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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창작의 주인들 / 우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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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대명화 2022. 1. 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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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창작의 주인들 / 우한용


Ⅰ. 표현의욕은 삶의 의욕


사람이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욕구이다. 어린이에게 말을 안 가르치면 정신이상이 되거나 결국은 자라지 못하고 죽고 만다는 인류학계의 보고도 있다. 신라 시대 임금님의 모자 만드는 일을 하던 복두장( 頭匠)은,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는 이야기를 대숲에 가서 했다. 숲의 나무들이 그 이야기를 세상에 퍼뜨렸다. 인간의 표현욕구가 얼마나 본원적이고 강렬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들이다.


그런데 이전부터, 우리는 말이 많은 사람을 기피하고 폄하(貶下)하는 버릇이 있었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것을 그대로 믿은 결과인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말은 번주그레하게 하는데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을 자주 본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을 하는 사람치고 어진 이가 없다는 공자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 많아 그런지, 말을 잘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한 특징인 듯하다. "소죽은 귀신이 씌인 사람처럼 말이 없는" 사람은 남을 답답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개그[開口?]가 판을 친다. 쓸데없는 말을 아무데서나 주절거리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혼자 말을 독판치는 사람을 두고, "어디 말 못하고 죽은 귀신이 있나?" 하면서 나무라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여우같은 며느리하고는 살아도 곰같은 며느리하고는 못 산다."는 것이다. 말을 오사바사 잘 하는 며느리가 곰처럼 말 않는 며느리보다 낫다는 이야기다.


말을 않는 침묵의 군중과 말이 너무 많은 훤화(喧譁)와 용장(冗長)의 무리들, 우리 언어문화는 그 양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말이 적은 사람은 대체로 믿음을 주는 편이다. 그러나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어서 말이 없는 사람은 언어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런 사람은 깊은 생각을 지닐 수 없다. 그에게 삶의 환희나 고통이 절실할 수 없다. 세상에 보고, 느끼고, 행한 것을 이야기할 일이 많아야 사는 듯이 사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의욕을 가진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


글을 쓰고자 하는 표현의욕은 삶의 의욕 그 자체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과 나누고 싶은 사람, 남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세계를 열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우리가 염원하는 세상이다. 그런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표현의욕은 스스로 만든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스스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표현 의욕을 내부에 길러둘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남에게 이야기할 이야기감을 안에 축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리라. 이야기감을 안에 쌓아 놓는 것은 살아 있는 감각으로 관찰하고 느끼고 읽고 해서 스스로 쌓는 것이지 시간이 간다고 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인생이 거저 우리를 향해 다가오지 않는다.



Ⅱ. 우리는 내 자서전의 주인공


우리는 철이 들면서 내가 누구인가 묻기도 하고, 그 물음이 잘 안 풀려 고민하기도 한다. 그 고민에 지쳐 생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일상 생활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고 끊임없이 묻는다면, 아마 정신분열증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따금, 문득, 삶에 대한 자각이 오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오늘의 나를 형성시켜 놓은 이전의 나는 누구인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한 물음은 서사성을 띠는 것이라서 시간축을 따라가야 이야기가 풀린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따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자기 삶을 스스로 정리하며 그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따져보는 가운데 자신의 삶에 확실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각자 자신의 자서전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자서전은 완성된 삶의 여정을 돌아보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삶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자서전의 자장(磁場)은 과거로 향하기도 하고 미래로 뻗어나가기도 한다. 자서전을 쓴다면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되짚어보고 미래를 추측해 보면서 꿈을 꾸게 된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인 사람들에게 자서전을 쓰라면 아마 의아해 할 것이다. 자서전이라면 남에게 중후한 교훈을 주거나 남다른 생의 체험이 있어야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들 하는 것 같다. 꼭 그럴까?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우리가 나이가 몇인데 자서전이라니. 당치않은 소리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대들 나이는 아마 15세에서 많아야 19세가 아닐까 싶다. 어른들이 본다면 아직 어린 나이이다. 그러나 16세는 춘향이와 이도령이 열애(熱愛)에 빠진 나이이고, 20세는 남이 장군(南怡將軍)이 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불러 줄 것인가 하던 바로 그 나이이다. 세상에 겁날 것도 없고, 온통 가능성의 광휘가 찬연하게 빛줄기를 뿜어올릴 만한 그런 나이다.


사실 나이를 얼마만큼 먹고 나면 세상에 신통한 것이 별로 없게 된다. 그렇고 그런 세상으로 비치게 된다. 남들에 대한 노여움도 삭혀 나가고 날이 선 성격도 너그럽고 부드러워진다. 삶의 의욕이 줄어들고 새로운 발견에 환희하는 계기가 점점 드물어진다. 따라서 세상사 쓰고 달고를 열올려 따지지 않고 그저 지나간다. 여러분의 시대는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많은 시절이다. 따라서 할 이야기가 많은 시대이다. 늙은이들이 쓰는 자서전은 돌아보는 '회고록'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 이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자서전에 미래를 이끌어 쓸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젊은이들에게만 허용되는 천혜의 특권이다.


자서전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데서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욱 분명해지고, 오늘의 나를 만든 맥락이 선명한 논리로 포착되는 것이다. 중학교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나는 왜 고등학교에 왔는가? 고등학교에 오기까지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그러한 삶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내 삶은 더욱 옹골찬 삶으로 정리되고 의미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남들의 내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이 내 사색의 스펙트럼에 따라 정리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삶이 충실해지고 성장이 보장된다. 나 스스로 돌아보지 않는 삶은 남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때때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라. 그리고 그 되돌아본 즐거움과 회한을 글로 쓰라. 앞으로 전개될 미래를, 글을 쓰는 가운데, 찬란하게 그려 보아라. 그것이 문학인지 아닌지는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자. 다만, 내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해 보는 지혜는 잊지 않아야 한다. 남의 삶에서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은 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를 하면서 남을 바라볼 때, 내 자신의 성장은 비약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서전을 쓰는 일 자체가 성장이며, 삶의 충실을 기하는 일이다.



Ⅲ. 연애편지는 창작의 요람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 성적 또한 신통치 않아, 이러다가는 대학에 가기도 어렵겠다 하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 무렵, 내가 이러다가 죽는다면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부모형제 말고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 줄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가공(可恐)할 만한 일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데, 영원히 세상에서 없어지는데, 내 존재가 소멸하는 그 순간에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때 나는 평생을 혼자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 하나 없이 사는 것은 얼마나 삭막한 일인가. 내가 그를 위해 온몸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사랑의 대상을 꼭 이성(異性)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대상은 한없이 넓게 펼쳐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 선생님, 선배, 친지, 나아가서는 외국의 젊은이들 누구라도 좋다. 그들을 향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써 보자. 이미 인간에 대해서는 증오와 혐오만이 남은 사람이라면, 산과 바다라도 좋고, 하다못해 돌도 좋고, 풀이거나 나무거나, 아니면 표지가 낡은 한 권의 책이라도 좋다. 그런 것들을 미치게 좋아하고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쓰되 절절한 심정으로 써야 한다. 상대방이 왜 좋은지, 그 심정이 왜 절절한지 이야기하는 중에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너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에게 어떤 변화가 왔는지 이야기하는 동안에, 나는 나를 관찰하게 된다.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전에 알지 못하던 점이 튀어나온다. 참으로 부끄러운 부분도 아울러 드러난다. 나의 장점과 잘나지 못한 구석이 함께 나타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객관화하는 일이 된다. 객관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철학적 사고를 하게 된다. 철학적 사고란 다른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내가 그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는 내가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 일이 철학적 사고이다. 사랑이 그런 철학을 가져오는가 하고 되묻는다면, 그것은 다시 철학에 대한 철학이다.

유행가에 "내가 왜 이럴까……"하고 시작하는 것이 있다. 사람에서 비롯되는 철학은 사랑이라는 것의 신비 속에서 내가 왜 이러는가 하고 철학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면, 우선 그 대상을 맹목[blindness]으로 바라본다. 그런 맹목에 한번 빠져보는 것은 생의 충일감을 불러온다. 내 기쁨이 그의 기쁨이고, 내 슬픔은 곧 그의 가슴으로 전달되어 그의 눈에서 뜨겁고 짠 눈물이 한없이, 한없이 흘러내릴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마 그/녀도 아무런 존재의의를 느끼지 못하고 세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늘나라가 없다면 지옥이나 연옥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하면서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중에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인간 존재의 오묘함과 신비함을 깨닫는 계기는 사랑과 더불어 마련된다.
몰입과 거리두기, 익애(溺愛)와 평정심, 열정과 이성 그 사이를 오가는 중에 우리는 가슴으로 머리로 삶의 열도를 느낀다. 사랑하고,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는 한 단계 성장한다. 문학은 삶을 발견하는 기법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문학은 삶을 구축하는 과정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는 문학의 자율성이라 할 수 있는 면이다. 사랑이 무엇을 위한 사랑이 되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이 무엇인가 봉사해야 할 대상이 분명할 때 문학은 도구성으로 인해 지나친 부담을 지게 된다. 문학에서 자유가 절대로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랑하라. 그리고 용감하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하라. 그리고 글을 쓰라. 편지를 쓰거나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거나 그것이 사랑인 바에야 형식이 무슨 대수겠는가. 연애편지가 문학의 보금자리라는 것은 이러한 뜻이다.



Ⅳ. 비유하기의 매력


한겨울 어느 산사(山寺)에 갔다. 하늘은 깨어질 듯 투명하게 개어 올라가 대웅전 지붕 위 용마루에 걸려 있었다. 단청이 곱게 삭아 어우러진 대웅전 옆으로 느티나무들이 서 있고, 올려다보면 느티나무 잔가지들이 파랗게 개어 올라간 하늘에 실낱같은 손을 잠그고 하늘을 가지럼태웠다. 대웅전에는 불상들이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루바닥을 슬금슬금 기어 나가 느티나무 뿌리로 들어갔다. 느티나무는 육중한 둥지에 햇살을 받고 그 잔잔한 잔가지로는 수많은 영혼의 새들이 날개를 파닥였다. 그 새들은 산사로 찾아들어 머리를 물에 적시는 영혼들이었다. 영혼들은 느티나무 가지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자디잔 가지들은 미세한 경련으로 떨었다. 그 떨고 있는 울림은 하늘로 퍼져나가 푸른 하늘에다 작은 파랑(波浪)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내 속에서 미묘한 울림이 울려 퍼지는 것을 느끼며 산사를 걸어 나왔다.


비유란 그런 것이다.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자기 모양대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법당의 부처님-미소-느티나무뿌리-둥지-자디잔 가지들-그리고 하늘로 퍼져나가는 맑은 영혼의 울림. 생각의 줄기가 그렇게 뻗어나가는 것은 비유의 힘 때문이다. 내가 나무가 되고, 나무처럼 숨쉬고, 나무가 되어 하늘로 손을 뻗어 속에 울울울 흐르는 젊은 핏줄이 하늘로 퍼져나가고. 그렇게 핏줄이 하늘로 흐르는 영혼의 물줄기가 되는 것. 그것이 비유의 매력이다.


비유를 사용하면 우리 주변의 사물이 아주 친밀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 자주 다운되거나 작동이 잘 안 되면 "얘는 맛이 간 거 같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컴퓨터를 얘라고 하는 것은 컴퓨터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컴퓨터와 사람을 등치(等置)하는 것이 비유의 기본 원리이다. 비유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것은 같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래서 흔히 A = B 라는 이상한 공식으로 비유를 설명하곤 한다. 나무는 나무이고 사람은 사람일 뿐 나무가 무슨 팔을 들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매우 비시적(非詩的)인 발상이다. 그런 사람은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하고 노래하지 못한다.


우리는 비유를 통해 내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체험을 하게 된다. 비유의 세계에서는 현실적으로 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무엇이든지 가능한 것이 비유의 세계이다. 나무를 불러 잠재울 수도 있고, 꽃을 향해 사랑을 고백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비유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살아나 나와 이야기하고 함께 눈빛을 반짝이며 웃을 수 있다. 비유는 상상력과 통한다. 상상의 힘을 빌 때 우리에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것이 시의 매력이다. 비유로 글을 쓴다면 그 글들은 바탕에 시심(詩心)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비유를 이해할 때, 문학은 한 덩어리 태양이 되어 우리 정신의 지평선 위에 찬연한 빛을 뿜으면서 떠오르는 것이다.

 


Ⅴ. 허구, 그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인간의 역사는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겠다는 꿈의 기록이다. 인간이 하늘을 날겠다는 것은 오로지 꿈이었다. [장자]에 나오는 '대붕'의 이야기는 2500년 전, 인간이 하늘을 나는 장대한 꿈을 형상화한 것이다. 물론 상상의 새가 나는 이야기이지만 거기에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환상과 욕망이 잠복되어 있다. 그 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하늘을 나는 시도를 했다. 결국 라이트형제는 인간이 하늘을 나는 꿈을 실현했다.


그뿐인가. 달에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신화 혹은 전설은 인간이 달에 발을 디딤으로써 깨어졌다. 달에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안다. 우리들은 이제 달에서 꾸미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화성으로, 목성으로, 그리고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을 지나 우주 밖으로까지 뻗어 나아간다. 그렇게 뻗어 나가는 이야기는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돌릴 수도 있다. 극히 미세한 세계, 나노메터(nanometre)라는 단위라야 계산이 가능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꾸밀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없었던 일을 이야기로 꾸며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왔다. 이는 소설가들의 특허물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런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왔고, 자신을 키워온 것이다.


허구적 상상력은 결국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다. 물론 가능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패기만만한 도전이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으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영역을 확대해왔다. 그러한 가능성을 각 영역의 예술가들이 치열하게 실험해 왔다. 그 가능성을 극한까지 몰고간 것은 역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세계를 다시 설계하고 우주를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그리곤 했다. 천국의 열락(悅樂)과 지옥의 형벌을 만들어 낸 것도 인간의 허구적 상상력 덕분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이야기를 꾸미는 데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를 꾸며 볼 줄 아는 능력. 그 능력은 우리들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를 경험의 영역으로 이끌어들인다.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세계를 그릴 수도 있다. 일상에서는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허구의 세계이다. 이야기는, 나와 남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소통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되었더라면" 하는 가정으로 역사를 바꾸어 쓸 수도 있다. 그런 허구적 이야기 쓰기를 대표하는 것이 아마 소설일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허구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허구성은 소설의 본질이지만 소설 자체는 아니다. 우리들의 과업이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쓰는 것은 전문가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 살고 싶은 세계, 현재의 환경이 개선되었으면 하는 방향, 등을 글로 쓴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허구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여러분 내부에 잠자고 있는 허구적 상상력을 불러내라. 불러내어 활동하게 하라. 새로운 세계가 여러분 앞에 황홀하게 펼쳐지리라. 이전에 몰랐던 인간의 모습이 햇빛 아래 적나라하게 모양을 드러내보일 것이다. 내 존재가 다른 존재를 만나 비상하는 날개짓을 볼 수 있으리라.


글을 쓰는 과정을 중시하라. 글을 쓰는 과정은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붙들고 딩구는 처절한 삶의 전장(戰場)이다. 그 전투에서 여러분은 자신을 확인하고 남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자아의 실상을 드러냄으로써 훤칠한 성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성장을 위해 다른 생각을 떨치고, 지금 글쓰기로 달려들어 돌진하라. 거기 여러분의 삶을 펼칠 글의 광야가 열린다.

 

머리에서 힘을 빼자. 글을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글쓰기의 두려움도 없어진다.

# 좋은 글쓰기의 일반원리

1. 글을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글쓰기의 두려움도 없어진다.
2. 名文보다는 ‘정확하고 쉬우며 짧은’문장이다.
3. 修飾語보다는 명사와 동사이다.
4. 무엇을 쓸 것인가. 글의 主題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5. 낱말의 중복을 최소화한다. 글도 경제적이라야 한다.
6. 모든 글은 30%를 줄일 수 있다. 압축해야 폭발력이 생긴다.
7. 글의 리듬(韻律)을 맞추자. 글을 써놓고 소리내어 읽어본다.
8. 漢子를 適所에 섞어 쓰면 읽기 쉽고 이해가 빠르다.
9. 긴 글엔 긴장이 유지되어야 한다.
10. 語彙力은 독서의 축적이다.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11. ‘잘 쓰기’보다는 ‘많이 쓰기’이다.
12. 글의 원료는 語彙力과 자료와 생각이다.
13. 글은 즐겁게 써야 한다. 글은 말처럼 인간의 본능이다.
14. 名言, 名文, 名연설집, 그리고 사전류를 곁에 둔다.

 

#제목 달기

1. 제목은 내용의 요약이고, 미끼이며, 主題이다.
2. 제목은 글자수의 제한을 받는다.
3. 독자들이 읽을까말까를 결정하는 것은 제목을 통해서이다.
4. 제목은 필자가 다는 것이 원칙이나 편집자가 최종적인 권한이 있다.
5. 제목을 뽑는 것은 레이아웃(사진 그림 등) 및 기사비중 결정과 함께 잡지, 신문 편집의 3대 핵심 요소이다.
6. 제목을 보면 신문, 잡지, 기자들의 자질과 안목을 알 수 있다.
7. 제목의 내용이 기사의 등급을 결정한다.
8. 무슨 기사가 중요하고 무슨 기사가 덜 중요하느냐의 판단은 기자의 자기능력 평가이다. 뉴스밸류 감각이 좋은 기자가 특종을 많이 한다.
9. 제목과 跋文(뽑음글)의 조화와 보완과 대조가 기사를 입체감 있게 만든다.
10. 제목은 詩이기도 하다.


# 제목 달기의 각론

가. 제목은 기사를 읽은 직후 그 느낌이 살아 있을 때 뽑아야 한다.
나. 제목은 우선 흥미유발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한다.
다. 과장해선 안되지만 평범해서도 안된다.
라. 새로운 사실을 부각시켜야 한다.
마. 제목은 구체적이거나 본질적이거나 상징적이다.
바. 단어의 중복이 없어야 한다. 기사도 중복은 허용되지 않는데 하물며 제목에서랴.
사. 말의 묘미를 살려야 한다. ‘KAL에 칼을 댄다’, ‘Future of Freedom’, ‘12.12사건이 녹음되었다’, ‘장군들의 밤’, ‘평양은 비가 내린다’, ‘북한은 달러위조, 남한은 논문위조’, ‘국제사기단을 편드는 정권사기단’.
아. 상징적인 낱말 하나가 가장 좋은 제목이 될 수 있다.
자: 大제목과 副제목과 小제목의 역할 분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차: 제목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카: 제목으로 모든 것을 다 보여주겠다고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독자는 의외로 이해력과 추리력이 높다.
타: 造語를 만들어 유행시키는 것은 최고의 제목달기이다. ‘뉴 라이트’ ‘차떼기’ ‘퍼주기’ ‘연방제 事變’ 등은 국민들의 여론에도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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