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한국적 에로티시즘 / 박 문 하
언젠가 시인 천상병의 수필 속에 여름철 송도 해수욕장에서 진로소주 한 병을 다 기울이고 나니 마치 진시황이 된 듯 비키니 스타일의 해수욕장 미녀들이 모두 삼천궁녀로 보이더라는 독백을 듣고 고소를 금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도심에 위치한 2층 건물의 내 병원 진찰실에서 한여름의 무더위 때문에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거리를 내다보고 앉아 있으면 미니와 핫팬츠의 아름다운 밀림 속에 소요하는 듯 돈 안 들이고 즐거이 피서를 즐길 수가 있다.
이러한 아국적인 풍경 속에서 어쩌다가 잠자리 날개처럼 시원하고 격조 있는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을 발견하게 되면 마치 옛날 연인을 만난 듯이 감흥이 새로워진다. 운치 있고 격조 높은 에로티즘은 노출을 서두르는 것이 아니고 모시 치마저고리처럼 어떻게 품위 있게 가리느냐에 있는 것 같다. ‘모시야 적삼 안섶 안에 연적硯滴 같은 저 젖 보소, 담배씨만큼만 보고 가소 많이 보면 병납니더’ 경상도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민요의 한 토막이다. 여름철 모시 적삼 안섶 안에 아련히 비치는 이조백자의 연적 같은 오붓한 여인의 젖통, 좁쌀의 10분의 1도 못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담배씨만큼 쪼끔만 보고 가이소 그 이상 더 보면 상사병이 난다고 읊조린 우리네 조상들의 멋진 에로티즘을 오늘의 경박하고 값싼 에로티즘에 어찌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여름철 에로티즘을 말할 때 뺄 수가 없는 것 중 부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부채라고 하면 여름철에 바람을 일게 하거나 서화書畵를 새겨서 풍류의 멋을 즐기는 것쯤으로만 알고 있지마는 여름철에 아낙네들이 샘가에서나 계곡에 젖통을 내놓고 등물을 치든가 멱을 감을 때 그 앞을 지나게 되는 한량들은 부채로써 슬쩍 눈앞을 가려줌으로 해서 아낙네들의 부끄러움을 덜어주고 부채 임자는 또 제대로 부채 그늘에 얼굴을 숨기고 아름다운 여체의 문요기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 선조 때의 문장가며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지낸바 있는 백호 임제白湖 林悌는 사랑하는 나이 어린 기생에게 부채에다가 다음과 같은 연시戀詩를 써 보낸 일이 있었다. ‘내가 이 겨울날에 부채를 보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 너는 지금 나이 어려서 어찌 알 수 있겠는가마는 홀로 누어 임 그리워 잠 못 드는 밤중은 6월 염천보다도 더 가슴속이 타는 것이니 내가 이 부채를 보내는 뜻은 어린 너의 애타는 가슴속을 조금이라도 삭혀줄까 함이 크다.’
천한 외국의 흉내만 내지 말고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이러한 격조 높은 멋진 에로티즘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만 하겠다.
돌고기 안주 / 박 문 하
여름 한철 동안은 병원의 진료시간이 낮과 밤이 서로 뒤바뀌는 경우가 많다. 시원한 틈을 타서 환자들이 아침이나 밤중에만 병원에 몰려들기 때문에 더위가 한창인 대낮에는 병원이 텅텅 비워져 있을 때가 많다. 이러한 한낮이면 나는 여름 방학 동안에 집에서 놀고 있는 열 살짜리 막내딸인 민옥이를 데리고 곧잘 가까운 시냇가로 나간다.
포장이 잘된 시외도로를 버스로 약 30분 동안만 달리면 두구동과 양산 사이 경계선을 끼고 흐르는 큰 시냇가에 다다른다. 천변川邊 속에서는 한가로운 매미의 울음소리가 한창이다. 지금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고행풍경이 되살아 난 것 같다.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맑은 시냇물 속에 풍덩 뛰어들면 그 상쾌한 맛이란 해수욕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여름철에 북적거리는 바다보다도 조용한 시냇가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은 근년에 와서 차차 사람대하기가 싫어지는 반면에 수목이나 수석 같은 자연물레 정을 붙이게 된 때문이다. 나무 기르기보다도 수석 취미는 나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는 더욱 안성맞춤이어서 일단 채집만 해 놓으면 수장收藏하는 데는 힘이 들지 않아서 좋다. 그래서 몇몇 동호인들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먼저 대한수석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2회에 걸쳐서 수석전시회를 가진 바도 있다.
수석이란 용어는 산수경석山水景石이란 말을 줄인 말인데 그 산지에 따라서 산석山石 천석川石 해석海石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돌을 빼 놓고서는 별로 신통한 것이 없기 때문에 여름철의 채석採石은 비가 자주 내려서 냇물이 범람하여 물속에 파묻힌 돌이 노출되고 또 냇가의 돌이 깨끗이 씻어지는 천석川石이 가장 좋다.
금년 여름 들어서 벌써 10여 차례나 이곳 두구동 냇가를 찾았으나 번번이 빈손으로만 돌아갔건 것이 오늘은 간만에 꿈이 좋았던 탓인지 물고기 모양의 근사한 물형석物形石 한 개를 주었다. 너무나 마음이 흡족해서 천변가 주막에 들려서 돌을 술상 위에다 올려놓고 막걸리 한 잔을 청했다. 40대 주모는 돌 모양을 알아보았는지 “진짜 고기는 잡지 않고 돌 고기를 잡았군요.”하고는 웃는다.
돌 고기 한번 쳐다보고 술 한 잔 마시고 술 한 잔 마시고는 돌 고기를 어루만지는 내 모습이 하도 우스웠던지 주모 아주머니는 “옛날에 진주 자리꼽재가는 그래도 생선이라고 사서 달아 놓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밥을 넘겼다는데 돌덩어리만 쳐다보고 술 마시는 사람은 내 생전에 처음이야!” 하고는 투덜거린다. 그러나 오늘따라 술맛은 한결 더 풍미롭고 돌을 어루만지는 내 마음속에는 한 여름의 무더위쯤 간곳이 없고 다만 시원한 청풍만이 오락가락할 뿐이다.
맥주내기 / 박 문 하
낭만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것이 가정 밖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것은 우리네 가정이나 부부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천하에 제일가는 사위를 구하기 위하여 해와 구름과 바람을 찾아서 밖으로만 헤매었던 두더지가 그것을 끝내 찾지 못하고 지쳐서 제 집에 돌아 왔을 때 의외에도 해와 구름과 바람보다 더한 행복이 제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우화처럼 낭만의 주소도 연륜과 더불어 차차 그 방향이 제 집과 아내에게로 되돌아가는 모양이다.
숨 막히는 무더운 여름밤에 나는 이따금씩 아내를 동반하고 바닷가로 나간다. 그것이 으스름달밤이면 더욱 좋다. 넓은 바다 위에 소녀처럼 수줍은 달빛이 비치면 40대의 아내도 한결 낭만에 젖는다. 장터처럼 복작이던 해수욕장도 밤이 되면 몇 쌍의 아베크들만 남아서 달빛아래 사랑을 속삭일 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바다의 생리를 배운다. 파도의 손질은 몇 만 년 동안 바위를 애무해도 늙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 부부도 기분이 나면 바닷가 조용한 여관을 찾아서 하룻밤 사랑의 신방을 꾸며보기도 하는 것이다.
밤 열두 시가 지나서 여관 방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잠을 깼다. 토요일 밤 풍기 단속을 나왔다는 경찰관들이다. 그러나 겁날 것은 조금도 없다. 나는 누운 채로 그들을 맞는다.
“부부 동반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 하시지요.”
“그럼 연인끼리라고 할까요.?”
“그것이 사고죠. 요즘 연인들이란 유부녀가 태반이니 깐요.”
“그 유부녀의 남편이 바로 나 자신일 때는 괜찮지 않소.”
“농담은 마시고 우리는 지금 장난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공무를 집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안하지만 파출소까지 가시지요.”
“천만의 말씀, 가정의 날에 표창을 받지는 못할망정 풍기 단속에 걸리다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그럼 선생님 댁에 전화를 걸어 보아도 좋습니까?”
이것 협박조다. 잠깐 내 얼굴에 당혹이 아닌 장난기가 스친다.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전화를 걸어서 만일에 우리가 부부인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으나 반대로 우리가 부부인 것이 확인될 때는 당신들이 맥주 한 박스를 사겠소?”
“좋소.”
사나이와 사나이의 약속이었다. 이래서 전화의 대화가 몇 번 오가고 난 뒤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맥주 한 박스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다. 억울하게 맥주 한 박스를 빼앗겼어도 사나이의 약속이라 어쩔 수 없이 함께 얼근히 취한 형사들이 자리를 뜨면서 한다는 말이 “선생님은 악질이야!” 나는 그 악질이란 말이 밉지 않아서 그 다음날 그들을 비어홀로 불내어서 톡톡히 한 턱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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