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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5매수필 (25편)

5매수필

by 장대명화 2022. 4. 10.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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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기도 / 안 도 현

 

새해에는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나라에서 살게 하소서. 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난데없는 불행으로 마음 졸이지 않게 하시고. 가진 게 많아서 신 나는 사람보다는 가진 것만큼으로도 충분히 신 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가 되더라도 ‘대박’의 요행 따위 꿈꾸지 않게 해주소서. 내 와이셔츠를 적시게 될 땀방울만큼만 돈을 벌게 하시고, 나 자신을 위해 너무 많은 열정을 소비해온 지난날을 꾸짖어주소서. 부디 내가 나 아닌 이들의 배경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바라보던 이에게는 남의 자식의 구멍난 양말을 불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내 말을 늘어놓느라 남의 말을 한 마디도 듣지 못하는 이에게는 파도 소리를 담는 소리의 귀를 주소서.

백지장처럼 맑고 높은 정신으로 이 풍진 세상을 견디게 하소서. 이 땅의 젊은 아들딸들에게 역사는 멀찍이 서서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프게 몸에 새기는 것임을 깨우쳐주시고, 늙고 병들고 나약한 이의 손등에 당신의 손을 얹어 이들의 심장을 두근거리는 시간을 연장해주소서. 당신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시고, 통하지 않는 것을 통하게 해부소서. 겨울 팽나무의 흔들리는 가지 끝과 땅속의 묵묵한 뿌리가 한 식구라는 걸 알게 하시고 숲 속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의 길과 사람 사는 마을의 골목길을 다르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하소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괴롭지 않은 세상 일구게 하소서.

 

                                                                 타인 능해 / 안 도 현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든든하게 등에 지고 앞으로는 너른 들과 섬진강을 펼쳐놓고 거기에 안온한 둥지처럼 웅크리고 있는 집이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의 운조루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에 터를 잡은 이 운조루를 가보는 일은 참 설레는 일이다. 전국에 한옥 고택이 적지 않지만 나는 이 운조루만큼 고담한 집을 보지 못했다. 200년이 넘는 이 집의 나이 때문도 아니고, 사대부가 살던 집의 전통적인 양식 때문도 아니다. 운조루보다 나이를 더 잡순 한옥은 얼마든지 있고, 집의 구조가 유난히 특별한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운조루는 조선 영 ‧ 정조 때 무관을 지낸 류이주가 지었다. 그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쌀을 퍼가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도록 쌀뒤주를 개방했다. 나무로 만든 큰 쌀통에 작은 손잡이를 만들고 거기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어 두었다. 다른 사람도 누구나 마음대로 열 수 있다는 뜻이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들었던 이웃들에게 이 집의 뒤주는 단비 같은 것이었다. 주인은 쌀 두 가마 반이 들어가는 이 뒤주가 늘 비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했던 곳이었다. 그 와중에 운조루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눔의 정신을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운조루 때문에 뒤주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뒤주 때문에 운조루가 빛난다. 내 지갑을 열어서 나를 빛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야생 버섯 / 안 도 현

 

외갓집 뒷산은 참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비가 내리고 나면 늙은 참나무 둥치와 그 주변에 각양각색의 버섯이 비밀을 발설하는 것처럼 돋아났다. 외할머니를 따라 버섯을 따러 뒷산에 자주 올라갔다. 외갓집에서는 칼국수를 끓일 때 버섯을 넣었다. 나는 애호박, 부추와 함께 밀가루를 풀어 넣은 걸쭉한 버섯국을 특히 좋아했다. 그 숲에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독버섯이 있었다. 이웃 마을의 어떤 노인이 버섯을 잘못 먹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도 있었다. 버섯은 무서운 거라고 했다.

싸리버섯이나 애기꾀꼬리버섯을 독버섯과 구별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식용 중에는 회색 삿갓을 쓰고 하얀 자루가 훤칠한 버섯도 있었다. 이것과 비슷한 버섯을 자칫 잘못 알고 바구니에 담았다가는 외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삿갓 안쪽에 붉은빛이 돌거나 버섯을 찢었을 때 뜨물 같은 국물이 나는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고 외할머니는 버섯을 삶아서 늘 차가운 물에 하루쯤 담가두셨다.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야생 버섯의 나쁜 독을 그렇게 해서 우려내려고 했던 것일까?

식물생리학을 전공한 서남대 김성호 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분이다. 그이의 책 《나의 생명 수업》(웅진지식하우스)에 나오는 이런 문장은 얼마나 멋진가. “버섯의 멋이 되려면 버섯보다 많이 큰 내가 먼저 버섯의 높이로 땅에 엎드리면 된다는 것” 나는 야생 버섯의 맛과 추억에 취하기만 했지 엎드려보지 못했다.

 

                                                             매화치 / 안 도 현

 

매화의 은은하고 헤프지 않은 향기를 ‘암향(暗香)’이라 한다. 중국의 시인들은 눈 속에 피는 매화의 절개를 ‘옥골방혼(玉骨氷魂)’이나 ‘빙기옥골(氷肌玉骨)’로 표현하면서 칭송했다. 옛사람들은 매화를 통해 맑고 고고한 정신에 이르고자 했던 것이다. 퇴계 이황도 매화를 끔찍이 좋아한 바보였다. ‘매화치(梅花痴)’라고 옆에서 수군거려도 개의치 않았다. 어떤 시에서는 ‘매형(梅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매화를 형으로 받들었다. 퇴계는 늙어 초췌해진 자신의 얼굴을 매화에게 보일 수 없어 아래채로 화분을 옮기라고 할 정도였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치부를 보일 수 없었던 것.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휴먼앤북스)는 퇴계의 매화시를 모은 시집이다. 이 책을 번역해 엮은 전북대 김기현 교수에 따르면 매화를 소재로 쓴 퇴계의 시는 모두 백일곱 편에 이른다. 일생 동안 이처럼 매화에 집중해서 많은 시를 쓴 시인은 없을 것이다. 24행이나 되는 어떤 시에서는 행마다 ‘매(梅)’ 자를 넣어 시를 지은 적도 있다. 퇴계와 단양에 살던 기생 두향과의 러브스토리의 매개체 역시 매화다. 이를 실감나게 그린 소설이 최인호의 《유림》(열림원)이다. 퇴계는 1570년 음력 12월 8일 일흔 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 세상을 떠나는 날 그는 매화분에 물을 주라 당부하고 병석에서 꼿꼿이 일어나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혹독한 겨울을 통과해보지 않은 자는 이른 봄 매화 향기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꼬마 시인 / 안 도 현

 

아이보다 훌륭한 시인은 없다. 시인이란 아이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하는 어른이거나 펜을 들고 겨우 아이의 흉내를 내보는 자다. 아예 아이 흉내 내기를 포기한 시인들도 있다. 그들은 언어에다 겉치레하는 수사에 사로잡혀 있으며, ‘추억’, ‘고독’, ‘상념’과 같은 관념어를 시에다 남발하고,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을 그럴싸하게 구사한다. 가짜 시인들이다.

“요건 찔레고 조건 아카시아야. 잘 봐, 꽃은 예쁘지만 가시가 있지?”

아빠가 일곱 살짜리 딸에게 친절하게 설명한다.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빠, 근데 찔레랑 아카시아는 이름에도 가시가 있는 것 같아.” 나무 이름에서 된소리(ㅉ)와 거센소리(ㅋ)를 재빨리 발견하고 그걸 가시의 뾰족함과 단번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기가 막혀 샘이 날 정도다. 튤립나무하고 쥐똥나무는 가시가 없거든 하고 아이를 골려주고 싶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어린 시인은 또 다른 통찰력을 과시한다.

“규연아, 저녁과 밤은 똑같이 깜깜하니까 같은 거지?” 하고 아빠가 묻자,

“다르지. 저녁밥 먹을 때가 저녁이고 잠잘 때는 밤이지.” 아이는 그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아빠가 한심했을 거다. 이 꼬마 시인은 박성우 시인의 딸인데, 엄마도 시인 권지현이다. 가족 셋 중 딸이 갑이다. 바다에 데려간 날 아이가 말했다.

“바다가 생각보다 얇네.” 아빠가 받았다.

“그래? 키가 크면 좀 더 두꺼워 보일 거야.” 그래서 아빠는 아이를 안고 바다를 보여주었다나.

 

                                                               표절 / 안 도 현

 

옛날에 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화실에서 검은 두건을 쓰고 흰 겹옷을 입고 초록 붓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바다에 떼를 지어 노니는 물고기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때는 가을날이었다. 그때 홀연 문종이 바른 창에 햇빛이 비쳐 환해지더니 기울어진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드리워졌다. 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단번에 붓에다 묽은 먹을 묻혔다. 그러고는 문종이를 바른 창으로 바짝 다가갔다. 창에 드리워진 국화꽃 그림자를 모사하기 시작했다. 국화 줄기와 잎과 꽃을 하나하나 베끼고 났더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한 쌍의 큰 나비가 향기를 쫓아와서는 국화꽃 가운데 와 앉는 게 보였다. 나비의 더듬이가 마치 구리줄같이 또렷해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 역시 창에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그는 그것마저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나비가 앉은 국화꽃 그림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고 나니 또 문득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지를 잡고 매달리기에 참으로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국화꽃 여린 가지를 붙잡고 있는 참새가 놀라서 곧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는 참새의 형상을 급히 또 베껴 그렸다. 그때야 그는 붓을 내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일을 잘 마쳤다. 나비를 얻었는데 참새를 또 얻었구나!”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화가가 문종이에 그린 그림은 과연 표절일까, 창작일까? 이덕무의 문장을 몇 글자만 바꿔 그대로 옮겨 적은 이 글은 그럼 또 무엇일까?

 

                                                         만경강 둑길 / 안 도 현

 

나는 만경강 둑길을 따라 출퇴근한다. 도로 폭이 좁은 게 흠이지만 신호등이 없고 풍경이 한가하다. 시속 40~50킬로미터 전후의 속도도 여기서는 과속이다. 나비가 유리창에 부딪친 일은 수없이 많고, 개구리와 뱀이 길을 건너는 걸 보지 못하고 지나갈 때도 있었다. 어느 가을에는 청둥오리하도고 충돌할 뻔했다.

아슬아슬한 시간은 가끔 예고 없이 찾아온다. 며칠 전에는 50미터 앞쯤에 어린 새 한 마리가 쪼르르 길을 건너는 걸 발견했다. 그랬더니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놈이 태연하게 되똥되똥 따라 건너고 있었다. 앞선 녀석이 무사히 건너갔으니 여유를 부려보는 걸음새였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두 마리의 어린 새들이 지나간 자리에 차를 멈추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놈들이 튀어나온 풀숲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강변 쪽 그 풀숲에 눈이 말똥말똥한 또 다른 놈이 길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논병아리였을까.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형제자매 새들은 나라는 인간 때문에 얼마나 기겁을 했을까.

장끼와 까투리 연인이 길을 건너는 걸 지켜본 저녁도 있었다. 뒷짐 진 것처럼 걸음걸이가 느려 질투 날 정도였다. 속도를 줄이면서 물어보았다. 장서방, 어디 가는가? 우리는 저녁 먹고 산책 간다네. 어디 좋은 데 가는가? 허허. 자네는 알 바 없네. 둘은 풀숲으로 그만 총총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칫, 산책이 목적이 아니었구만!

 

                                                             아이와 나무 / 안 도 현

 

갑자기 천국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나뭇가지 위에 새처럼 모여 앉아 조잘대기도 하고, 손으로 가지를 잡고 몸을 흔들어대는 녀석도 있었다. 나무는 대여섯 명이 올라가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해 보였다. 얼마나 많이 오르내렸는지 나무줄기는 반질반질했고 잎은 무성했다. 그때 이중섭의 그림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소와 새와 물고기와 게를 껴안고 노는 그림들 말이다.

그 그림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저절로 무장해제되곤 했지. 그림으로 보던 천진난만의 해방구가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감동할 수밖에. 아이들이 내게 손짓을 보내왔다. 나무 위로 한번 올라와보라는 거였다. 그렇지만 나는 나무에 오를 시기를 놓쳐버린 다 큰 어른일 뿐이었다. 수년 전 중앙아메리카의 코스타리카를 갔을 때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서 만났던 풍경이다.

나무를 잘 타는 아이가 없다. 요즘은 아이들이 아에 나무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나무에 오를 시간을 뺏어버린 어른들 탓이다. 도심 공원에서 어떤 아이가 나무에 기어오른다고 해보자. 어른이라는 이름의 관리인이, 부모가, 지나치던 행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릴 것이다. 과잉보호다. 수피를 만져볼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들의 상상력은 말라가고 창의력은 어설퍼진다. 한 코스타리카 아이가 자기가 쓴 시를 보여주었는데, 엉뚱하게도 발상에 나는 무릎을 쳤다.

 

소가 날아간다.

산에 부딪쳤다.

쿵, 하고 떨어졌다.

아, 아프다.

 

                                                                 휴대폰 / 안 도 현

 

나는 휴대폰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나이가 적은 아이들일수록 더 경악스러워한다. 그럴 때면 나는 잠시 원숭이가 되는 척한다. 가끔 학교 연구실에서 집으로, 혹은 집에서 연구실로, 두어 번의 연락을 거친 후에 연결이 될 때마다 불평이 쏟아진다. 내가 하나 사줄까 하고 답답해서 묻는 분들도 있다. 남들이 사주는 휴대폰을 다 모았더라면 20대는 훨씬 넘을 것이다. 휴대폰을 가져서 생기는 편리함보다 휴대폰을 가지지 않아서 생기는 불편함을 앞으로도 나는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가 얼마나 달콤한지 나는 아니까.

아프리카의 콩고에는 전 세게 ‘콜탄’의 80퍼센트가 매장되어 있다. 콜탄은 하찮은 광물로 취급받다가 최근에 ‘검은 금’으로 부를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콜탄은 휴대폰 부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탄탄’의 원료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콩고 내전에서 콜탄은 살상 무기를 사들이는 자금으로 이용되었고, 이것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세계적 희귀 동물인 고릴라의 서식지가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북센스)에 나오는 이야기다.

휴대폰이 없다고 사람 관계가 한순간에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래, 이 기회에 고릴라가 미워하는 휴대폰을 내던져버리면 어떨까? 그건 지구상의 멸종 위기 동물을 보호하는 거룩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엥? 지구가 망해도 휴대폰은 절대 버릴 수 없다고?

 

                                                                 산공부 / 안 도 현

 

옛적부터 이름난 소리꾼들은 여름에 깊은 산속을 찾아가 판소리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배웠다. 이를 ‘산공부’라고 한다. 그것은 득음을 위한 독공(獨功)의 시간이었고, 선생과 제자가 함께 먹고 자며 훈련하는 혹독한 ‘여름 켐프’였다. 길게는 여름 한철 100일을 꼬박 산에서 보내기도 했다. ‘신창(神唱)’으로 부르는 명창 권삼득과 완주의 위봉폭포, 이중선과 부안의 직소폭포, 정정렬과 익산 심곡사 등이 산공부의 일화로 우명하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소리를 내지려면 외따로 떨어진 암자나 움막집만큼 적당한 곳이 없다. 폭포를 끼고 있는 계곡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 만물의 생기와 활력이 충만한 여름에 산속에서 연습을 하다 보면 밖으로 내지른 만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 있을 터. 그리하여 산공부는 자신과의 싸움이면서 크게는 우주와 대결을 벌이는 것.

하루 세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선생의 입과 모양과 몸을 바라보며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선생의 호통과 매를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선생의 소리만 배우는 게 아니다. 선생의 숨소리, 몸짓, 버릇, 취향을 모두 빨아들이는 것. 몸이 무기인 소리꾼들은 산공부를 통해 선생의 전부를 배우는 것이다.

소리꾼들의 이러한 집중과 몰두를 나는 다른 예술 장르에서 보지 못했다. 비록 산중은 아니었지만 국악과 개인 연습실에서 이뤄지는 소리꾼들의 산공부를 잠깐 엿본 적 있다. 소름이 돋았다.

 

                                                                        대밭 / 안 도 현

 

대밭에 푸른 댓잎들이 대나무에 꼭 붙어살고, 마른 댓잎들은 바닥에 저희끼리 사각사각 두런거리며 살고, 아침이면 꽁지 짧은 참새 떼가 울음소리 왁자하게 흩뿌리며 살고, 대낮에는 심심할 때마다 한량처럼 구성진 노래 부르며 산비둘기가 실고, 새들이 일하러 떠난 고요한 대밭에는 새똥들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모여 살고, 저녁에는 하루 종일 들쥐 한 마리 잡아먹지 못한 족제비가 그 긴 꼬리로 등허리를 툭툭 치며 기어들어와 살고, 족제비 발소리를 들은 뱀이 더 축축하고 그늘진 곳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대밭에는 모기가 마을에서 집단 이주해와 대규모로 부락을 형성해 살고, 돈 떼이고 집 잃고 처자식 잃은 바람이 옷 한 벌도 없이 살고, 헛기침만 하다가 날을 세우는 푸른 달빛이 사글세도 내지 않고 들어와 살고, 여름내 꺼내 먹어도 잇속까지 서늘한 김칫독이 땅을 파고 살고, 대나무 빈 마디 속으로 도망가 방을 얻고 싶은 청춘의 애타는 마음들이 살고, 첫 키스의 두근거리는 심장이 살고, 사금파리와 유리 조각과 삭은 고무신이 살고, 굴뚝에서 피어올라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돌다가 갈 데 없는 연기가 몰래 스며들어와 살고, 전쟁 통에 다급하게 몸을 숨기던 쫓고 쫓기던 발소리들이 살고, 숨죽인 침묵이 눈치 보며 살고, 북쪽으로 더 이상 북진할 수 없는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이 살고, 100년에 한 번 핀다는 대꽃이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꽃을 피우려고 기를 쓰고 대나무 속에 웅크리고 산다.

 

                                                             나는 너다 / 안 도 현

 

나무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의 설명처럼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로 이루어진 여러해살이식물이 나무일까? 한 그루의 나무가 나무이기 위해서는 그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꽃이 없는 나무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흙 속에 적절한 수분과 영양분이 있어야 하고, 목질이 단단해야 적어도 나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무가 나무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을 다 갖추었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에, 어느 특정한 나무에 세 들어 사는 벌레와 이끼가 그 나무에 없다면 그 나무를 온전하게 나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나뭇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이 기이하게 어느 한 나무에만 닿지 않는다면 그것을 우리가 나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무는 자기 혼자서는 어느 한순간도 나무가 될 수 없다. 자기 힘으로는 어떤 공간에서도 나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명해진다. 나무에 날아드는 새도 나무라는 것을. 나무 그늘에서 부채를 부치며 쉬는 할머니도 나무라는 것을. 어느 나무의 배경이 되고 있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풍경도 사실은 나무라는 것을.

혼자 잘나서 출세하고 이름을 얻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이걸 착각하거나 망각하면 오만해진다. 겉은 멀쩡한데 영혼이 죽은 사람이 된다. ‘너’가 없으면 ‘나’는 없다. ‘나’는 ‘너로’인해서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나는 너다.

 

                                                                  헌책 / 안 도 현

 

이사를 할 때마다 책 때문에 골치다. 아까워 버릴 수도 없고, 갖고 있자니 짐이 된다. 방도 책꽂이도 모두 비좁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도 있고 두어 페이지 설렁설렁 넘겨보다가 던져둔 책도 있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내가 아직 책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책 읽기의 완성은 그 책을 미련 없이 버릴 때 이뤄지는 것일까?

고등학교 다닐 때 대구의 남산동 헌책방에 쭈그려 앉아 몇 시간씩 낡은 책을 뒤적일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현대사를 헌책방에서 배웠고, 하늘처럼 떠받들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왜 문제 많은 독재자인지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일반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시집들도 수북하였다. 나는 용돈을 쪼개 그중 몇 권을 샀는데, 놀랍게도 저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시인이 역시 당대에 이름 높은 한 시인에게 증정한 시집이었다.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시집을 보낸 시인이 알면 얼마나 낙담하겠어. 증정 받은 시집을 소중히 간직하지 못하고 버린 시인이 그때는 얄미웠다.

1936년에 나온 백석의 시집 《사슴》은 100부 한정판이었다. 지금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은 다섯 손가락 안팎이다. 일설에 따르면 5억 원을 줘도 팔지 않겠다는 이가 있었다고 한다. 작은 꿈이 있다면 그 시집을 손으로 한 번 만져보는 것이다. 오래 바라보고 한 번 만져보는 데도 돈이 든다면 빚을 내서라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 너무 큰 꿈인가?

 

                                                    음나무 / 안 도 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4개의 가시를 가진 도도한 꽃이 등장한다. 꽃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시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꽃들은 가시가 있으므로 자기들이 스스로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가시를 가진 식물의 생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음나무는 보통 엄나무로 많이 알고 있다. 잡귀를 쫓는다는 믿음 때문에 마당 안에 심기도 하고, 가지를 잘라 처마 끝에 매달아놓기도 한다. 요즘은 닭백숙에 많이 넣는다. 음나무의 새순은 두릅순보다 향기가 강한데, 봄철에는 더 귀하게 친다. 연한 잎을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말려 묵나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음나무 가시는 잎을 따 먹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기키기 위해 생겨났다. 이른바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 나무가 어릴 때는 위험으로부터 취약하기 때문에 가시가 매우 날카롭고 가시의 개수도 많다. 그런데 음나무 줄기가 굵어지고 잎사귀를 허공 높은 곳으로 매달기 시작하면 가시가 무뎌진다. 생의 정착 단계에서 가시가 퇴화하는 것이다. 키가 크고 수십 년 된 음나무의 수피는 이게 언제 음나무였을까 싶을 정도로 검은 회색으로 변해 있다. 세로로 난 수피의 무늬도 뚜렷해진다. 가시는 뾰족하지 않고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사람도 가시를 세우는 것일까. 나이를 먹어도 가시를 거둬들일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럼 뭐지?

 

                                                         죽은 직유 / 안 도 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에게 직유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이 한결같다. ‘처럼, 같이, 듯이’ 같은 말이 붙으면 무조건 직유라는 것. 국어시간에 시를 공부할 때 유난히 많이 들어서 그렇다. 원래 수사법은 어떤 대상을 강조하거나 참신한 표현을 얻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표현 대상의 겉치레를 위한 장식용으로 수시법이 필요한 건 아니다. 아무것이나 몸에 걸친다고 다 옷이 아닌 것처럼. 직유는 원관념과 비유하고자 하는 보조관념이 비숫한 성질을 가지고 있을 때 주로 발생한다.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한탄할 때 흔히 쓰던 말이다. 겉으로 보면 직유가 맞다 형식적으로는 직유의 체계를 갖췄지만 나는 이런 직유를 ‘죽은 직유’라고 부른다. 이미 어디에선가 많이 들었거나 새로운 미적 충격이 없는 직유가 죽은 직유다. 이런 표현은 우리 삶을 앞으로 전진시키지 못한다. 동어반복의 삶만큼 지루한 것이 없는 것이다. 여성의 얼굴을 표현하는 ‘초승달 같은 눈썹’이라든가 ‘앵두 같은 입술’을 케케묵은 옛날 책에서 얼마나 많이 읽었나. 21세기 젊은 연인들의 입에서 설마 이런 수가가 흘러나오는 건 아니겠지?

어떤 표현이 직유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죽은 직유는 직유가 아니라는 과감한 확신이 필요하다. 한마디 말을 하고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새로운 직유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게 우리들의 생활을 종이 두께만큼이라도 풍요롭게 하지 않을까?

 

                                                      가족사진 / 안 도 현

 

가족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에 가는 건 왠지 머쓱한 일이다.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남는 건 사진이야. 누군가 부추기지만 사진관에서 카메라 앞에 서는 일부터 어색해진다. 하지만 사진사 앞에서는 누구나 순종해야 한다. 머리에 손을 얹거나 콧구멍을 후벼 파서는 곤란하다. 고개를 휘젓거나 눈을 깜박거려서도 안 된다. 턱을 너무 쳐들지 마시고, 하면 재빨리 턱을 아래로 내려야 하며, 왼쪽 어깨를 조금 더 세우시고, 하면 지체 없이 왼쪽 어깨를 세워야 한다. 사진사에게 순종해야만 가족의 평화가 인화지 위에 새겨진다. 부모가 가운데 앉고 자식들이 그 둘레에 빙 둘러서서 찍은 가족사진은 언제 봐도 경건하다.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함께 찍은 기념사진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한다.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혓바닥을 쏙 내밀었다가는 한 대 쥐어박히게 마련.

한 시절 가족이 행복했다는 물증이 바로 가족사진이다. 가족사진은 절대로 슬픔이 앉아 있을 자리를 마련해놓지 않는다. 가난도 드러나지 않는다. 팔꿈치가 해진 저고리도 없고, 엄지발가락이 삐죽이 나온 양말도 없다. 마른버짐이 일어난 얼굴로 떼쓰는 자식도 없고, 자식들을 향한 어머니의 쟁쟁거리는 잔소리도 없다. 가족을 최대한 평화롭게 담아내는 게 가족사진의 임무다. 사람은 늙어가도 가족사진은 늙지 않는다.

 

                                                        집필실 / 안 도 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할 때 작가들은 집필실을 찾는다. 이름을 알 만한 작가 중에는 오피스텔을 개인 집필실로 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자치단체나 문인단체에서 지원하는 공간으로는 강원도 백담사 만해마을과 원주의 토지문학관, 서울의 연희문학창작촌이 대표적이다. 제주의 마라도 창작스튜디오는 유배 가듯 짐을 싸서 들어가는 곳. 최근에는 과학도를 기르는 카이스트에서도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을 쓰기 위해 절을 찾는 작가들이 있었다. 세속의 번잡함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 자신의 내부를 간섭받지 않고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절이다. 그동안 절에서 잉태해 한국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산사라는 공간이 작가에게 집필 장소만을 제공했을까? 절을 감싸고 있는 산과 그 고요의 능선들이 없다면 작가들은 굳이 그곳을 작업 공간으로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집필실은 글쓰기라는 노동 이외에 사색과 휴식을 함께 얻을 수 있는 곳이 제격인 듯싶다.

전주 근교의 농가를 구입해 출퇴근하듯이 드나든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펜을 놓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 귀를 열어두곤 했다. 방 안에서 빗소리만 듣고도 무슨 비가 내리는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마당에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나면 지붕 위로 소나기가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톡톡 처마 끝에 비가 떨어지면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호랑이 눈깔 뺀 파리 / 안 도 현

 

여름철이면 유독 극성을 부리는 놈이 있다. 이놈은 축축한 걸 좋아하는데 포유류의 눈곱을 특히 친애한다. 시골길을 걸을 때 눈가에 바짝 다가와 왱왱거리기도 하고 소나 강아지의 눈앞에 나타나 꽤나 성가시게 굴기도 한다. 눈앞에서 기회를 엿보면서 알짱거리다가 눈 속으로 잽싸게 침투하는 기술도 가졌다. 손으로 낚아채보지만 동작이 재빨라 좀체 잡을 수 없다. 이놈의 몸은 좁쌀만 한데, 이놈에게 당하는 괴로움은 좁쌀 한 가마는 될 것이다. 초파리인지 날파리인지, 아니면 하루살이 종류의 하나인지 그 이름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하루는 이놈이 호랑이의 눈가에 나타났다. 호랑이는 대수롭잖게 여기고 눈을 껌벅거리다가 잠을 청했다. 때를 놓칠세라 이놈은 호랑이의 눈곱을 행해 돌진했다. 눈꺼풀이 간질거리는 통에 호랑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랑이가 눈을 떴는데도 이놈은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랑이의 눈 속을 파고들 기세로 달라붙었다가 호랑이가 고개를 흔들면 목덜미 뒤로 도망가 숨곤 했다. 이놈의 공격은 집요했고, 그때마다 호랑이는 앞발을 휘휘 저어 쫓았다. 그러다가 호랑이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앞발에 힘을 주고 단단히 발톱을 세운 다음, 호랑이는 이놈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토끼를 낚아챌 때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런데 발톱 끝에 찍혀 나온 것은 이놈이 아니라 호랑이의 두 눈알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놈을 ‘호랑이 눈깔 뺀 파리’라고 불렀다 한다.

 

                                                         모기장 / 안 도 현

 

눈을 뜨면 모기장 안쪽 구석에 몇 마리 모기가 봍어 있었다. 낡은 모기장 안으로 밤사이 침입한 괘씸한 놈들. 이들은 배가 터질 듯이 빵빵해서 잘 날아다니지도 못했다. 손바닥으로 이놈들을 잡으면 선홍색 피가 묻어났다. 외할머니가 말했다. 내 아까운 피를 요놈들이 다 빨아 먹었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에 모기장을 걷었고, 그리고 아침이 왔다.

방충망 대신에 모기장을 치고 모처럼 그 곳에 들어가 보는 건 아주 색다른 경험. 마치 모기장 왕국의 왕이 된 기분이 된다. 모기와 나방과 풍뎅이와 매미는 짐에게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것이로다.

엎드려 책을 읽는 일도 왠지 위엄과 기품이 있어 보인다. 아,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황당한 착각이라는 것을 잠시 후에 깨닫게 된다. 모기장을 쳤으면 불을 꺼야 하는데 형광등을 켜놓았으니 온갖 날벌레들이 모기장 바깥에 붙어 있다. 나는 겨우 책 몇 줄을 읽고 있지만 그들은 아예 팬티차림의 나를 내려다보며 송두리째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 한 마리 서글픈 포유류가 아니던가. 모기와 나방과 풍뎅이와 매미에게 포위당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인간.

책을 덮고 생각해본다. 저 곤충 손님들에게는 내가 모기장 안쪽에 있을까, 모기장 바깥쪽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든 모기장 안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현명한 곤충 손님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너는 영원한 바깥이야.

 

                                                          닭개장 / 안 도 현

 

여름이 되면 슬며시 당기는 음식이 닭개장이다. 음식점에선 좀체 맛볼 수 없다. 이건 우리 어머니의 주특기 음식 중 하나다. 닭개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릴 때부터 어머니 옆에서 유심히 지켜봤다. 지금은 나도 마음먹으면 거뜬히 끓여낼 자신이 있다.

닭은 집에서 키운 놈이 좋다. 푹 삶아서 식힌 뒤에 뼈에서 발라낸 살을 잘게 찢어 준비해둔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이걸 한 솥 끓이면 우리 집 여섯 식구가 두 끼는 먹을 수 있었다. 그건 닭개장에 넣는 채소와 국물 덕분이다. 닭고기와 채소의 절묘한 결합이 닭개장의 맛을 결정한다. 무시래기나 배추시래기를 반드시 넣어야 하는데 나는 부드러운 배추시래기가 더 좋다. 마른 토란대와 고사리를 미리 삶아두는 것도 필수다. 숙주나물을 씻어놓고 대파를 큼직하게 썰어둔다. 채소는 많다 싶어도 괜찮다. 이렇게 준비해둔 닭고기와 각종 채소에다 조선간장,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으로 갖은 양념을 한 뒤에 밀가루를 뿌리면서 골고루 버무린다. 밀가루는 국물을 걸쭉하게 만든다. 닭 국물이 다시 끓을 때쯤 이것들을 넣고 센 불로 또 한참을 끓인다. 솥 안의 모든 것이 한통속이 될 때까지. 뜨거운 여름날에는 이 닭개장에다 찬밥을 말아야 제격이다.

우리 식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렇게 붉고 매운 닭개장을 퍼먹었다. 그런데 그건 닭다리 하나가 사라진 닭개장이다. 어머니가 맏아들인 나를 몰래 부엌으로 불러 통통한 다리 하나를 이미 먹인 것을 식구들은 모르고 있었다.

 

                                                타버린 잔 / 안 도 현

 

조용필의 히트곡 중에 <바람이 전하는 말>이라는 노래가 있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죽음과도 같은 이별 뒤에 연인의 가슴속에 찾아오게 될 공허함을 다독이는 노래의 마지막은 이렇다.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조용필 특유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실려 이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면 괜히 가슴에 금이 찡 가곤 했다. 20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하도 많이 들어서 가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는데 어느 날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가사 2절 한 부분 때문이다. “타버린 그 재 속에 숨어 있는 불씨의 추억”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더니 내가 귀로 들어 익숙한 그 가사가 아니었다. 나는 수십 년간 “타버린 그 잔 속에 숨어 있는 불씨의 추억”으로 알고 있었던 것! 조용필은 노래의 절정 부분에서 강한 된소리를 많이 쓰는 가수다. “타버린 그 재 속에”를 나는 어처구니없이 “타버린 그 잔 속에”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듣기 능력의 오류를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마음 한쪽이 못내 찜찜하였다. 연인들이 나누던 술잔이 이별 뒤엔 다시 그럴 일이 없으니 타버린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게 더 시적이면서 절절하기 않은가? 타버린 재 속에 불씨가 남는다는 건 너무 식상한 표현이 아닌가? 나는 끝내 우기고 싶었다. 나 혼자만의 상상력과 은유는 별것 아닌 사실 앞에 무너지고 거세되고 만 것이다. 상심이 큰 날이었다.

 

 

                                                청포도 / 안 도 현

 

7월은 청포도의 계절이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이육사 시인이 일찌감치 우리에게 가르쳐줬다. 그 <청포도>의 배경을 두고 엇갈리는 주장이 존재한다. 이것 때문에 안동시와 포항시가 서로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육사는 1930년대 후반 결핵을 앓아 포항과 경주에서 요양을 한 적이 있다. 현재 해병 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포항 영일만 일대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포도 농장이 있었다고 한다. 작고한 소설가 손춘익 선생은 육사가 이 송도원 언덕에서 영일만을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풍경이 그때 시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착안해 포항문인협회에서는 1999년에 ‘청포도 시비’를 세웠다. 이어서 2013년 포항 청림동에 ‘청포도 문학공원’을 조성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안동시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위발 시인이다. 육사가 포항에서 요양한 적은 있지만 <청포도>의 배경지라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육사의 한자시어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를 예로 든다. 육사의 고향은 경북 안동시 도사면 원촌 마을이다. 이 ‘원촌(遠村)’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실제로 마을 이름을 ‘먼데’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먼데’를 교과서에서 ‘조국 광복’으로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한다.

 

                                                     은어밥 / 안 도 현

 

아직 한 번도 맛보지 못했지만 내심 벼르고 있는 음식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은어밥’이다. 지금은 독일에 가 있는 하수정 시인이 20년 전쯤에 예찬하던 맛. 은어는 수박 향이 나는 물고기예요. 그녀의 말을 듣던 우리가 귀가 단번에 길쭉해졌다. 후각은 원초적인 감각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다. 그녀의 고향인 경남 진주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말하다가 은어밥 이야기가 나왔다.

남강에서 아버지가 은어를 잡아왔어요. 여름밤 모래사장 위에 불을 피워 은어밥을 지어 먹었죠. 밥물을 평소보다 낙낙하게 잡아야 해요. 은어는 배를 따서 손질해두고요. 냄비 속의 쌀이 한소끔 끓어 익을 때쯤 뚜껑을 열고 재빨리 은어를 넣어야 해요. 밥물이 걸쭉해질 때쯤이죠. 그때 은어를 밥 속에 한 마리씩 수직으로 박아 넣는 거예요. 은어를 꽂아 넣는다고 해야 하나? 꼬리만 밥 위로 나오게 박아 넣는 게 기술이죠. 그다음은 뜸이 잘 들 때까지 밥을 짓는 거예요. 푹 익은 밥과 민물고기가 대체 어떤 맛을 낼지 좌중은 더 솔깃해졌다. 그런데 알아둘 게 있어요. 밥이 다 되었을 때 은어 꼬리를 살살 흔들면서 빼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래야 꼬리와 뼈와 가시가 같이 딸려 나오고 밥 속에는 살이 발라져 남게 되거든요. 이걸 주걱으로 섞어 양념간장으로 비벼 먹는다는 거였다. 입안에 단침이 고였다. 은어의 영어식 이름은 ‘스위트피시(sweetfish)’, 곧 ‘단물고기’다. 하동 섬진강 부근을 기웃거리고 싶을 때다.

 

                                                          마늘종 / 안 도 현

 

봄에 마늘종을 뽑아본 적이 있는가? 까딱 잘못하면 끊어지기 때문에 순식간에 적당한 힘을 가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마늘종이 올라온 뒤 보름 전도 되면 서둘러 뽑아줘야 한다. 규모가 큰 마늘밭에서는 노동력 절감을 위해 일일이 뽑는 것보다 아예 자른다고 한다. 그래야 땅속의 마늘 알이 탱탱하게 굵어지는 것이다. 마늘종을 뽑으면 뾱 하는 아주 특별한 소리가 난다. 뾱, 뾱, 뾱 하는 그 소리…. 햇볕이 따끈따끈해지는 5월의 마늘밭에서 듣는 소리…. 식물의 살과 살이 분리될 때 나는 그 소리가 가히 중독성이 있다. 어릴 적에 마늘종은 한 웅큼 뽑아오라는 심부름은 그래서 신이 났다. 사실 마늘종은 마늘의 꽃줄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개화를 꿈꾸며 마늘이 땅속에서 허공으로 애써 줄기를 밀어올린 것이다.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뽑히거나 잘리는 마늘한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된장 하나만 있어도 훌륭한 반찬이 되고 안주가 되는 게 마늘종 아닌가. 아삭아삭하고 연한 이것은 새큼하게 장아찌를 담가도 좋고, 고추장으로 무쳐도 좋고, 멸치나 마른 새우하고 볶아도 좋다. 나는 콩가루를 묻혀 쪄낸 마늘종을 특히 좋아한다. 비만과 고지혈증,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데 탁월한 요과가 있다니 오늘 장바구니에는 마늘종 한 단 담아볼 일이다. 경남 남해군이 사시사철 푸른 것은 남쪽 끝이어서가 아니다. 드넓은 마늘밭 때문이다. 거기 지금쯤 뾱, 뾱, 마늘종 뽑는 소리가 새소리처럼 치렁치렁 들리겠다.

 

                                                    필명 / 안 도 현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청첩장이 하나 도착했다. 신랑 이름이 안도현이었다. 어째 이런 일이! 나하고 이름이 똑같은 신랑은 시를 쓰는 후배였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그는 나중에 하는 수 없이 필명을 안찬수로 바꾸었다. 선배를 잘못 둔 덕분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문학청년 시절에 만났던 몇 사람도 이름을 바꾸었다. 시인 이상백은 이산하가 되었고, 시인으로 등단했던 김정숙은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김형경이 되었다.

류시화 시인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 이름은 안재찬이었다. 창원의 경남대를 갔을 때 소설가 전경린은 없었다. 연구실 문패는 안애금이었다. 아예 성까지 바꿔 필명을 만든 경우는 30낸대의 이상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의 본명을 김해경이었다. 강하고 뻣센 느낌의 조동탁보다 조지훈이란 필명이 훨씬 훈훈하고 우리에게 친숙하다. 현역 작가 중에도 필명이 본명보다 더 알려진 문인이 적지 안다. 고음은 고은태였고, 심경림은 신응식이었고 황석영은 황수영이었고 황지우는 황재우였고, 박노해는 박기평이었다. 젊은 소설가 김사과의 본명은 김방실이었다.

백석은 어릴 적에 백기행이었다. 1933년 12월, 방응모 장학금을 받은 장학생들이 회보를 냈는데 그 표지에는 ‘백석(白奭)으로 실려 있다. 백석이 만주에서 ‘한얼생’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 이건 터무니없는 억측이다.

 

 

                                                            하이쿠 / 안 도 현

 

일본에서 현재 활동 중인 시인의 시집은 서점에서 거의 진열하지 않는다. 시집이 꽂혀 있어야 할 서가에 하이쿠 시집들만 빼곡하다. 그만큼 대중들이 하이쿠를 즐겨 읽는다. 하이쿠의 역사는 1000년 가까이 되는데, 일본에는 1000개에 가까운 동호인 모임이 있다고 한다. 하나의 표현 양식이 오랜 세월 동안 작법이 변하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는 건 예술사에서 드문 일.

하이쿠는 5-7-5의 모두 17자 소리로 된 매우 짧은 시가다. 그렇다고 글자 수만 맞춘다고 완성되는 건 아니다. 하이쿠는 형식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본 작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계절의 감각을 나타내는 말을 꼭 넣어야 하고, 첫째 구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져야 하며, 반드시 끊어 읽는 맛이 나게 한다는 것 등이다. 짧은 형식 안에 자연과 세상에 대해 촌철살인의 번뜩이는 지혜를 담으려면 이러한 약속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든 물소리”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인데,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과 함께 우리나라에도 널리 소개된 바 있다. 내게 가장 좋아하는 하이쿠를 대라면 간노 다다토모의 이 작품을 든다. “이 숯도 한때는 흰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재가 되기 직전의 숯을 앞에 놓고 나무의 푸른 생을 상상한다는 것! 이 탁월한 상상력 앞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도 한 수 읽자.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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