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을 보며 / 김 홍 은
포근하게 어둠이 내린 가을의 산기슭은 저녁안개에 젖은 채 싱그러운 솔향기만이 가득하다. 어느새 간드러진 초사흘 달도 철학관 집 앞의 느티나무에 걸려 있는 듯 달빛도 가슴에 와 머문다. 멀리서 산사의 종소리도 아련히 들려 올 것만 같다.
내 인생 도정(道程)의 그림자는 어느 만큼에서 서성이고 있는 걸까. 비탈진 내리막에 접어든다. 이 길은 내 삶의 발자국이 어디쯤을 터덕터덕 걸어 왔음인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공연히 찬바람이 휭 지나간다. 초승달도 덩달아 산자락을 밀치고 높이 떠서 마음을 슬며시 울린다.
가랑잎이 바스락 대며 바람에 스산하게 날아간다. 너른 들녘은 황금 노을이든 금빛물결처럼 일렁이다 어느새 어둠으로 밀려온다. 검푸른 바닷가의 어둠속 등댓불처럼 반짝이는 하늘의 초승달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달은 어느 여인의 낯익은 듯한, 눈웃음 짓는 얼굴이다. 어느 때는 요염한 모습이다가 더러는 돌아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슬픈 여인 같다. 초승달을 바라보면 언제고 내 안으로 들어와 그리움으로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고요한 달빛은 어둠을 녹여내는 월정(月情)으로 살며시 다가와 잊혀져간 생각들로 가슴을 적시어 놓는다.
누군가가 그립다.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에는 머물 곳도 기댈 사람도 없는 고향을 잃어버린 오갈 데 없는 나그네의 심정이 들기도 한다. 이런 심사에 사로잡혀 있을 적에는 초승달을 오랫동안 조용히 올려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밤에는 달이 뜨면 참으로 즐겁다.
중학교 때 토요일은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 사십 여리의 오솔길을 걸어 갈 적에 서녘 하늘 높이 떠있던 반가운 달이기도 하다. 더러는 그리운 어머니가 마중을 나와 기다리는 다정한 모습으로 착각되기도 했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며 야트막한 고갯길을 넘어 호젓하게 걸어가던 지난날이 그려지기도 한다. 저 달빛은 내 영혼의 잠을 일깨워 주던 빛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가 지루한 밤에는 달을 마주하면 채찍을 하여 주던 선생님의 마음이기도 하였다.
내 청춘의 아픔을 월악산에서 보내던 시절, 저 달은 언제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며 많은 생각을 들려주었다. 때로는 실연의 아픔에 괴로워 할 적에도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던 달빛이다. 꼬부랑 재를 넘을 때도 사지막 길을 돌아가던 많은 날들도, 쓸쓸하게 외양간에 갇혀있는 소에게 여물을 가져다 주던 밤에도 저 달은 늘 변함이 없었다.
지천명이 되어 연구실의 문을 잠그고, 계단의 달빛을 밟으며 고요한 넓은 교정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기분이 좋다. 어느 때는 초승달이 밤늦게 퇴근하는 내 등을 톡톡 두들겨 주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달이 떠 있는 날은 누군가에게로부터 마음의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내 곁에서 멀어져간 사람이 살며시 다가와 미소를 짓고 있는 환상을 일게 할 때도 있다.
나는 이래서 초승달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내 마음이 허전할 때는 달도 쓸쓸해 보인다. 달은 내가 기쁘거나 슬플 적에는 마음속에 숨어서 뜨기도 한다.
달을 바라보면 언제고 지난날의 잊혀 진 생각들을 하나하나 떠올려주며, 어머니처럼 잘잘못을 타일러주기도 하고 반성의 위로도 해 주었다. 그래서 초승달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아마, 어머니도 젊은 시절에는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이셨으리라.
달빛에 젖은 창가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소리는 더욱 애잔한 그리움으로 찾아들게 한다. 때로는 무작정 내 마음을 그리움의 아픔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하는 저 달이다.
새파란 생질이 꽃 같은 아내와 어린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나간 날, 먼 산모롱이를 돌아가던 슬픈 상여소리는 아직도 달빛 따라 귓전으로 울려오고 있다. 이렇게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석이 꼭 살아서 돌아 올 것만 같다.
어느 때는 달에다 투정을 부리기도 하였다.
지금은 더러 달빛에 젖은 가슴은 한숨이 된 지난 세월을 그리워하며 눈물어린 사랑의 고백을 하고도 싶다. 내 어찌 변함없는 저 달을 보고 그리움에 대한 한이 없으랴.
이는 나뿐만이 아닐 게다.
이 밤은, 마음을 다하여 감추어둔 한을 고백하고 싶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을 벌려본다. 이제는 마음깊이 묻어두고 표현해 보지 못한 아름답고 순수한 정을 나누고 싶다.
사람다운 사랑의 달빛으로 마음속의 어둠을 밀어내고 다정하게 밝혀주는 초승달이었으면 싶다. 슬프고 괴로운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의 불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초승달이 뜨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가냘픈 초승달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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