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렴 / 문경희 ㅡ제4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부문 금상 수상작
한때 오지 중의 오지였다는 함양땅 상림이다. 아직도 이곳은 사람보다 꽃과 나무와 새들로 북적거린다. 그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자리는 이름 모를 풀들이 가녀린 목숨을 빼곡하게 꽂고 있다. 이따금 손 없는 바람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앉은자리를 지켜낸다. 개개의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를 우리는 숲이라 부른다.
숲의 구성원들은 경쾌한 팔분음표가 되는가 하면 묵직한 쉼표가 되기도 하며 웅장한 숲의 악장을 이끌고 나간다. 나서면 물러설 줄 알고, 취하면 버릴 줄도 아는 오래된 약속이 살아 있는 곳. 간만에 그들만의 세상에서 청정한 하루를 탁발해 볼 욕심으로 우중불사 달려왔다.
나무는 숲을 이루지만 인간은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어느 칼럼니스트가 꼬집어 놓은 글을 본 적이 있다. 서로를 물고 뜯는 추악함으로 난삽해진 세상을 들먹이며, 이기로 가득 찬 인간은 태생적으로 ‘함께’를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나도 숲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 숲은 목전의 이익에 눈과 귀가 먼 내게도 차별 없는 호의를 베풀어 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라고 할까. 숲에 들어 숲이 되기 위해 깊숙한 들숨날숨으로 호흡을 고른다.
숲의 위력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한껏 여유롭다. 그들도 시나브로 푸릇한 숲 한 채를 온몸으로 들앉히고 있는 중인가 보다. 세상이라는 악다구니를 벗어 낸 그들의 머리 위로 오랜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 꿀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한없이 서글프던 뉘앙스의 부사가 이리 포근한 단어였던가 싶어진다.
축축이 젖었어도, 숲은 제 보따리를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기꺼이 객으로 물러앉은 나는, 오감으로 들이치는 숲의 부산물들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화한 박하사탕 한 알을 머금은 듯 청량한 기운이 내 안으로 일어선다.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 거들먹거리는 인간도 이곳에서만은 목청을 높일 수 없겠다. 조각보처럼 살뜰하게 터를 나눠 잡은 목숨들이 저렇듯 선수를 치고 나서니 누군들 그들의 주인됨에 토를 달 수 있을 것인가.
빗줄기는 거세지만 마음은 점점 느긋해진다. 태엽을 잔뜩 감아놓은 장난감 기차처럼 허겁지겁 달려온 일상이 아닌가. 내가 주인이 되어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걸음걸음 나를 가볍게 만든다.
다음 장면을 위해 잠시 무대를 내려온 배우랄까. 숲에서는 세상 속의 배역으로 동분서주 하지 않아도 좋다. 오래전 내가 한 점의 생명체로 자리를 잡던 순간처럼, 지금 나는 세상의 일원도, 숲의 일원도 아니다. 마치 리셋reset 버튼을 누른 듯, 온몸의 촉수들이 다시 처음이라는 출발선상에 서게 될 것만 같다. 이렇듯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의 회귀를 두고 힐링이라 하는 게 아닐는지.
천년의 역사를 가진 상림의 초입에서 거대 연리목 한 그루를 만났다. 느티나무와 서어나무가 몸을 섞은 나무다. 둘이 하나 된 사연은 차치하고라도, 수종이 다른 나무가 연리목이 되어 살아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단다.
하나가 낯선 하나를 만나 익숙한 하나로 안착을 하기까지 장장 백 년. 바늘 끝조차 파고들 틈을 허락지 않는, 저 끈끈한 합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무의 오늘에 ‘사랑’이라는 핑크빛 꼬리표를 매달지만, 사랑이야말로 오만 감정으로 몸살을 앓아야 하는 혼돈의 블랙홀이 아니던가. 나무라고 어찌 순탄키만 했을까.
첫눈에 운명을 예감했든, 그렇고 그런 만남의 끝에 의기투합을 했든, 하나가 되는 수순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를 위해 순정한 이타를 꿈꾸지만, 꿈은 현실 앞에서 무참히 깨어지는 때가 더 많은 까닭이다. 수없이 부딪혀 상처 입으며, 서로를 향해 가시 돋친 언사를 남발했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날을 벼린 채 죽자사자 끄덩이를 잡은 날도 없지 않았을 게다.
나는 늘 내 눈 밖에 있다는 것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한계가 아닐까. 나는 여전히 나 대로를 고수하면서, 상대의 굳건한 아성만 내내 눈에 거슬린다. 사랑이라는 지고지순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평행선을 바라보며 좌절의 늪에 발목 잡힌 것도 부지수였을 터. 결국 내가 네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너 또한 온전히 내가 될 수 없다는 냉정한 논리로 마음에 굳은살을 앉히고서야 피차 조금은 무덤덤해졌을 법하다.
아이 셋을 낳은 나무꾼의 선녀처럼, 희망과 절망으로 자신을 무두질하는 동안 나이테도 버겁도록 불어났을 게다. 그러구러, 뜨거운 연모보다는 따스한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평화가 찾아왔지 싶다. 수없이 다가서고 멀어지기를 반복했지만 그것은 결국 다시 뜨겁게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였다고 나무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삶으로 얽히고설키는 모든 관계의 해답이 저 거룩한, 한 몸, 두 그루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모 프로그램에서 토렴을 보았다. 돼지국밥을 소개하면서 노하우가 토렴이라고 했다.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라내기를 거듭하며 밥이나 국수를 데우는 오래된 방식이란다.
주인장의 말에 의하면, 한 그릇의 국밥을 상에 올리기 위해 토렴을 열다섯 번이나 거친다. 국물이 밥알에 속속들이 배어들고, 끝까지 뜨끈함을 유지하게 만드는 그들만의 비결이란다. 밥과 국이 국밥으로 재탄생되는 비화랄까.
토렴은 퇴염退染이라는 염색의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염색을 하기 위해 천이 가진 원래의 색깔을 빼내는 작업이 퇴염이다.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를 지우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는 뜻일 게다. 그러고 보면 둘이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 토렴만한 것이 없겠다. 연리목 또한 토렴을 건너뛰지는 못했을 성 싶다.
사람으로 아프고, 사람으로 뒤척이던 시간들을 하나둘 끄집어내어 본다. 도망치듯 감행한 숲으로의 일탈이 더 깊은 현실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할까. 나와 타의 경계를 허물고 맵짠 시간을 요리하는 중이라고, 숲은 내 안의 아릿한 통증까지 조근 조근 다독여준다. 내가 숲이 되는 일은 요원하기만한데, 숲은 그새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들고 있었던가 보다.
숲이 차려낸 가을의 성찬 위로 관계의 한 수가 고명처럼 얹히고 있다.
글탁 / 문 경 희
"짜구 잡은 지 십이 년 됐어요…"
뭉툭한 경상도 억양 탓일까. 턱밑으로 바짝 들이대는 카메라에 곁눈도 주지 않고 하던 일에만 묵묵한 청년에게서 남다른 뚝심을 읽는다. 잘 익은 누런둥이 호박처럼 둥글 길쭉한 나무통에 구멍을 뚫고 속을 파내느라 여념이 없는 노옹을 흘낏 돌아보며 머쓱하게 내뱉는 말에는 '아직 멀었지요.'라는 한마디가 말줄임표로 매달려 있는 듯하다. 아버지이자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듯 사선으로 슬쩍 비쳐 앉은 품새가 단단히 그러진 금기의 벽처럼 섣부르게 욕심내기에는 언감생심인 경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다만 다른 상의 찬을 넘겨다 보는 아이처럼 부러운 기색만은 은연중에라도 감출 수가 없는지 자귀를 움켜쥔 투박한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백여 년에 걸쳐 삼대가 온전히 수작업으로만 목탁을 만든다는 장인 가계 부자의 모습이다.
목탁은 수행자로 하여금 잠잘 때조차 눈을 감지 않는다는 물고기처럼 공부에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만든 목어가 변형된 법구다. 하여 깨달음을 향한 구도자의 수행만큼이나 절절한 탄생의 고통을 겪어야 한단다. 딴에는 기계의 유혹에 쉬 넘어갈 턱이 없을 법도 하다. 그들 부자의 아름다운 고집을 보면 모든 것이 편리와 신속으로 죄 무장한 디지털 세상이라 하지만 여전히 지극한 아날로그의 정신은 도처에 살아남아 나름으로 엄연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겠다.
단단하고 표면이 갈라지지 않아 백 년 이상 된 살구나무 뿌리만을 고집한다는 노옹의 목탁 출산기는 이렇다. 삼 년 동안 개흙밭에 묻어 둔 살구나무 뿌리를 소금물에 적셔 가마솥에 찌는 것으로 작업은 시작된다. 충분히 찐 나무를 둥글게 깎아 골칼로 아가미와 눈, 꼬리를 형상화하고 속을 비워 낸 다음 일차소리 점검을 하는데 여기에서 합격점을 받지 못하면 얄짤없이 불쏘시개감으로 전락하고 만단다. 구실을 인정받은 목탁이 구토(붉은 흙)를 세 번, 들기름을 일곱 번 바르고 난 뒤 마침내 고고의 음을 내게 되기까지 어림잡아 삼 년 반에 총 열세 가지의 공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과 정성을 곱다시 머금고 태어난 목탁은 비로소 청아한 소리가 십 리 밖까지 가 닿는다니 이들 부자야말로 진정한 손맛의 달인이요, '꾼'과 '쟁이'가 아닐까. 대충 마름질을 끝낸 재목을 들고 청년이 불쑥 용기를 내 본다.
"제가 한 번 해 볼게요."
말없이 장비를 넘겨준 노옹은 아들의 하는 양을 멀찍이서 바라만 본다. 재벌로 다듬기를 하고 손잡이 홈을 판 몸체에 소리 구멍울 뚫는, 그야말로 목탁의 사활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공정이란다. 마치 삼매의 경지에다로 든 듯 연장을 잡은 이도, 지켜보는 이도 그저 숨을 죽인 채 한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아들의 역작을 받아 든 아버지의 평가만 남았다. 스승도, 제자도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런들 기대와 달리 문외한의 귀에도 도드라질 만치 소리가 영 시원찮으니 열 두 해의 연륜으로도 역부족인 무엇인가가 분명 더 있었던 게다.
"속을 깎아내는 게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야. 이건 화목火木이나 해야겠다."
대충 외양만 추스르며 살아온 모습을 된통 들켜 버린 듯 목탁에는 손도 안 댄 내속이 먼저 뜨끔하다. 무릇 비워냄이 곧 채워짐이라는 역설적인 논리를 여기서도 한 수 배운다. 일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내쳐 버리는 노옹과 달리 청년은 서운함을 넘어서 좀처럼 미련을 접지 못한다. 훗날을 기약하며 슬그머니 뒤춤으로 챙겨 놓는 아들을 향해, 버리는 일에 연연하게 되면 결코 좋은 목탁을 만들 수 없다는 다소 냉정한 질타로 그러잖아도 땡감을 씹은 듯했을 마음에 무두질을 한다. 보이지 않게 팽팽해진 두 사람의 신경전이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담금질이라 여기며 덩달아 안타까워지는 마음을 달래 본다. 평생을 혼신으로 걸어온 길에 반해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두어 평 남짓한 흙집이 전부라는 그들을 보면 진정한 '꾼'과 '쟁이'의 길이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글길로 들어선 지 겨우 다섯 해가 지났으니 나는 아직도 청년의 이력에는 절반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무쌍하게 내 이름표 글들을 세상으로 버젓이 내걸고 있는 마당이다. 타칭 글쟁이라는 범주에 검불처럼 은근쓸쩍 덧얹혀 목말을 타는 재미에 솔깃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아야 할 때다. 문인이라는 듣기에 따라 고상하고 달큼한 허명에 혹해서 심연의 소리를 외면하고 그럴듯한 미사여구만을 찾아 헤매지는 않았는지, 주렁주렁 꿰어 찬 금붙이처럼 보잘것없는 나를 치장하기 위해 먹잘 것 없는 책의 상을 차리려 섣부르게 조바심을 내지는 않는지 양심에 두툼한 볼록거울을 들이대어도 볼 일이다.
세계의 대문호 헤밍웨이의 일화는 더욱 서늘한 일침을 가한다. 헤밍웨이를 방문한 한 친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 못해 글을 쓰는 동안 방해받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서재로 직접 들어갔단다. 처음 본 친구의 글 쓰는 모습이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한쪽 다리로 껑충하게 선, 극도로 힘든 자세였던 것이다. 친구를 보자 헤밍웨이는 비로소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더란다.
"이렇게 한참 글을 쓰다 보면 힘이 들어서 더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거든. 쉽게 빨리 써진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는 법이지."
내 글 창고에는 수십 편의 글이 발신 대기 중이다. 그들은 대개가 짧은 문력과 현란한 졸필의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청해 주는 이가 있으면 마다 없이 달려 나가겠다는 얄팍한 정의에 불타고 있는지 모른다. 서늘한 글의 칼날 앞에 마음을 도사린 비겁도, 몇 자 그럴듯한 단어의 나열로 타인의 뇌관에 불을 지르려 하는 당찬 오만도 이미 꿰뚫은 듯 노옹의 일갈은 섣부르게 지면을 탐하던 내 변질된 초심을 과녁으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삐죽이 세상으로 내밀던 치기를 거둬들인다. 저들, 우직하리만치 정직한 부자가 만들어내는 목탁 소리처럼 내가 걷는 글의 길에서도 정도를 일러 줄 우레와 같은 목소리를 만나고 싶다. 먼 시간이 걸린다 해도, 빈번한 헛손질로 몸살을 앓을지라도 길이 다시 길이 되는 뜨거운 여정을 너끈히 견디고 어느 한 구절인들 마주한 이의 흉금을 울리고 흑백 사진처럼 수더분한 잔영으로 오래 남을 수 있는 글탁을 빚어 보고 싶은 것이다.
길은 다시 험하고 고독할 것이다. 지극히 홀로여야만 하는 장정을 위해 처음이듯 마음의 끈을 바투 죈다. 하늘이 정해 준 부정父情 앞에서도 결코 사심으로 흔들리지 않던 노옹의 진중한 눈빛을 숫돌 삼아 무뎌진 내 안의 자귀를 벼려야 할 터이다. 설익은 글편이나마, 정정하게 새벽을 울리는 목탁 소리는 고사하고라도 깨진 쪽박 소리만은 면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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