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이여 나의 날개여 / 최 양 자
많이 걸었다. 발바닥이 화끈거린다. 양말을 벗고 무심히 발을 본다.
발은 태어날 때 어둡고 딱딱한 소라처럼 굽은 산도를 제일 나중에 빠져나온다. 나온 즉시 발바닥을 가볍게 자극한다. 아기가 호흡을 하도록 돕는다. 탯줄이 잘리고 엄마와 아기가 완전히 분리된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독립된 자아가 되고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 분만실에서 아기발 도장은 엄마 손 도장과 함께 부모의 자식임을 증명하는 인감이 된다. 그리고 보면 발은 출생 시 인간의 존재를 제일 먼저 문서화하는 부위이기도 하다. 손가락 발가락이 다섯 개라는 것이 훈장이 되어 뽐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발은 엄지발가락 쪽이 야트막한 능처럼 도드라져 있다. 바닥은 살짝 오목한 것이 쪽배처럼 부드러운 곡선이다. 카누를 만든 사람은 어쩌면 발을 보고 만들지 않았을까. 비록 뒤집힌 모양새이긴 하지만, 카누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겊처럼 우리는 신천지를 찾아 발로 인생 노를 저어가야 한다.
발 뒤측은 인체의 풍성한 엉덩이 같다. 발바닥에는 온통 알 수 없는 선들이 하천을 그린 듯 그어져 있다. 손금이 아닌 발금이다. 내가 태어날 때 이 발금을 통해 신은 나에게 무슨 운명을 암시했는지 궁금하다.
걷기를 언제쯤 했는지를 생각하면 반은 연습의 달인, 노려가다. 돌이 가까워지면 한 발 한 발 발짝을 뗄 수 있게 된다. 엉덩방아를 몇 천 번 찧었든 그런 것은 아픔이 아니다. 첫걸음부터 걸을 수 있었다는 경우는 홍길동에게도 통하지 않는다. 수천수만 번 연습으로 연습으로 걸음마를 배운다. 발자국을 떼면서 손잡아 주는 것ㅇ이 그렇게 신나지 않다. 한 발자국 떼고 숨을 가다듬고 또 한 발자국을 스스로 떼었을 때 얻는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이었을까.
40여 년 전 아들아이가 돌 즈음 곡예하듯 걷기에 몰두하던 생각하면 어제 일 같다.하늘은 끝 간데 없이 높고 어미 뱃속에서나 들었음직한 새 소리 같은 바람 소리, 따뜻한 햇살,빨간 패랭이 꽃잎에 앉은 노랑나비, 이런 신기한 바깥세상이고 보면 그 표정은 얼마나 진지한 지. 비록 턱받이에 침을 흘릴망정 눈은 빛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걷는지 뛰는지 방향도 게처럼 옆걸음이다. 혼자 해냈다는 자부심의 표정은 성격배우도 흉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 때부터 온 세상을 향한 날갯짓의 시작이었지 싶다.
발은 성인이 되면 남녀의 차이는 있으나 길이는 대충 25cm 전후다. 넓이는 8센티미터 전후로 손보다 약간 클 뿐이다. 그 크기로 신체 맨 아래 부위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인 듯 무거운 머리와 골반을 떠받치고 있으면서 별 투정 없이 과묵하다. 거기다 인체에 평형을 유지하는 기관으로 왼발, 오른발이 시소처럼 몸의 균형을 잡아주니 걷고 달릴 수 있다. 건강검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평형감각이다. 우리가 살라가는데도 중심을 잘 잡아야 치우치지 않는다. 발의 균형은 곧 세상살이의 균형이기도 하다.
흔히 배꼽이 섹시하다지만 맨발은 더 육감적이다. 결혼 첫날밤 신랑을 매달면서 발바닥을 불나게 때려주는 풍속은 용천혈을 작극하여 생식기관이 튼튼해지라는 바람이었지 싶다.
역사적으로 발은 건강과 용맹의 상징이면서 여성의 심벌이기도 하다. 흠 잡을 데 없는 며느리에게 ‘저년 발꿈치는 계란처럼 생겼다’고 생트집을 부렸다고 한다. 발은 신체에서 생식선과 닿아 있다고 하니 시어머니의 볼품없게 된 발의 거친 모양은 며느리의 젊음에 대한 질투였지 싶다.
걷기 시작하면서 발은 신발에 갇혀 지내니 불만이 있을 법한데 별말이 없다. 가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발바닥에 굳은살이나 티눈을 동원하기는 한다. 발가락 중에서도 새끼발톱이 안쓰러울 때가 있다. 다른 발톱처럼 하나로 되어 있지 않고 비뚜름하게 갈라져 있다. 신체 제일 귀퉁이 자리에서 당하는 고통의 증표라고나 할까? 그런 제 모습이 싫어 가장자리에 숨어 있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봉숭아 물을 들일 때도 엄지발톱이나 대접 받지 새끼발톱까지는 관심이 없다. 툭하면 사람들은 보잘것없음을 표현할 때 ‘새끼발가락의 때만도 못하다.’리거 하는데, 없어도 될 것 같은, 보잘것없는 새끼발가락이 우리가 걷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딸아이가 중학생 때, 발목을 다쳐 정형외과에 잠시 입원한 적이 있었다. 옆 침대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앞둔 처녀가 있었다. 그녀는 발가락을 성형했다고 했다. 새끼발가락이 발밑으로 너무 들어가서 빼내는 수술이었다.
잘 걷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수술이라 했다.
우리는 눈을 뜨면 걷는다. 아니 난다. 날개가 없는 우리 인간은 발로 날 수밖에 없다. 장대높이뛰기 선수 옐레나이신바. 그녀는 발로 하늘을 향해 5미터를 날았다.
발은 살아있음이고, 걷는 즐거움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간접적인 기관이기도 하다.
발을 내려다본다.
그러다 손으로 천천히 마사지한다. 발을 다듬는 것은 내 날개를 정비하는 것과 같다. 부드러워진 발은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언제든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시각적으로 발은 땅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상 속에서는 어쩌면 늘 세상을 날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발은 나의 날개, 갈걸음이 경쾌할수록 나의 날개는 활기에 넘친다.
‘날자꾸나. 나의 발이여. 나의 날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