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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 김 홍 은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0. 3. 1.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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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면 / 김 홍 은

                                                                       

  부슬부슬 봄비가 내린다.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도 아니다. 아무런 이유도 두지 않고 정처 없이 걷다가 발길 닿는 곳에 머물고픈 심정이다. 봄비는 유년의 친구도 그립게 하고, 실연한 첫사랑연인도 생각나게 한다. 봄비가 내리는 날은 월악산에서 화전민들과 살아가던 젊은 날을 보내던 그곳에도 가보고 싶다.

 

 그날 월악산 꼬부랑재 능선에는 보슬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정부의 화전정리 시책사업으로 국유지에 일군 화전에다 낙엽송을 심던 첫날이었다. 밭주인의 아내는 산비탈을 몸부림치며 심어놓은 묘목을 뽑아 내던졌다. 차라리 우리가족을 죽이라며 산천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나는 그녀가 다칠까봐 붙들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조림을 하러 나온 마을 사람들도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가슴 아파했다.

 

 화전민들은 가난하지만 마음은 봄비 같았다. 봄이 오기가 무섭게 잔설 속에서도 산골짜기를 한 평이라도 밭을 넓히느라 눈을 피해가며 나무뿌리를 뽑아내고 땅을 일구어 놓은 화전이다. 봄이면 먹을 양식이 없어 풀뿌리 나무껍질로 춘궁기를 넘기다 부황이나 병이 들던 사람들. 한번은 밭을 일구다 알지 못하는 풀뿌리를 캐먹었다가 한동안 사경을 헤매다 정신을 차린 후, 알고 보니 미치광이 알뿌리였더라는 사연도 봄날에 아련히 밀려온다.

 

 가엾게 살아가던 사람들.

 

 가난으로 시름은 깊어도 마음만은 평화롭던 화전민들이었다. 내 것 네 것 따질 것 없이 자연과 하나가되어 살아가는 월악산기슭은 그들의 터전이었던 것을.

 

 화전을 없애버리고 다시 산으로 돌려주어야하는 어쩔 수 없었던 지난날이 홀연한 기억이 아프게 다가온다. 서로는 가난해도 나눔의 정으로 어려운 삶을 다독이며 함께 살아가던 월악산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아련히 봄비로 젖어든다.

 

 봄이 오면, 몰래 화전을 일구다 산화가 일어나는 바람에 산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던 날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사람의 마음이 저마다 각각이다가도 산불이 났을 적에는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산을 지켰다. 불길을 잡는데도 요령이 있어야 한다. 어느 때는 불을 이기지 못하여 하는 수없이 맞불을 놓는 때도 있다.

 

 맞불을 지를 적에는 더욱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을 내려야한다. 아무렇게나 맞불을 지르는 게 아니다. 지형과 능선을 이용한 방화선을 순식간에 만들어 불길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협심과 지혜가 필요하다. 맞불은 위에서 아래로 서서히 타 내려가도록 기다려야 한다. 성급한 불길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봄 불은 여우불이라고 하지 않던가. 다 꺼진 듯, 하다가도 다시 살아나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한다.

 

사 람이 살아가는 데도 맞불이 있다. 맞불이란 극한 상황에서나 사용함이다. 이제는 봄이 되어도 화전도 화전민도 사라진지가 오래다. 다만 인류의 역사 속에 단어로만 남아 가련했던 삶으로 기억될 뿐이겠지.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아 깊은 골짜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결소리는 봄을 일깨우는 소리다. 경칩이 지나면 밤이 이슥하게 간간이 까르르르르 까르르르르륵, 울어대던 산개구리 울음소리.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떨리는 음률이다. 긴 동면에서 깨어나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며 가냘프고 애절하게 들리던 생명의 소리를 듣고 싶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문풍지는, 매칼없이 사그락 사그락 대며 파르르 떨리다 울려대고, 들창가로 간간히 들려오는 처마 끝의 빗방울 소리에 잠 못 이루던 봄밤. 꺼져가는 호롱불마저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어 어찌할 줄 모르던 그런 밤이 다시 그립다. 홀로 잠들던 깊어가는 밤은 은은한 달무리에 젖어 살며시 피어나 봄을 장식하는 생강나무꽃 향기에도 취해보고 싶다.

 

 봄비가 살며시 내리는 날, 산천은 어느 때보다도 포근해져온다. 메마른 나뭇가지에도 속잎이 트고 땅에도 바위틈에도 파란 생명이 돋아나면 마냥 즐겁다. 밤에 곱게 내리는 봄비는 어쩌면 깊은 생명을 이어주는 수줍은 타는 여신女神 같다. 아침이면 초목은 제각기 고운색깔을 드리우고 산새의 울음도 정답게 들린다. 봄비가 그치고 산자락에 깔려있던 비안개도 거치고 나면 봄날의 잠든 한 조각 씨앗도 눈을 뜬다. 물오른 나뭇가지의 꽃봉오리에 맺힌 아름다운 물방울을 마음의 오색실로 꿰어보고도 싶다.

 

 봄이 오면 마당가에서 부지런히 씨감자를 고르던 부모님도 아련히 떠오르고, 첫 순산을 하고난 아내가 양지바른 마루로 나와 하얀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던 모습도 그립다.

 

 봄이 오면 생명의 소리가 있어서 좋다. 도시에서는 아름다운 봄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봄이 와도 곱고 순수한 화전민 같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렵다.

 

 왜 봄 같은 사람은 없는 건가. 봄비 같은 사람은 될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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