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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말/어머니의 호미자루 ㅡ임 병 식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0. 4. 15.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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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림으로 다가오는 말 / 임 병 식

 

가끔 어떤 것을 생각해보는 때가 있다. 인류가 탄생한 후 생존을 이어온  45억년 동안 축적한 지혜는 얼마나 될까. 헤아려지지는 않지만 그것이 계측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다생각해 보면 인류의 역사는 449천만 년 동안은 거의 생존하는데 분투의 날이고,  이 후에 출현한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언스 사피언스가 활동을 한 5만년 동안이 인류의 샇아올린 족적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간은  최초 인류가 출현한 시기에 비추어 보면 지극히 짧은 찰라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에 인류는 문자를 발명하고 기록해온 것이다. 이렇게 좁혀서 생각해 보면  인류는 단순히  집단을 이루어서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과정을 반복한 가운데  오늘날과 같은 진화를 해온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인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근세의 역사만 돌아봐도  파란만장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숱한  소회에 젖곤 하는지 모른다. ‘살아보니 이렇더라고 하는   소감의 피력이 그것이다청맹과니  촌부도 가끔은 자식을 향해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며 당부를 하는데 좀더 깨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말을 했을까.

 암튼   세상에는 좋은  금언이나 명언, 그리고 살아오면서 축적한 유익한 말들이  유언이나 교훈형태로 많이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시대 너 자신을 알라하는 소크라테스로부터 부처님의 천상천하유아독존’. 그리고 예수님의 너 자신을 사랑하라’ 공자님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씀 등이다.

  그렇다고 의미와 감동을 일으키는 말이 꼭  위인들의 말일 수는 없다평범한  범부가  촌철살인하는 폐부를 찌르는 말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버나드쑈가 자기 비문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선사가 남긴  ‘인생은 부운기(浮雲起) 부운멸(浮雲滅)이라는 말도 예사  의미심장하게 읽히지 않는다.

  알려진  금언 명언이 아니더라도 떠도는 속담에도  보면  삶의 지혜가 축약되어 있음을  본다. 이 모든 것이 살면서 터득한 지혜의  축적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흔히  ‘내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소설책 몇 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노인들의 지혜는 대학 도서관의 서책의 분량에 해당된다는 말을 빌리지 않아도 공감이 가는 말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일찍부터 이런 점에  주목하여  글감을 찾아왔다. 자칫 묻혀버릴 법한 것들을 찾아서 작품속에 구현해 놓고자 신경을 써왔다.

  그러면서 많이 참고한 것이 명사들의 말씀과 속담집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전신적 산물인 탈무드가 있다탈무드는 유대인이 5천 년 동안 면면히 내려온 그들의 경전이다. 대개가 유대인의 현인인 납비의 말을 발어 서술해 놓고 있는 책이다.

  유대인은 어린이가 태어나면 탈무드 표지에 꿀을 발라서 아이가 혀로 핥토록  한다고 한다. 삶의 지혜가 여기에 다 있으니 평생의 벗으로 삼으라는 배려인 셈이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의 몸뚱이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자. 이 아이를 한사람으로 볼 것인가 두 사람의 볼 것인가? 가리는 방법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머리위에다 뜨거운 물을 부어 물을 뒤집어쓰지 않는 쪽이 희죽 웃으면 두 사람이고 , 뜨겁다고 놀라서 울면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 이것은 그저 우연히 언급하는 비정한 우화가 아니다. 그 속에는 무엇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즉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벌어진 전쟁 상황을 가정하여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이 그 전쟁의 아픔을 같이 느끼면 유대인이고, 그렇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강 건너 불>로 여기면 유대인이 아님을 이르고자 하는데까지 의식을 깨우고 있음이다.

  그러한 예화 중에서도 나는 특별히 다음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겨 귀감으로 삼는다.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진실한 말이라도 사람을 다치게 하고 상처를 주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실이라고 해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말하는 것이다.

  공연한 공명심에서 아니면, 어떤 진실을 파헤친다면서 묻어둔 사실을 발천시켜서는 안 된다고 이른다이미 저지른 지나간 일인데  잘못 산 물건을 탓하는 것처럼 그러한 것은 부질없고 마음의 상처만 줄 뿐이라는 거다.

   이것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배려차원의  접근이  아닌가 한다. 흔히 재밌다 던지는 돌멩이에 운이 없어 맞은 개구리는 죽어간다는 말이 있다. 생각 없이 내뱉는 말에 상대방은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가령 자식자랑에 무자식인 사람이 상처를 받고, 재산 자랑하는 자리에서는 돈 없는 사람이 고통과  상처를 받는다.

 나는 이것을 남의 눈에든 티 보다 자기 눈에 든 들보를 생각하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면서 해보는  생각은 사람은 어차피 허물투성이인데 무엇이 남보다 나은 게 있다고 우쭐댈 것이며 남의 흉을  찾아서 비난할 것인가 하는  울림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거기에는 영위하는 삶은 누구나 오십 보 백 보인데, 백년을 채우지 못하고 살다 가는 인생행로에서 부질없다고 생각한  것이다자기 성찰하는데도 부족한 판에 외부로 눈을 돌려  무슨 공연한 일로 신경 쓰며 세월을 허송할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호미자루 / 임 병 식

 

 차 트렁크를 정리하다가 그 속에서 호밋자루를 발견했다. 살아생전 모친께서 노상 들고 쓰시던 것이다. 이것은 내가 취미생활로 몇 차례 수석을 채취하다가 놓아둔 것 같다. 마지막 탐석을 나선 지 얼마나 됐을까. 한 10여 년은 넘을 것이다. 이것의 발견은 차 전면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다 말고 문득 트렁크 안도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어보다가 찾아낸 것이다.

그 트렁크 안에는 이 호미 말고도 부모님 산소를 다닐 때 쓰기 위해 마련해둔 낫과 우산도 함께 있었다. 함께 나온 잡다한 것을 합치니 정리할 것이 한 뭉치나 된다. 한데 그중에서도 유독 나의 눈길을 붙잡은 것은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호밋자루였다.

그 이유는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이 호밋자루를 가지고 당신은 살아생전 텃밭을 일구셨던 것이다. 당신은 집안일을 하는 이외에 집 앞 텃밭에서 호미를 끼고 사셨다. 그것이 나의 눈에 익어 있는 데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그것은 내가 직접 고향 집에 들러서 일부러 가져왔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이나 한참 컸을 적에도 보면 어머니는 허구한 날 호밋자루를 가지고 밭고랑의 김을 매거나 흙을 파 올려 채소의 북을 돋으셨다. 그런 세월의 연속이었다. 그런 만큼 호미날도 많이 낡았다. 거기다 자루는 땀에 전 흔적으로 거무튀튀하기까지 하다.

그런 호밋자루의 내력을 더듬으며 나는 새삼 생긴 모양을 유심히 살펴본다. 보아하니 생김새가 참 재미있다. 비교적 단순한 형태이면서도 과학적 지혜가 돋보인다. 우선 날을 보면 어디서 많이 보던 모양이다. 쟁기의 모습을 닮았다. 골을 낼 때 파낸 흙이 중심부의 자루에 부딪치지 않도록 살짝 비켜서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그 모양이 여간 절묘하지 않다.

나는 구조를 살피면서 이것은 '동양적인 사고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레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돈을 셀 때도 보면 동양인은 안쪽으로 접어서 넘기는 데 비해 서양인은 어색하게 한사코 밖으로 젖혀서 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구조가 아닌가.

내가 이것을 고향 집에서 가져올 때는 이미 집이 폐가로 방치된 때였다. 어느 날 둘러보려 허청을 들렀더니 벽에 쟁기와 함께 쇠스랑, 괭이, 낫 그리고 호미 서너 자루가 걸려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을 하나 골랐다. 취미활동을 하는 수석을 캐는 데 쓰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유품을 하나를 간직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중에서 가장 작고 많이 닳은 것을 고른 것은 그만큼 어머니의 체취가 많이 묻어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이것을 찾아내어 눈에 잘 띄는 베란다 화분대에 걸쳐놓고 있다. 그런지라 거실에 앉아 이것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 모습이 많이 어려 온다. 떠오르는 모습은 사계四季 속에서 늘 텃밭에 나가 이 호밋자루를 손에 들고 허리 굽혀서 일하시던 모습이다.

어머니가 가꾸시던 텃밭은 늘 풍성했다. 봄에는 밭 가장자리에다 가꾼 솔이 푸르름을 이어가는 가운데 그 옆에는 열무와 대파 올콩이 싹을 틔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토란과 함께 상추와 쑥갓이 무성하게 자랐다. 가을에는 이것을 거두는 시기다. 김장용 고추와 마늘을 갈무리하고, 배추와 무를 뽑아 나르느라 허리 펼 새가 없으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늘 한결같으셨다. 하나 생각하면 꼭 한 마음이었을까. 살아생전 아버지는 병석에 누운 때가 많았고, 누나가 앞서 죽은 참척을 보았는데 근심이 어찌 없었을까.

그런데 크면서 나는 그것은 생각도 못 하고 당신이 거둬들인 채소로 배를 채우는 데만 신경 썼지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밥맛이 없으면 마련해둔 깨소금을 쳐서 먹고 더러는 갓 뜯어온 솔이나 쑥갓을 넣고 참기름에 비벼서 먹으면서 나만 생각했다. 생각하면 참 철딱서니 없이 자랐다.

어머니는 일과를 텃밭에서 시작했다. 여명이 터 앞이 보일 정도만 되면 호밋자루를 들고 텃밭으로 나와 김을 매고 흙을 북돋아 작물을 가꾸셨다.

그런 어머니 옆에는 노상 오줌동이가 놓여있었다. 아침마다 들고 나가 그것으로 거름을 했다. 다만 솔을 가꿀 때만은 부엌에서 따로 재를 가져와 뿌렸다. 그러면 그것만으로도 별다른 거름을 하지 않아도 무럭무럭 자라주었다.

그렇게 일만 하신 어머니는 손이 곱지 못했다. 손바닥은 딱딱하기 굳은살이 박이고 손가락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생각하면 어느 세월에 손을 가꿀 시간이 있었을까.

그런 손의 아픔을 나는 어머니 임종 시에 뼈저리게 느꼈다. 염을 마친 장의사가 마지막으로 고별인사를 하라는 말에 손을 잡아드렸더니 얼음장처럼 찬 손은 거칠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자식들을 건사하셨는가요. 어머니!"
말을 뇌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져 지갑에서 돈이 잡히는 대로 꺼내어 어머니, 손에 쥐여드렸다. 그러고서 가족 중 가장 늦게까지 손을 놓지 못했다. 그것은 최근까지 고단하게 일을 시켜드렸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어서였다.

그래서인지 ‘모친의 호미’는 바라보는 눈에 유정하다. 내가 다른 것은 고장에 세워진 생활사박물관에 모두 기증하면서도 이것만은 가지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앞으로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서 바라볼 참이다.

살아생전 불효도 사죄하고 추모의 마음을 가다듬고 싶어서다. 사람은 미욱하게 부모가 세상 뜬 후에야 뒤늦게 후회를 한다더니 내가 마치 그런 경우여서 호미를 볼 때마다 사무치는 불효의 마음만 회한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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