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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이야기 / 김 애 자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2. 2. 1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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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책 이야기 / 김 애 자

 

  산촌의 한낮은 우물 속처럼 고요하다. 밤새 어미 품이 그리워 고시랑거리던 새끼 고양이조차 낮잠이 곤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권태롭지 않은 것이 없다.

 이 평화스러운 권태를 즐기는 방법은 책 읽기가 제일이다. 창으로 비쳐드는 초가을 볕이 부시어 옥양목 주련을 내렸다. 이 가운데 책을 손에 들고 정물처럼 앉아 있으면 세상사가 아득하다.

 지난 해 여름에는 1981년 1월에 산 『열하일기』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잼처 읽었다. 좋은 책을 다시 읽으면 적조했던 스승을 찾아뵙는 듯 반가움과 함께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올 여름엔 『연암집(燕巖集)』을 피서지로 삼았다. 세 권이나 되는 이 책은 권당 400 쪽이 넘는다. 겨울까지 읽을 셈치고 산 것이다. 가능한 건 넘기지 않고 차근차근 읽으며 선생이 남긴 지적유산을 속속들이 챙길 요량이다.

 나는 지금도 책을 들면 선생이 제자 황상에게 일러준 '삼근계(三勤戒)'를 생각한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히 읽기를 채근했던 어록이다. 이와 같이 부지런히 읽다보면 책 읽는 진진한 재미가 생기고, 학문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고 황상에게 누누이 일러주던 지극한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어서이다. 따라서 '삼근계'는 나에게도 읽고 배우는 즐거움을 안겨주었고, 끝내는 글을 쓰게 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가 도래하면서 현대인들은 웨어러블(Wearlable) 컴퓨터와 줌 안에 드는 스마트워크와 온라인 무료 정보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든다. 책읽기는 물론 결재도 송금도 손안에 든 기기 하나면 해결된다. 신종 기기가 무소불능인 시대에 종이 책의 운명은 오래지 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적잖다.

 하지만 나는 낙관적이다. 10년 전에도 종이책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설왕설래 했었다. 2017년이면 신문마저 사라질 것이라 입방아를 찧었으나 종이신문은 여전히 이 산골까지 배달되고 있으며, 나 또한 10년 전 그대로 신문에서 소개되는 신간 중에 읽을 만한 책이 눈에 띄면 곧바로 교보문고로 주문을 한다.

 다산선생이 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30년 동안 꾸준히 독자층을 늘려 28쇄를 찍었다. 정민 선생인 쓴 『삶을 바꾼 만남』도 출간 6년 동안 16쇄를 찍었고 『열하일기』도 마찬가지다. 2백 년 전에도 젊은 유생들이 열광했던 이 책은 2백 년이 지나간 지금도 책을 볼 줄 아는 지성인들에게는 파워 클래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 선생이 육촌 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연七旬宴에 가는 사절단에 끼어들어 청나라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사진을 스캔하듯 치밀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기록한 견문기다. 이 견문기엔 시는 물론 수필과 소설과 일기까지 포함되었다. 유교적인 규범에 매이지 않고 여러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기록한 다양한 형식과 풍부한 내용에 당시 유교사상에 묶여 있던 서생들은 반하였다. 마침내 정조대왕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어 금서로 묶어놓았으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도저한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이게 좋은 책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의 저력은 앞으로도 종이책의 명줄을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더 희망적인 것은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시인과 소설가와 수필가와 인문학자들이 수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종이책을 애독하는 진짜 선비들이고 작가들이다. 이들은 밤잠을 줄여가면서 책을 손에 들고 천천히 내용을 충분하게 음미하면서 읽을 줄 안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곤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만나면 붉은 볼펜으로 언더 라인을 친다. 이 조용한 기쁨을 나는 시력이 허락할 때까지 누릴 것이다.

 사람들은 내적 전실함을 밖으로 표출하고 싶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할수록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전실함을 자신의 능력으로 채우지 못할 때는 무엇인가로 대체하고 싶어 한다. 인문학은 바로 그런 이들을 연금술적으로 감싸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전자매체가 아무리 판을 쳐도 종이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덧 산그늘이 마당으로 내리고, 추녀 끝에서 울리는 풍경소리가 소슬하다. 초가을 하루가 책 이야기로 조촐히 저물어가고 있다.

 

 

                                         겨울 이야기 / 김애자

 

 산촌의 겨울은 길고 지루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은 적막하고, 들은 허허로우며 거멀장처럼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햇살조차 궁핍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춥고 쓸쓸지 않은 게 없다.

 

이래서 눈 내리는 날을 기다리게 된다. 진종일 눈이 오다가 그치고 다시 흩날리는 날이면 마른 잡목들이 눈꽃을 피우고, 그만그만한 집들도 자욱하게 퍼붓는 눈발에 묻힌다.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저녁연기마저 잠포록한 기압의 무게에 눌려 추녀 밑으로 스멀스멀 내리깔린다.

 

이런 저녁 답엔 검둥이란 놈만 신바람이 난다. 공연히 눈 속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혀를 내밀어 맛을 보기도 한다. 그도 심심하면 집 앞과 장독대로 길을 내는 주인에게 따라붙어 말썽을 부린다.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가 하면, 물색없이 싸리비 끝을 물겠다고 덤벼들다가 ‘네 집으로 들어가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고서야 집으로 들어가선 앞발로 턱을 괴고 엎드린다. 제가 찍어 놓은 발자국 위로 난분분 떨어지는 눈송이를 지켜보는 녀석은 짖을 일없는 산촌의 무료함이 답답해 죽을상이다.

 

이리되면 네 시간 간격으로 들어오는 마을버스도 끊긴다. 가풀진 이역재를 넘지 못해서다. 더러 장에 나갔던 사람들도 서둘러 택시비를 추렴하여 집으로 들어와 이른 저녁상을 물리고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화면에서 앵커들이 전해주는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늙은 아내는 들보에 메주가 매달린 한쪽 구석에서 콩나물시루에 물을 준다. 안노인의 어깨는 대추나무에 낀 겨우살이처럼 앙상한데, 시루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손자 녀석들 오줌발만치나 시원스럽다.

 

눈 내리는 밤에는 시집을 꺼내 읽는다. 무쇠다리를 건너온 북방의 시인 이용악 선생을 만나 검은 눈동자가 바다처럼 푸르고, 얼굴이 까무스레한 전라도 가시내의 속사정을 들어본다. 또는 소월과 함께 진두강 가람가에 서서,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조마조마한 제 마음을 제가 누그릴 줄 아는 지혜를 궁굴리다 보면 뜻 모를 설움이 목젖을 누른다.

 

그러다가 목월 선생의 시<가정>에 이르면 이런 감상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고 만다.

알전등이 켜질 무렵, 시인의 들깐에는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이 놓여 있다. 十九文半의 가장은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와 코가 납작한 육 문 삼짜리 막내둥이 옆에 다 헤진 구두를 벗어 놓고, 자신에게 보내는 연민이 실로 눈물겹다.

 

“이랫목에 모인 / 아홉 마리 강아지야 / 강아지 같은 것들아 /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 /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돌아왔다. / 아니 지상에는 /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 존재한다. /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

 

강아지 같은 새끼들 옆으로 돌아와 어설프게 미소 짓는 지아비가 어찌 시인뿐이겠는가.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아파트 어귀에서 군고구마를 굽는 사내도 그러하리라. 고단한 몸 뉘일 방안에도 아비의 눈을, 혹은 손가락을 빼 닮은 사랑스러운 새끼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어느 집이고 자식은 희망이고 버팀목이다. 가족들의 밥그릇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은 때로는 눈과 얼음의 길에 넘어져 혼자 울기도 한다. 늦은 밤 도시의 뒷골목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어느 가장의 뒷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포장마차에 혼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뜰에 문수가 다른 여러 켤레의 신발들이 놓여 있을 때는, 생활은 곤궁할지라도 애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아 행복하다. 폐사廢寺처럼 낡은 둥지에서 일 년에 대여섯 번이나 찾아오는 자식들을 기다리며 노구를 일으켜 혼자 밥을 지어 먹는 것보다 몇 배는 행복하다.

눈발이 굵어지면 된새막이 대숲에서 후드득 눈덩이가 떨어진다. 짧은 소음이 사라지고 나면 정적은 더 깊어진다. 세상의 소리가 다 끊어진 공적空寂은 산중에서 누리는 독락獨樂이다. 하지만 독락도 오래가면 외로움에 심신이 야윈다. 뒷동산에서 부엉이란 놈까지 청승을 떨어대면 몸을 뒤척이고 뒤척이다가 그에 옷가지를 걸치고 뜰로 내려서면 천지가 흰빛이다. 꽃도 지고, 잎도 지고 향기도 사라진 온 산하가 흰빛으로 순연하다.

 

그러나 눈이 그치고 난 후, 수은주의 눈금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질 양이면 두어 달 족히 발이 묶인다. 저수지를 끼고 이어진 산굽이는 쇠 움지라 한 번 눈이 얼어붙으면 봄이 올 때까지는 산 밖 출입이 어렵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지면 새로 들인 별채(聽香堂)로 건너간다. 문명의 기기라고는 형광등뿐이다. 화로에 물을 올려놓고 눈을 감고 있으면, 대숲에서 이는 바람소리와 찻물 끓는 소리가 귀를 맑게 한다. 세상은 멀고, 인간사의 옳고 그름에도 끼어들지 않으니 마음 또한 한갓지다. 이렇게 지내다보면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한사코 돌아와 뜰에 매화를 피우리라.

어느새 밤도 자시子時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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