 비웠다. 기저귀로 동여맨 곳도 젖이 삭아서 빈 가슴이 되었다. 고 어린것이 백일 동안의 아늑했던 풍경 속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어찌 알았을까. 흘린 젖을 닦아주던 손수건을 품은 채 잠든 모습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꼭 끌어안아 봐도 애잡짤한 마음만 더할 뿐, 이젠 한 품이 될 수 없다. 절집 부처는 웃기만 하는데 눈부처는 웃으면서도 운다.
자른 가지를 물에 꽂아두었다. 주위를 검은색 가림막으로 에둘렀다가 다시 걷어내고 볕바른 자리로 옮겼다. 드디어 물속으로 뿌리를 내렸다. 마치 아기 젖니처럼 하얀 게 쏙 나와 있다. 아픔을 잘 견뎌낸 게 기특하고 고마워서 틈만 나면 바투 앉아 톺아본다. 큼지막한 화분을 장만하여 부엽토와 마사토를 골고루 섞어 넣고선 그곳으로 이사시켜 줄 적당한 시기를 기다린다.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며 하나씩 자리매김할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녀석이 직장을 구하더니 원룸을 얻어 나가겠다고 선포한다. 일찌감치 독립을 하겠다는데 손사래를 칠 생각은 없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가겠다며 벽을 두드릴 때 얼른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는 게 내 몫이다. 문설주에 기대어 서서 짐을 꾸리고 있는 녀석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릴 때 엄마와 만 밤만 같이 자고 싶다던 녀석이다. 숫자를 모르던 나이였기에 그 만 밤은 ‘셀 수 없이 많이’라는 무한정의 말이었을 테다. 까마득하던 그날이 오늘인가, 번놓고 있던 그 밤이 눈앞에 펼쳐졌다. 듬직한 산처럼 여겨지는 녀석의 등에서 푸릇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내 몸을 뚫고 지나간다.
뿌리내린 가지를 화분에 옮긴 지 여러 날이 지났다. 봄날에 들이닥친 때아닌 눈보라도 거뜬하게 이겨내고 보란 듯이 연둣빛 잎눈을 내밀었다. 아기 손바닥만 한 이파리에 군데군데 갈색 점이 박혀있는 것을 보니 몸살을 된통 앓았던 모양이다. 홀로서기에 어찌 아픔이 없을까마는, 나절로 해냈다는 자신감의 표시 같은데도 먹먹함을 안겨준다. 열대지역에 살던 고무나무의 먼먼 조상들은 사람들이 하얀 진액을 받아가기 위해 칼로 아로새긴 Y자 모양의 상처를 하나씩 안고 살았다. 그들의 후손답게 이만한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파리가 두툼해지면서 초록이 짙어간다.
녀석의 발길이 뜸해졌다. 자리를 잡았다는 뜻일 게다. 주말마다 오던 걸음 대신 믿음직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넘나든다.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트리고 날개로 받아가며 강하게 키우는 어미 독수리는 아니었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누구에게든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지지자는 부모의 믿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색깔일지, 어떤 향기가 날지, 한 걸음씩 나아가며 세상을 환하게 꽃 피울 청춘을 응원할 것이다.
이제 한 공간에서 나와 함께 사는 일은 더 없을 테다. 대문 밖이 천리라는 말이 옛말만은 아닌 듯하다.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에서 까치 소리가 들려오기만 해도 괜스레 노인처럼 들떠서 혼잣말을 내뱉는다. 몸이 분주해진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까만 자동차만 봐도 화색이 돈다. 훔훔한 눈부처로 앉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언젠가 녀석도 부모라는 이름을 가슴에 달게 될 것이다. 자식 일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에도 즐거움을 느끼며 밍근해지기도 하는 어미의 마음을 그때는 조금이라도 알게 되려나.
바람이 분다. 풍경 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경쾌하다.
발 도장 / 황미연
무심코 보던 책 속의 한 문장이나, 영화 속의 한 장면이 가슴에 와닿을 때가 있다. 종일 그 생각에 발목이 흥건해질 때가 있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이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여든네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적이다. 시간의 두께가 내려앉은 늙고 앙상한 손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자 맑은 소리가 공중으로 피어오른다. 입으로 뭔가를 주억거리는 표정이며 몸짓, 피아노 건반 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주름진 손은 참으로 아름답다.
보헤미안 출신인 그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여 열두 살에 독주를 할 만큼 천재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여든여덟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음악에 헌신한 순순한 영혼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노년의 모습에서 음악과 삶에 대한 애착이 느껴져 뭉클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가장 멋지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연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니 편안하면서도 감미로웠다. 그때 내 안에서 무언가 뜨겁게 솟구쳐 올라와 가슴을 흔들어댔다.
수업 도중이었다. 교실 뒷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누군가 불쑥 내 이름을 불렀다. 누가 먼저랄 젓도 없이 반 아이들은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친구 아버지처럼 젊지도 않은, 초로의 내 아버지였다. 검은 우산을 당신의 허리춤에 붙이고 엉거주춤 서서 커다란 눈으로 교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아버지의 우산 속으로 와르르 모여들었다. 나는 벌게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 촘촘한 웃음소리를 비집고 들어가 검은 우산만 낚아채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로 아버지의 초라한 몸을 접고 또 접었다.
교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머릿속은 온통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태연한 척 애를 쓰면서도 창밖으로 곁눈질했다. 운동장으로 걸어 나가는 아버지의 머리 위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젖은 바짓가랑이가 야윈 다리에 착 달라붙어서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았다. 비바람에 다리가 휘청거리자 나도 모르게 손이 움찔했다. 씁쓸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걷는데도 물웅덩이만 골라 내딛는 걸음처럼 첨벙거렸다. 심장이 뛰었다.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내 모습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쏟아지는 빗발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느린 걸음으로 운동장에 꾹, 꾹 발 도장만 남긴 채 사라지셨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오후 내내 아버지의 등에서 머물렀다. 한문 숙제, 일본어 숙제가 버거워 끙끙대면 밤잠을 주무시지 않고 도와줄 때는 최고라고 해놓고, 늙은 모습이 초라하다고 외면했다. 응석받이로 자라 자신밖에 모르는 내게 빗줄기가 세차게 들이쳤다. 아버지가 어떤 얼굴을 하셨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시면서 교실 밖으로 나가셨을 것이다.
제르킨은 자신이 피아니스트이기는 하지만, 피아노는 음악 자체에 비하면 내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고 했다. 절정에 이르러 감정을 밖으로 폭발하는 대신 내면에서 스스로 정화시키는 것은 지혜로운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했던가. 그때 얼굴을 들어 눈이라도 마주쳤더라면 아버지의 우산 속엔 꽃등이 환하게 켜졌을 것이다. 빗방울이 둥그렇게 퍼지는 날 여기저기 아버지의 발 도장이 찍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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