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 / 김 희 자
만물이 제 깊이를 가늠하고자 눈을 뜨는 봄이다. 유연하게 누운 지붕 너머로 연초록 잎들이 사근사근 어깨춤을 춘다. 긴 겨울이 떠난 자리에 봄이 찾아와 자리를 틀었다. 그늘진 구석구석을 봄볕이 들어가 보시를 한다. 봄 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영원이 머무는 곳, 천년을 하루로 산다는 부석사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가고 왔다. 스쳐 지나간 시간들은 저마다 세월의 흔적을 남기듯 배흘림기둥에도 하나 둘 금이 가 있다. 봄물이 도는 육신을 배흘림기둥에 의지하며 살포시 기대섰다.
등에서 묵직한 기운이 느껴진다. 조화로운 미와 무수한 시간을 떠받들고 선 배흘림기둥의 자태에 고혹된다. 배흘림은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볼록하게 깎는 기법으로 고개를 사뿐히 든 지붕 추녀를 받치고 섰다. 둥그스름한 기둥이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유해 보인다. 추녀를 받친 기둥의 높이와 굵기가 듬직한 중년의 모습을 닮았다. 진득한 배짱이 없었다면 천년이 훌쩍 넘는 일월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으랴.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빛을 발하는 만물들도 돌고 도는 자연에서 만들어진다. 이 기둥 또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끈기와 고집으로 긴 세월을 버텨 왔으리라. 침묵하는 기둥도 힘이 들기는 매한가지다. 세월의 강을 건너온 이야기가 살금살금 말을 걸어온다.
부석사의 역사는 무량수전을 변함없이 지탱하고 선 이 배흘림기둥의 배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진중한 기둥에 기대어 서 있으면 등에서 뿌듯함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사랑이듯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보이는 법이다. 눈을 크게 뜨면 도처에 지혜가 숨어있고 스승이 널려 있다. 배흘림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배짱 두둑한 사람의 불거진 배처럼 튀어나와 있다. 둥글게 튀어나온 기둥이 참으로 배짱 좋게 생겼다. 마당에서 올려다보아도 옆에 서서 기대어보아도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용모다. 가까이 다가서면 설수록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은 뚝심이 철철 넘친다.
배짱이란 뱃腸, 뱃속에 있는 장기들을 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담이 크다, 대담하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는 표현들은 배짱과 관련된 말이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내부가 튼실하게 채워져 있으면 배짱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근성과 뚝심, 끝까지 투쟁하려는 기백과 내공이 없으면 배짱은 생기지 않는다. 배짱 두둑한 배흘림기둥을 보고 있자니 은근한 배짱으로 후배들을 소중하게 어르는 S선생님이 산자락에 떠오른다.
후배들을 지도하며 이끄는S선생님의 생김새는 배흘림기둥과 흡사하다. 훤칠한 키와 듬직한 몸매, 툭 불거져 나온 뱃살이 배흘림기둥과 닮은꼴이다. 몸담고 있는 문학회를 우뚝 세우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기둥의 역할을 하는데 손색이 없다. 문학회의 기둥이나 다를 바 없는 S선생님은 늘 그 자리에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은근하게 나아가는 고집이 있다. 조금도 굽히지않고 버티어 나가는 성품이나 태도가 배흘림기둥의 배짱과 꼭 닮았다.
사업을 멀리한 지 이십여 년이 넘었지만 삶을 즐기며 배짱 두둑하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수필에 대한 애정 또한 한결 같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토론회에 참석하여 자리를 지켰고 매일 한 편의 글을 필사하며 나아간다. 흔들림 없이 나아가기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오래도록 한자리에 머물러도 변하지 않는 한결 같은 마음과 의지를 나는 배짱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모여 어울리는 곳에서는 뜻밖의 분란이 일어날 수 있다. 가끔 문학회에 흔들림의 조짐이 보이면 누구보다 염려를 하고 소리 없이 훈훈한 향기로 사람들을 보듬고 채워왔던 분도 그였다.
S선생님의 매력은 한결 같은 마음과 진득한 버팀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심중이 후배들을 양성하고 어르는데 뒷심이 된다.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속내를 드러내놓지도 않고 오직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기둥이 된다. 그의 은근한 고집은 배짱과 다를 바 없다. 언젠가 S선생님은 술자리에서 죽음에 대해 두렵지 않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 말 속에는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고 삶에 대해 자신감이 넘쳐났다.
흔히 우리는 배짱이라는 말을 건방지다는 말로 오해를 하고 있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S선생님의 말처럼 배짱이란 어떻게 하겠다고 단단히 다져 먹은 속마음, 조금도 굽히지 않고 배를 내밀며 버티려는 성품이나 태도를 뜻한다. 봉황산 자락에 선 이 배흘림기둥도 세월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무량수전을 떠받치고 서 있다. 두둑한 배짱이 없었다면 감히 지킬 수 없는 일이다.
나의 배짱은 어떠한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처럼 내 삶에 배짱이 생길 때는 언제쯤일까? 나에게는 튀어나온 뱃살도 없고 삶에 대한 배짱도 두둑하지 못하다. 글쓰기에 대한 배짱 또한 넉넉하거나 풍부하지 못하다. 아직은 어설픈 글쓰기의 길을 걷고 있지만 문단에 이름을 올리고 나니 서서히 자신감이 붙는다. 미처 설익어 재치 있는 이야기꾼은 못되지만 작가란 당연히 글로써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는 두보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나아간다.
신산한 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날들이었지만 하루하루에 정성을 다하다보니 삶에 대한 내공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생각이 심오하고 한이 깊어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듯 수필도 삶이 치열해야 제대로 된 수필이 탄생한다고 했다. 조금씩 베짱이 늘고 나니 한걸음씩 걸어온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 배짱이 생기더라는 말 속에는 한걸음 진화된 생에 대한 애정과 깊이가 들어있다. 나도 등단 오 년, 십 년차가 되면 배짱 두둑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에 신물이 나면 가끔 찾아드는 곳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배짱 두둑한 느낌처럼 삶이 여물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 때나 쓸데없는 배짱을 부리거나 내밀면 민폐가 된다. 허나 최선을 다한 삶 앞에서나 성실하게 산 시간 앞에서는 배짱을 내놓아도 괜찮을 성싶다. 인생의 가장 큰 위험은 배짱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배짱만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 아꼈지만 어쩔 수 없이 비껴간 인연에 대해서도 상처받기보다는 배짱 좋은 기억으로 남긴다면 사랑의 기억 앞에서 한층 성숙해지지 않겠는가. 한 시대의 이야기를 품고 묵묵하게 서 있는 배흘림기둥. 천년을 하루 같이 괴고 선 이 기둥처럼 나도 매사에 배짱 두두룩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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