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밟다 / 장 미 숙(제3회경북일보문예대전금상)
나무가 흔들리는 걸 보니 바람이 일어서는 모양이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바람은 어느새 ‘어름사니’* 주위에서 맴돌고 있다. 그녀와 힘겨루기를 하는지 잠시 주춤하던 바람은 어름사니의 손에 잡혀버린 듯 이내 잠잠하다. 바람을 휘어잡은 그녀의 두 팔이 허공虛空을 자유롭게 노닌다. 발밑에 밧줄이 휘청, 흔들릴 때마다 어름사니의 몸도 휘청, 허공을 붙잡는다. 부채를 든 오른손이 리듬을 타면, 그녀는 허공의 등을 밟고 우뚝 선다. 사붓사붓 밧줄에 놓는 발걸음은 땅 위에서보다 더 가벼워 보인다.
관객들은 아찔한 상황을 애써 지우려는 듯, 힘차게 박수를 보낸다. 어름사니가 밧줄 위에서 훌쩍훌쩍 뛰어오를 때마다 관객들의 가슴은 들렁들렁한다. 매호 씨’** 와 주고받는 재담으로 흥을 북돋우는 그녀의 솜씨에 관객들의 탄성도 커진다.
어름사니는 밧줄을 밟고 있는 게 아니라, 밧줄을 잡은 듯 자유로운 몸짓으로 줄을 탄다. 두둥실 떠 있는 구름처럼 그녀는 허공에 길을 낸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길을 내는 어름사니의 몸짓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서려 있다.
바람처럼 가벼워지기까지 그녀가 떨쳐낸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바람보다 더 가벼워져야 탈 수 있는 외줄 위에서 그녀는 온몸의 기를 다 쏟아냈을 것이다. 외줄은 그녀를 꽁꽁 묶어버린 또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을지…. 그녀의 모습 위로 외줄보다 더 위태로운 삶의 외줄에 선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언젠가 친정어머니는 막걸리 서너 잔에 흥타령을 풀어놓으시며 평생을 외줄 타는 심정으로 살아왔노라 하셨다. 긴 한숨을 내쉬던 어머니에게서는 꽁꽁 묶어두었든 바람 소리가 났다. 오십여 년 동안 어머니를 외줄 위에 세워놓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아버지의 병은 가족의 희망까지도 앗아가 버렸다. 자비라고는 없던 병은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의 정신을 훔쳐갔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당시 어머니가 편히 주무시는 걸 볼 수 없었을 만큼 어머니의 삶은 위태로워 보였다. 암담한 현실의 중심에 선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였다.
얼음사니가 합죽선合竹扇으로 평행을 유지하듯, 흔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잡아준 건, 자식들의 맑은 눈빛이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외줄에 올라서야 했다. 여유나 편안함 따윈 허락되지 않던 모진 세월이었다.
불안함과 초조가 달려들 때면 억지로라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꺼이꺼이 울지 못해 부르는 노래는 바람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허공을 떠돌았다. 지친 육체에 매달린 고단함을 떨쳐내기 위해 어깨를 들썩거릴 때, 어머니의 두 팔을 잡아준 건 비빌 곳 없는 빈 허공이었다.
추락하면 할수록 길은 더 멀어진다. 그건 추락해 본 사람들만이 아는 생의 진실이다. 안정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의 외곽을 맴돌다 지쳐버린 어머니는 외줄을 잘라버리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고 휘청거리는 삶에서 내려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외줄에서 곧게 서는 걸 포기하지 않으셨다. 가망 없는 날들을 악착같이 견디고 외줄에서 바로 서는 법을 온몸으로 터득했다. 바람을 잡아 오히려 바람을 이용할 줄 알게 되기까지 위태로웠던 순간들은 이제 저만큼 비켜서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외줄에서 내려오신 어머니는 지난날들의 고단했던 삶을 안주 삼아 막걸릿잔을 들곤 하신다.
어느덧 외줄 타기도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어름사니는 위태한 순간을 재치 있게 넘어가며 재주를 부린다. 허공을 디뎌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여유 앞에서 바람은 그녀에게 길을 만들어 주고 있다. 앞으로 가기, 장단 줄, 거미줄 느리기, 콩 심기. 허궁잽이까지 그녀는 산드러진 몸짓과 재담才談으로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한다. 오히려 그녀의 몸짓에 가슴을 졸이는 건 관객들이다.
환호하며 손뼉을 치는가 하면 그녀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두 손을 꼭 잡고 긴장을 감추지 못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고 외줄을 바라보는 모습도 다르다.
어쩌면 그들 또한 자신이 올라타고 있는 삶의 외줄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외줄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고단한 삶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줄을 타고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이는 튼튼하고 안전한 줄 위에 서 있고, 어떤 이는 아슬아슬하고 불안정한 줄 위에 서 있다.
나는 지금 어떤 외줄 위에 서 있을까. 사십여 년의 지난날들이 빠르게 스쳐 간다. 아버지로 인해 어린 시절 나 또한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두려웠고 어머니가 안쓰러워 애어른이 되어버린 내게 동화 같은 어린 시절은 없었다. 집이라는 곳은 편안한 안식과 행복을 노래하는 곳이 아닌, 절망과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곳이었다.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허술한 토대 위에서 움츠러들었다. 감당하기 힘든 상처는 무의식 속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수없이 재생되었다. 아버지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Trauma는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꿈속에서 재현되는 악몽은 날 외줄 위에 올려놓곤 한다.
불안하고 초조한 날들은 아버지를 벗어난 뒤로도 이어졌다. 어쩌면 운명 속에 갇혀버린 비겁한 본성이 스스로 흔들리는 외줄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불가항력처럼 느껴져 좌절감만 맛보던 못난 시절이 있었다.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피하려고만 하다 보니 결국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인생의 주체는 나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 오랫동안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체가 없으니 줄 위에서 휘청휘청 흔들리는 대로 끌려갔다. 그러다 추락의 위기를 맛보기도 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줄을 잡기도 했다.
뒤돌아보면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 삶의 외줄에 옹두리처럼 남아 있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건너온 길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한다. 하지만 발에 굳은살이 생기고 손도 단단해지면서 이제는 외줄 위에서 마냥 휘청대지는 않는다. 고통과 싸우며 터득한 겨자씨만 한 지혜가 삶의 중심을 잡아줬기 때문이다. 외줄은 내게 뚝기를 만들어준 셈이다.
욕심도, 두려움도, 상처도 하나둘씩 내려놓다 보면 나도 저 어름사니처럼 가벼워질까. 바람만이 위세를 떨치는 허공에 그녀가 낸 길이 선명하다. 어느새 어름사니는 모든 공연을 끝내고 밝은 웃음을 가득 머금고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외줄을 벗어난 그녀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어름사니 - 남사당패에서 줄을 타는 줄꾼. 어름사니는 합죽선을 모아 쥐고 허공잡이를 한다.
**매호씨- 남사당놀이를 하는 뜬쇠들과 재담을 주고받는 어릿광대.
[작품 평설] 진통과 고뇌의 형상화
제3회 「경북일보」 문예대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장미숙의 수필 <허공을 밟다>는 ‘어름사니’가 밧줄 위에서 훌쩍훌쩍 뛰어오를 때마다 관객들의 가슴은 들렁들렁하는 시각적 장면에서부터 열린다. 여기 ‘어름사니’는 남사당패에서 줄을 타는 줄꾼이다. “바람을 휘어잡은 그녀의 두 팔이 허공虛空을 자유롭게 노닌다. 발밑에 밧줄이 휘청, 흔들릴 때마다 어름사니의 몸도 휘청, 허공을 붙잡는다. 부채를 든 오른손이 리듬을 타면, 그녀는 허공의 등을 밟고 우뚝 선다. 사붓사붓 밧줄에 놓는 발걸음은 땅 위에서보다 더 가벼워 보인다.”라는 서두의 언술이 이 수필의 전편을 휘감고 있다. 독자는 마치 현장에 있듯, 시각화한 이 묘사적 장면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배우와 관객의 일체감이 소통과 교감을 고조시킨다.
합죽선을 모아 쥐고 허공잡이를 하는 줄꾼 어름사니를 보고 있노라면 그 아슬아슬한 묘기에 감탄하면서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화자는 이를 가슴이 ‘들렁들렁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뜬쇠인 매호씨와 주고받는 재담이 흥을 돋우기도 하지만, “관객들은 아찔한 상황을 애써 지우려는 듯” 힘차게 박수를 보낸다. 들뜬 분위기, 환호의 박수만이 아니다. “어름사니의 몸짓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서려 있다.”고 했다. 이렇게 상반된 정조情調가 이 수필을 가볍지만 무겁게 짓누른다. 어름사니의 삶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어름사니는 밧줄을 밟고 있는 게 아니라, 밧줄을 잡은 듯 자유로운 몸짓으로 줄을 탄다. 두둥실 떠 있는 구름처럼 그녀는 허공에 길을 낸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길을 내는 어름사니의 몸짓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서려 있다.
바람처럼 가벼워지기까지 그녀가 떨쳐낸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바람보다 더 가벼워져야 탈 수 있는 외줄 위에서 그녀는 온몸의 기를 다 쏟아냈을 것이다. 외줄은 그녀를 꽁꽁 묶어버린 또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을지…. 그녀의 모습 위로 외줄보다 더 위태로운 삶의 외줄에 선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장미숙의 <허공을 밟다>에서
이 수필의 화자는 작가이건만 작가 자신이 어름사니와 동일시된다. 그의 줄타기를 보면서 흡사 자신이 그 줄을 타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아니, 화자의 내적 감각에는 줄을 타고 있는 심정으로 동화되어 있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 시각의 관찰이 아닌 어름사니에게 작가 자신을 투영한 일체감과 통찰이 이 수필의 입체화에 기여하고 있다.
문제는 작가의 내면의식 안에 어름사니의 삶의 무게감이 실려 있다는 데 있다. “외줄은 그녀를 꽁꽁 묶어버린 또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을지…. 그녀의 모습 위로 외줄보다 더 위태로운 삶의 외줄에 선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라는 대목에 이르면, 화자로 하여금 그가 이 수필을 창작할 수밖에 없는 필요충분한 함의를 느끼게 한다. 그래 “외줄에 선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라는 언술의 배면을 읽게 한다. 외줄을 타고 있는 친정어머니다.
[①십여 년 동안 어머니를 외줄 위에 세워놓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②아버지의 병은 가족의 희망까지도 앗아가 버렸다. ③어름사니가 합죽선合竹扇으로 평행을 유지하듯, 흔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잡아준 건, 자식들의 맑은 눈빛이었다.]→어머니의 두 팔을 잡아준 건 비빌 곳 없는 빈 허공이었다. →어머니는 외줄에서 곧게 서는 걸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외줄에서 내려오신 어머니는 지난날들의 고단했던 삶을 안주 삼아 막걸릿잔을 들곤 하신다.
이는 화자의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어름사니의 삶의 구체화로, 이런 추체험은 양자 사이의 대비를 통한 주제구현을 위한 전개이다. 결미의 자신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일종의 복선의 역할이다.
이쯤에서 화자는 다시금 현장에 시선을 돌린다. 관객의 환호와 박수. 이런 외적인 평면적 진술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고 외줄을 바라보는 모습도 다르다.”라는 입체적 진술은 대상을 통한 삶의 고뇌와 진통을 감지하게 한다. ‘어쩌면 그들 또한 자신이 올라타고 있는 삶의 외줄을 생각할지도 모른다.’라는 이 선언이야말로 어름사니와 관객 그리고 화자의 동심원이다.
“나는 지금 어떤 외줄 위에 서 있을까.”라는 대목이 이를 반증한다. 이는 자아 관조요, 자기 성찰이다. 어름사니와 어머니의 삶을 통한 자기화, 동화는 다름 아닌 자신으로의 귀환, 인간화의 길이겠다.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허술한 토대 위에서 나는 움츠러들었다. 감당하기 힘든 상처는 내 무의식 속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수없이 재생되어 오래도록 내 삶을 지배해 왔다. 아버지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Trauma는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꿈속에서 재현되는 악몽은 날 외줄 위에 올려놓곤 한다.
-장미숙의 <허공을 밟다>에서
이런 자아 각성은 그의 수상소감에서도 잘 나타난다.
굴곡이 많은 삶을 살다 보니 힘에 부칠 때면 가끔 어머니께 푸념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한 끝은 있는 법이란다.” 그럴 때면 저는 “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저만의 대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삶이 아무리 팍팍해도 웃을 날이 있고, 불행의 끝도 있다는 것을요. 발을 디디고 있는 땅도 절망 앞에서는 허공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듯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익숙해지는 게 삶이라 했던가요.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장미숙의 수상소감에서
“삶이 아무리 팍팍해도 웃을 날이 있고, 불행의 끝도 있다는 것을요. 발을 디디고 있는 땅도 절망 앞에서는 허공입니다.”라는 그의 수상소감은 진통과 고뇌의 삶에 대한 적실한 표현이지 싶다.
이렇게 진정한 수필가는 인생과 사물의 진리 추구에 진통하고 고뇌한다. 생각하면서 진통하고, 고뇌하면서 추구한다. 인생의 목적과 의의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또 우주에 관해서 역사에 관해서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면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로부터 존재와 인생 이해에의 개안開眼은 더욱 깊어진다.
장미숙의 수필 <허공을 밟다>는 이렇게 소재와 제재의 참신성 나아가 주제의 참신성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는 작가의 전통과 고뇌, 치열한 삶이 존립하고 있다. “ 욕심도, 두려움도, 상처도 하나둘씩 내려놓다 보면 나도 저 어름사니처럼 가벼워질까. 바람만이 위세를 떨치는 허공에 그녀가 낸 길이 선명하다.”라는 결미의 진술이 건강한 존재 인식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며, 수필로서의 인간화의 길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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