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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대는 호수 / 오 승 휴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2. 7. 25.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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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틀대는 호수 / 오 승 휴

 

물안개가 자욱하다. 낙천지폭포의 물소리 타고 살랑살랑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장난치듯 얼굴을 간질이며 스쳐 지난다.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인데, 호숫가를 걷는 발길에는 벌써 흩어진 낙엽들이 바스락거린다.

이 호수는 산중의 우물을 닮았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산정호수(山井湖水)다. 계곡물이 산줄기 따라 사방에서 이곳으로 흘러든다. 산봉우리에서 보면 산중턱의 넓은 호수가 계곡주변의 비경과 어우러져 반짝반짝 찬란한 빛을 발한다. 경기도 포천의 이 산정호수를 왜 ‘산골짜기의 보석’이라 일컫는지 알만하다.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풍광의 빼어남이 전국적으로 손꼽힐 만큼 으뜸이다. 더구나 북쪽에는 이곳 관광지의 이름을 떨치게 한 명성산(鳴聲山)도 있잖은가. 궁예의 일생과 그 최후를 슬퍼하며 산새들이 울었다 해서 ‘울음산’이라고도 불리는 전설의 산이다. 여기에 얽힌 궁예 이야기가 담긴 조각그림의 둘레길 안내판을 보노라니 같은 핏줄의 배달민족이어서인지 가슴이 뭉클해온다. 천여 년 전 태봉국의 역사가 이곳에 여태껏 남아있는 게 놀랍다.

왕족인 궁예가 태어나던 날 궁궐지붕 위로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웠다.​ 이런 일로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서 모함에 빠져 그는 생명을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시녀의 도움으로 도망쳐 나와 산속에 숨어 살다가,​ 어른이 된 후에야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궁예는 학문과 무예를 익히기 위해 절로 떠났다.

훗날​ 그가 왕이 되었으나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며 사치와 방탕을 일삼아 백성들을 고통과 불안으로 내몰았다. 백성 없는 나라가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 민심을 잃은 궁예는 고려 왕건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명성산에서 결사항전하다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왕좌에 올랐음에도 형편없이 타락해 버려 비참한 생애를 마감한​ 인간 궁예. 망국의 한을 품은 그의 뒤늦은 후회와 통곡소리는 산천을 울리고, 통한의 눈물은 계곡물처럼 흘러내렸을 거야.

“산정호수에 오길 참 잘했어!”

호숫가 둘레길을 함께 걷는 팔순(八旬) 고개를 넘은 선배가 보란 듯이 손을 흔들며 호수의 풍경에 찬탄의 소리를 쏟아낸다. 둘이서 걷다말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계곡의 단풍물결에 눈길이 멈춘다. 단풍은 스러지는 생명들이 뿜어내는 희생과 비움의 아름다움을 지녔다지 않는가. 깊어가는 가을, 나뭇잎이 떠날 마음을 준비하는 시기다. 단풍은 다가오는 겨울추위를 견뎌내기 위한 나무들의 자기희생의 표출이라 한다. 물위에 떨어진 단풍잎이 너울너울 곱살스럽다. 물그림자로 비친 선배의 자태도 단풍처럼 멋스러워 보인다.

선배와 내가 인연을 맺은 지는 꽤 오래다. 학창시절 내 자취방 주인댁 아드님이 지금은 나의 멘토인 셈이다. 마음 따뜻한 선배를 만난 건 큰 행운이지 싶다. 열다섯 살이나 아래인 나를 그때부터 동생이나 아들처럼 살갑게 대해주고 있다.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지리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그분이 다니는 직장에 나도 입사하게 되어 인연이 더 돈독해진 거였다. 퇴직 후에도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을 돕는데 앞장서는, 지역사회지도자로서 활동하는 선배가 존경스럽다. 희생과 비움의 표상이랄까. 요즘도 서로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다.

“뒤를 돌아보고, 주위도 잘 살펴보아라.”

이 말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들어서야 갖게 된 그 선배의 좌우명이란다. 물론 깊은 뜻과 사연이 있을 터다. 인생길 가는데 자신만의 좌우명이 있어야 한다고 선배는 오늘따라 강조한다. 호수에 드리운 물그림자를 구경하며 그 의미를 내 나름대로 곱씹어 보고 있다.

안개가 활짝 걷히고 햇살이 비치자 늦가을 풍광이 호수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이거야 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다. 물오리들이 한가로이 물위에 떠돌며 노는 모습이 더해져 물그림자가 한 폭의 그림인양 볼만하다.

가을바람에 호수가 꿈틀거린다. 물그림자 속에 머리 희끗희끗한 내 모습이 보인다. 세상은 나의 거울이라고 했듯이, 호수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요 또한 나의 거울이라는 느낌이다. 내가 앞으로 내달리니 물그림자가 쫓아오고, 멈춰 서니 물그림자도 멈춰 선다. 호수 거울에 비친 모양새가 나이 들어 보여도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다. 저 멀리 물위에서 다정하게 놀던 물오리 두 마리가 나그네에게 말을 건네려는 듯이 가까이 다가온다. 녀석들도 선후배 관계일까. 일상의 삶에 얽매였던 나의 가슴으로 여유와 평온이 시나브로 스며든다.

산정호수는 연간 15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국민관광지다. 나라에서는 어째서 이 호숫가에 궁예이야기 길을 만들어 두었는지를, 선배는 어째서 ‘여기 오길 참 잘했다’며 이곳에서 자신의 좌우명을 부각시켰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하루다.

꿈틀대는 호수의 침묵의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올바른 길을 가야 세상이 따라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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