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란 무엇인가.
카르마는 인과의 흐름이다
오롯하고 맑고 명료한 지혜,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자 우주의 본성이다.
모든 존재는 그 본성이 투명의식의 산물이므로, 선악의 구별을 떠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이 세계의 모든 흐름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따른다.
설령 우주의 창조자인 신이라 할지라도 원인과 결과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흐름에는 거역할 수 없다.
다만 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 흐름의 물꼬를 트거나 방향을 조절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있다.
원인과 결과의 인과법칙을 통틀어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자연과학에서의 인과율이 물질세계의 인과법칙인데 반하여,
카르마는 정신과 물질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인과법칙이다.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를 번역한 가장 보편적인 우리말은 "업(業)"이며, 의역한 용어 "인과응보"도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이다.
카르마를 음사한 "갈마(磨)"도 가끔 쓰이지만, 음사한 것에 불과한 말이라면 한자음 '갈마'를 고집하기보다는 차라리 원음 '카르마'를 쓰는 것이 용어의 복잡다기를 줄이는데 더 유용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카르마를 말할 때의 인과법칙은 시간적 전후관계를 따지는 고전적 인과법칙에 국한되지 않으며, 우리의 인식으로는 원인을 추적할 수 없는 우연까지도 조건에 포함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인과법칙을 말한다.
혜안으로 보면 우연도 흐름의 엄연한 구성요소인 것이다.
카르마(業)는 몸과 마음의 모든 활동과 일상생활이다.
몸을 통하여 행동하고, 입을 사용하여 말하고, 생각과 감정을 움직여 지적 활동을 하는 모든 것이 카르마이다.
흐름 속에 새로운 동인과 추진력을 불어넣는 것은 정신적 동기와 의도이다.
몸을 통한 행위와 입을 통한 언어활동은 정신적 동기의 외부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카르마의 법칙에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행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정신적 힘이다.
인과의 흐름인 카르마의 근원은 마음 속에 숨어있는 동기 또는 의도인 것이다.
카르마의 강물이 흘러오는 근원지는 의식의 심층구조에서 살펴본 바대로, 자극에 대한 반응 단계에 있다.
다시 말해 자아의식에 의지하고 있는 표면의식이 생기기 전, 정신적 의도(mental formation)가 반응을 결정지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적 능력을 가지지 않는 나무는, 비록 자아의식을 지닌 생명일망정 업에서 한 켠 비켜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살펴볼 육도 윤회의 세계에 식물의 세계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카르마는 육도 윤회의 세계를 만드는 추진력인데, 이 카르마는 정신적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카르마를 인과응보라고도 하는데, 응보(vipaka)란 원인이 되어 따라오는 반응이다.
좋은 원인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열매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의 선인 선과(善因善果)·악인 악과(惡因惡果)라는 말로도 자주 회자되는 인과응보는 바로 카르마 법칙의 다른 이름이다.
좋은 열매는 다시 좋은 씨앗이 되어 계속하여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나쁜 열매는 다시 나쁜 씨앗이 되어 계속하여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렇게 주고 받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자아는 계속 형성되어 가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카르마는 계속 만들어지고 쌓여 가고 소멸되며 우리 스스로를 만들고 외부 환경을 만들어간다.
카르마 역시, 만물의 덧없는 흐름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름에 불과한 것이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새로운 동인이 부여되면, 이것은 다음에 나타날 카르마에 정보를 축적시키면서 진화된다.
관계의 그물 속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과 흐름은 카르마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존재도 카르마요, 영혼이나 자아도 카르마요, 생명현상도 카르마이다.
자아나 영혼의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보를 받고 괴로움을 겪고 드디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오로지 카르마일 뿐이다.
그러므로 스승은 "모두가 업일 뿐, 창조자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카르마의 법칙과 무아의 진리가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카르마와 무아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무아의 진리는 망념에 실재하는 '나(ego)'가 없다는 것이지, 망념 그것까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망념 때문에 생사윤회가 존재하고, 이 망념이 생사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도는 것이다.
카르마가 운명을 만들고 전생과 후생을 결정짓는다
우리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통찰력만 있다면, 삶 속에서 카르마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카르마는 과거에 우리가 행했던 행위와 말과 생각의 결과이다(身口意 三業).
부정적 행위(有漏業,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를 반복할 때마다 고통과 고난이 야기되고, 긍정적 행위(無漏業, 행복을 부르는 카르마)를 반복할 때마다 행복을 불러들인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쳤을 때, 그것은 곧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비참하고 어두운 기억이나 자기기만의 어두운 그림자가 바로 카르마이다.
습관이나 공포 또한 카르마에서 비롯한다.
윤회(삼사라, 방황)는 생사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순환 반복되는 것이다.
중생들은 어설픈 행동과 자기 파괴적인 감정에 이끌려 쉴새 없이 고통을 반복하게 된다.
윤회의 삶은 즐거운 놀이터가 아니라, 쇠담장으로 둘러싸인 감옥이다.
쇠담장은 본성을 가리고 있는 자아이자, 자아를 자신이라고 여기는 무명(無明)이다.
마음의 본성을 알아차릴 때 열반(nirvana)이요, 미혹으로 몽롱해질 때 윤회(samsara)이다.
우리는 결코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번 뿌려진 카르마의 씨앗은 수행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한, 결코 부패하지 않으며, 죽은 듯이 잠자고 있다가도 적합한 때를 만나면 언제고 어김없이 싹을 틔우고야 만다.
설사 백천만겁이 지니더라도 한 번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아서 시절인연이 오면 과보를 돌아와 스스로 받게 된다(자업자득).
그리하여 스승은 이렇게 가르친다.
"전생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받고 있는 일이 곧 그 과보니라. 내세의 결과를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짓고 있는 일이 그 결과니라."
인과(因果)는 가히 두려운 것이며, 비록 깨달음을 이룬 붓다라 하더라도 인과를 면할 수는 없다.
과보의 상응함은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고, 결정된 업은 견고하여 피할 수 없다.
우리들은 그 때 그때마다 두려워하고 삼가하여 원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죽을 때엔 파노라마처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임사체험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慾望)이 바로 그의 운명(運命)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이 바로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곧 그의 행위이며, 그의 행위가 곧 그가 받게 될 결과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선업), 나쁜 것이든(악업), 그 결과는 스스로 지었기 때문에 응당 스스로 받아야 할 몫이다 .
인간은 그가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죽은 다음에 그는 그가 한 행위들의 미묘한 인상을 지니고서 다음 세상으로 간다 (유식론에 의하면 제8아라야식에 훈습되어짐).
그리고 그의 행위들의 수확을 그곳에서 거둔 다음에 그는 이 행위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이와 같이 욕망을 가진 자는 환생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브리하다라냐가 우파니샤드)
이 욕망의 불이 꺼진 것이 니르바나(열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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