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나그네입니다 / 권 현 옥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0. 3. 20. 07:08

본문

                                  나그네입니다 / 권 현 옥


 

 나그네는 나간 사람이란 뜻이다. 지금은 집을 떠나 떠도는 사람이나 길가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 자기 집을 찾아온 낯선 사람의 뜻으로도 쓰인다. 북한이나 중국 조선족 사이에서는 남편을 나그네라 부르는 걸 보면 나간 사람이란 원래의 뜻이 남아 있긴 하다.

  장마가 계속되자 그는 나가지를 못했다. 출근을 위해 양말부터 신던 그는 오늘, 순서라는 것이 없어졌다. 소파에 앉아있다 다시 침대 끝에 잠시 앉아있더니 신문에 난 강원도 숯가마에 가자고 했다. 서서 타는 참나무가 숯이 될 때까지, 불꽃을 껴안고 있던 게 황토숯가마다. 그 속에 들어가 습한 몸과 마음을 빼내고 살 깊숙한 곳에서부터 가벼워져 보자는 것인가. 두말 않고 따라나섰다. 안개가 걷힌 산길은 말갛고 한적했다.

 

 그는 며칠 전 사표를 냈다. 나는 30년이 넘도록 집에서 나가는 그를 보아왔는데 이제 그 가 직장에서 나갔다. 일주일째 다려진 셔츠가 옷걸이에 그대로 걸려있다. 30년 넘게 입은 와이셔츠, 아침이면 그와 서로 바쁘게 낚아채던 사이여서 몸이 셔츠에 들어가는지 셔츠가 몸을 감싸는지 몰랐는데 이제 바쁜 마음 없이 조용히 바라보는 사이가 되었다. 셔츠와 그는 두 개의 존재로 나뉘어졌고 서로에게 나가 있었다. 나는 갑자기 셔츠를 다리지 않아도 됐다.

 

 숯가마 앞에 가니 다행히 몇 팀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장마철이라 누가 와 있을까 걱정이 됐던 차였다. 단체로 온 팀과 부부 팀이 있어서 늦게 도착한 우리로서는 안심이 되었고 가마에서 달구고 나오면 심심찮게 그들의 이야기를 눈감고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모든 사람은 다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것과 삶의 철학자가 되어간다는 것과, 안 듣는 것처럼 누워있지만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과 멋대로 떠드는 것 같지만 곁의 사람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 눈치 채지 않을 만큼만 모른 체했다.

 

 그러다 단체팀이 일어나더니 나갔다. 조용해져서 조금 후련한 감도 있었는데 작은 개울소리를 몰고 온 조용한 시간은 곧 심심함도 몰고 왔다. 잠시 후 이번엔 부부팀이 일어나서 나갔다. 갑자기 재미가 없어졌다. 우리만 남았으니 한적하고 좋다 하기엔 지루함이 빨리 왔고 불안했다. 시계를 보니 4시 반이었다. 가마의 열에 몸을 적시고 나와 앉아있자니 트럭이 소리를 내며 가마 앞에 섰다. 젊은 청년이 내리고 차양으로 쓰인 천막을 뜯어냈다. 비가 안 와서 뜯어내나 보다 했다. 그것을 잘 접어 트럭에 싣더니 가마입구에 앉아 등만 밀어 넣고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하고 있다. 나는 일꾼들이 일하다 말고 가마에 찜질도 하는구나 하며 쉬고 있었다. 매표소에 있던 여자가 우리쪽으로 오더니 먹던 옥수수 반쪽을 잘라 나에게 주고 옆으로 가서 먹고 있었다. ‘사람이 없으니 빨리 정리하고 싶어 우리에게 가라는 표시를 하는 것인가싶었다.

 

  “몇 시까지 하나요?”

 

  6시까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450분이니 그런 뜻이 아니었구나, 5시까지만 쉬고 가야겠네하고 누워서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가마 앞에 앉은 젊은 남자도 꿈쩍 않고 앉아있고 여자는 주위를 맴돌았다. 5시가 되었다. 우리가 일어나려고 할 때 또 다른 한 남자가 나타나 우리를 지나쳐 시계 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걸려있던 시계를 집어 들었고 시계바늘을 한 바퀴 돌리고 원래대로 걸어놓았다. 6시로. 핸드폰을 열어보니 6시였다. 가마 앞 시계가 1시간 느리게 돼 있었던 것이다. ‘아하, 그래서 우리가 일어나기를 기다린 것이구나, 말은 못하고.’ 우리가 일어나자 그들은 곧바로 멍석을 치우고 나무판을 꺼내 트럭에 실었다. 누가 서두른 것도 아니고 누가 늑장을 부린 것도 아닌, 다만 시계가 1시간 잘못된 상황이었다. 나는 마음이 나쁘지 않았고 가만히 기다려준 그들이 고맙고 흐믓했다.

 

  떠날 때를 알아서 떠나는 것과 떠날 때를 기다려 주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만 그 사이에 시계의 오류가 있었을 뿐.

 

  그 자리를 떠나는 것, 그것이 나가는 것일지 모른다. 나그네처럼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정한 나가야 할 때와 누군가 정해놓은 나가야 할 때, 때로는 아무도 모르는 때도 있다.

 

  수없이 나간 세월, 엄마의 양수에서 나가고 집밖으로 나가고 엄마의 손길에서 나가고 때론 의지에서 나갔다. 직장에서도 나가고 내 마음에서도 나가고 네 마음에서도 나갔다. 이기심과 틀과 속박에서부터 나가려고 노력했고 욕심에서 나가고 애증으로부터도 나가려고 무단히 애를 써온 삶이 아닌가. 그리고 또 다시 편한 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어서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유행가에서 그렇게 읊어댔나 보다.

 

  앞만 바라보면 나간 것이고 등을 돌리고 바라보면 들어온 것. 시각에 따라 나간 사람도 되고 들어온 사람도 되는 시간의 문 앞에서 기꺼이 나그네임을 느낀 요즘이었다.

 

  그가 그렇듯 나도 익숙한 일상에서 나가고 있었다.

 


'추천우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향기를 듣다 / 최 민 자  (0) 2020.03.22
바람의 지문 / 김희자  (0) 2020.03.22
내 안의 빈집 / 심선경  (0) 2020.03.20
천상병이라는 풍경 / 김훈  (0) 2020.03.16
까닭 / 김용옥  (0) 2020.03.14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