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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의 자격 요건 / 김 형 진

수필작법 도움 글

by 장대명화 2020. 11. 13.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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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가의 자격 요건 / 김 형 진

 

요즈음엔 수필가들이 참 많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서 수필가라 새긴 명함을 받는 일이 잦다. 그럴 때면 낯이 홧홧함을 느끼며 상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낯이 홧홧함을 느끼는 것은 수필을 쓴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수필가라 자부할 수 없는 자괴감 때문이요, 상대를 찬찬히 뜯어보는 것은 수필가를 자부하는 사람의 내면을 엿보려는 속셈에서이다.

 

수필가는 수필에 관한 모든 면에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일가를 이루었다 함은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독창적인 경지를 취득했을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독자적인 체계를 이루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였다는 말이다. 한 편의 수필은, 북극해北極海에 떠 있는 방산이 구십 퍼센트는 물 밑에 가라앉아 있어 보이지 않고 십 퍼센트만 드러나 있듯 작가의 내면에 잠재된 사상과 감정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필가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내면을 채우는 일이다.

 

내면을 채우기 위해서는 우선 예민한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을 갖추어 대상을 생생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상에서 나만의 느낌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춤은 물론 예사 것을 예사로 보지 않는 통찰력을 갖추어 나만의 생각을 펼 수 있는 능력 또한 갖추어야 한다. 이는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불문율이다.

 

그러면 수필가의 자격 취득을 위해 내면에 채워야 할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철학, 역사학, 심리학, 논리학 등 다양한 학문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여 이를 자기 나름의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 이것으로 인해 깊이 있고 폭넓은 사유의 틀이 마련되고 이를 통해 주어진 대상이나 상황을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작가정신이 확립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토인비(Amold Toynbee)의 예언은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리는 예언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 현대인은 사람은 누구나 신앙을 갖고 있는데, 이에는 저급한 신앙과 고차적 신앙이 있다 했다. 저급한 신앙에는 과학에 대한 신앙, 권력에 대한 신앙, 재물에 대한 신앙으로 이는 인간성을 마멸시켜 끝내는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며, 고차적인 신앙에는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적 신앙과 자연에 대한 신앙이 있는데, 이 중 자연에 대한 신앙이 인류의 종말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토인비의 예언은 저급한 신앙에 휘둘려 사는 현대인에게는 따끔한 경종이요,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는 무거운 책무를 부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현대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심층심리학深層心理學이다. 심층심리학의 창시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진실은 의식세계가 아닌 무의식의 세계에 있음을 간파하고 꿈이나 부지불식중에 나온 말, 착오 등에 주목했으며, 그 뒤를 이은 융(Carl Jung)은 집단무의식의 세계에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이 심층심리학은 문학에 일대 변혁을 가져와 무의식의 세계에 숨어 있는 진실을 천착하는 것이 현대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소임을 깨닫게 했다.

 

주관적인 생각이 주관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독선에 불과하다.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조리가 필요하다. 조리는 논리적 서술에 기인한다. 연역법, 귀납법, 변증법 등의 논리적 추론 과정이 진술 내용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설득력을 얻게 된다. 주관적인 생각이 타인들의 공감을 획득했을 때라야 보편성을 띠게 된다.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 주의나 주장은 한낱 잠꼬대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철학, 역사학, 심리학, 논리학 등에서 습득한 안목으로 대상을 꿰뚫어 보고 거기서 얻은 독자적인 사유로 내면을 채우는 것만으로 수필가의 자격을 취득할 수는 없다.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을 문학적 표현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문학에 대한 개념과 수필이라는 장르에 대한 특성을 체득하고 이에 따라 꾸준히 수련하는 과정, 곧 습작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체득과 수련과정이 없는 사람들은 수필을 예술성이 없는 글, 곧 단순한 체험담이나 주장이나 견해를 밝히거나 지식을 나열하는 글로 착각하게 된다.

문학의 정의定義는 ‘문학은 언어(문자)를 표현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다.’이다. 여기서 ‘문학’은 종개념種槪念,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하는’은 종차種差, ‘예술’은 유개념類槪念이다. 이는 문학은 예술의 한 분야인데 언어로 표현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이 문학이다.

 

문학이 예술의 한 분야인 이상 예술성이 없는 문학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문학작품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예술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필수적이다. 예술의 기원, 예술사, 예술의 효능 등에 대한 상식과 아름다움의 실체에 대한 탐색 등을 통해 예술적 안목을 길러야 한다. 아울러 진정한 예술적 아름다움은 표면보다 내면 깊숙이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문학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대상의 내면에 잠재한 진실을 드러내어 독자의 공감을 얻었을 때 형성된다.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문학예술에 대한 조예를 갖추어야 한다. 우선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재료인 언어에 대한 감각이다. 어휘의 구조, 의미, 문법적 기능뿐 아니라 어감, 어투까지 체득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아울러 문장의 구조,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의 연결 관계를 체득하여 글의 생명인 선명성을 부여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자기 나름의 문학관을 정립하여 이를 문학 활동과 작품창작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회의 변천과 문학사, 곧 세계 문예사조사의 골간이 되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흐름이나, 우리나라 한문문학의 흐름과 한글문학의 등장과 흐름이 어떤 사회적 변천에 기인한 것인지 숙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학작품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라 한다. 이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우리가 써 세상에 내놓은 한 편의 글은 크든 작든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 영향이 밝은 쪽이냐 어두운 쪽이냐에 따라 순기능과 역기능으로 갈린다. 순기능 쪽과 역기능 쪽을 결정하는 요인은 순전히 작가의 문학정신에 달려 있다. 작가가 자연을,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문학예술에 대한 조예와 형상화 능력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장르든 글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요건을 재미이다. 글의 첫 부분에서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했다면 그 글을 끝까지 읽는 참을성 있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글에 재미를 부여하는 요소로는 우선 소재를 들 수 있다. 글을 이루는 재료 곧 이야깃거리가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야깃거리, 알고 있지만 비밀스러운 이야깃거리 등이면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이야깃거리로 호기심이나 관능을 자극하여 저속한 독자에 야합한다면 사회적 역기능을 불러오고 만다. 글에 재미를 부여하는 또 다른 요소는 대상을 보는 개성적인 안목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심안心眼이다. 심안이란 육안肉眼, 또는 과학기기로도 찾아낼 수 없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이다. 심안은 순수를 지향하는 사람에게서 쉽게 열린다고 한다. 이 심안으로 대상을 통찰했을 때라야 사물의 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발견하여 자기만의 것, 곧 독창적인 창조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 이 독창성이 정서순화와 지적 충족에 기여할 때라야 사회적 순기능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독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구성, 곧 짜임과 표현, 곧 문장이다. 건축물에 비유하면 구성은 설계도요 표현은 건축물 외형이다. 작품의 주제를 살릴 수 있는 최적의 구성법을 찾아 그에 적합한 문장으로 표현해 냈을 때 자기가 원하는 작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특정 작가의 작품에는 그 작가만의 개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완성된 한 편의 문학작품은, 완성된 건축물이 외형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내부에 들어가서도 안락감을 주는 경우

이와 같이 독자들에게 외형적인 아름다움과 내면적인 안락을 주었을 때 좋은 평을 받게 된다. 구조주의자들은 한 편의 작품에 들어 있는 요소들은 그것들을 작품에서 떼어 개별적으로 분리해 놓았을 때와 별개의 것으로 본다. 시멘트와 혼합하여 벽의 일부가 된 모래는 길바닥에 쌓여 있는 모래와 별개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작품에 동원된 요소들 하나하나와 그 요소들을 결합한 작품과도 별개의 것으로 본다. 그래서 하나의 작품이 주는 효과는 그 작품에 동원된 요소들의 총합보다 크다고 말한다. 그래서 좋은 작품 한 편의 효능은 그 작품에 동원된 요소, 곧 주제, 소재, 구성, 표현 등 개별적 효능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이제 수필가가 갖추어야 할 요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수필가가 갖추어야 할 요건은 문학인이 갖추어야할 요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수필이라는 장르가 지닌 특성을 파악하여 그에 맞는 요건을 갖추면 될 것이다.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니, ‘신변잡기’니 하여 폄하貶下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은 문학 장르의 명칭일 뿐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함은 수필隨筆을 글자의 훈訓 그대로 읽은 데서 온 잘못이다. 수필隨筆의 필筆은 설說, 담談, 표表와 함께 중국 산문의 한 종류 이름이었다. 거기서 비롯한 수필이 지금은 문학의 한 부문명이 되어 한·중·일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수필은 생활 속에서 얻은 이야깃거리를 소재로 짤막짤막하게 산문문학이다. 여기 ‘생활 속에서 얻은 이야깃거리’를 놓고 신변잡기身邊雜記라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장르의 문학작품이든 그 소재는 작가의 생활 속에서 얻게 마련이다. 시인의 삶에서 벗어난 시가 있을 수 있으며 소설가의 생활을 도외시한 소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시의 기원은 안전한 생활을 위한 두려운 존재에게 비는 주문呪文이었으며 소설의 기원은 고샅에서 떠도는 이야기[가담항설街談巷說]이었다. 그리 볼 때 수필이 신변잡기에서 시작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아직도 수필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는 신변잡기를 탈피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체험기나 매체에서 얻은 정보, 가족이야기, 자기자랑은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는 이가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상상은 문학의 근간이다. 아직도 수필문단에서는 허구[fiction]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수필을 논픽션(실화)라 하는 이까지 있다. 허구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라면 이는 마땅히 수필에서 추방해야 한다. 그러나 문학성을 살리기 위해 사실에 근거한 상상이라면 이것까지 배제하고서야 어떻게 문학이 되겠는가. 김소운은 ‘진실이란 반드시 사실 그대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 했다. 문학이 진실을 천착하는 작업이라면 대상의 표면만을 사진 찍 듯해서는 문학성을 획득할 수 없다. 겪은 일을 사실事實대로 설명한 글은 도저히 문학이 될 수 없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시나 소설을 쓸 때처럼 주제를 정하고 소재를 선정하여 이를 조리에 맞게 배열한 다음 부드럽고 알기 쉬운 문장으로 표현하는 절차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 이때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은 주제에서 이탈한 구성이나 표현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표현이 문학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형상화가 필요하다. 형상화란 형상이 없는 내면의 세계를 오관에 의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작가가 대상에서 얻은 개성적인 느낌이나 생각을 시각, 청각, 후각, 취각, 촉각에 호소하여 펼쳐냄으로써 독자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통해 작가의 느낌이나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형상화이다. 이는 추상적인 내면의 세계를 표출하는 표현 방법이다. 이 형상화는 작가의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필가들이 유의해야 할 또 한 가지는 독자의 몫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주의 이론에 의하면 한 편의 글은 독자에 의해서 완성된다. 작가가 독자의 몫까지 빼앗아 할 말을 다해버린다면 그 글은 영원히 미완성의 글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한국수필의 역사적 흐름에 대한 고민해 보아야 할 일이다. 고려시대의 파한집破閑集,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에서 조선시대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문수필에 대한 것이다. 18c 말엽에 등장한 동명일기東溟日記를 비롯한 우수한 국문수필의 출현과 쇠락에 대한 고찰과 그리고 그 계승과 발전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신문학기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단절된 한글수필을 현대수필에 이어준 것은 그나마 김상용, 윤오영, 목성균의 수필이 아닌가 한다.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수필가와 직결되는 말이다. 수필에는 대리인을 등장시킬 수 없다. 의도적으로 ‘나’를 생략하고 쓴다 해도 수필 속에서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주체는 곧 ‘나’이다. 의도적으로 자기를 포장하는 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권력에 아부하는 글, 통속에 영합하는 글을 쓰는 일은 작가의 윤리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수필가는 알몸을 드러내 보임에 있어 떳떳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닦아야 한다.

 

윤모촌은 <수필인의 격>에서 ‘사람은 저마다 자존심으로 산다. 그런데 수필인에게 이것이 지나치면 오만무치傲慢無恥와 자존망대自尊妄大로 빠져 그것이 자신의 불명예인지를 모른다. 이런 격의 수필인은 반드시 독선적이고 그 주변에는 아첨꾼이 꼬여든다. 그리고 아부하지 않는 자는 무참하게 배척한다. 이 아첨과 오만무치는 필연적으로 (중략) 그것이 자승自乘되면서 이성을 잃는다. 그리하여 글 장난질을 하고, 속문俗文도 명문名文이라 내세워 야합을 한다.’라 했다. 수필가의 오만무치와 아침이 더 없는 천격賤格임을 깨우쳐준 글이다.

 

창작은 원래 외롭고 고달픈 작업이다. 또 주체적인 안목으로 현실을 통찰하고 거기서 얻은 문학적 요소들에 투철한 문학정신을 반영하여 자기의 세계를 구현해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작품 한 편을 탈고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작품에 자기의 세계가 얼마나 문학적으로 승화되었는가를 되짚어보는 일이다. 아울러 자기의 세계관, 자연관, 인생관이 얼마나 잘 녹아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수필을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수필가가 되려면 우선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문학예술의 개념과 기능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한다. 따라서 여느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서 진실을 천착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하며, 독창적인 심미안審美眼을 갖고 대상을 특성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포착된 대상에 철학적 사유를 융합시켜 짤막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도달하는 길은 수십 년을 탁마琢磨해도 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피천득이 수필은 중년이 되어야 쓸 수 있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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