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바람이 싱그럽다. 발현發現을 통해 존재가치를 알리는 바람의 애무에 온몸을 맡긴 바다는 그와 더불어 춤을 춘다. 여린 바람은 탱고의 선율이 되고 석양이 녹아들어 황금빛으로 물든 바다는 무한한 관능官能 미를 발산하며 일렁인다. 커피 향에 이끌리어 먼 길을 달려 여기까지 왔다. 오감을 흔들어 깨우는 향내에 사로잡혀 도착한 곳. 석양이 내려앉아 붉게 물든 바다를 따라 펼쳐진 해변에 커피 전문점이 즐비하다. 커피의 거리답다. 삼삼오오 거리를 누비는 풋풋한 청춘들로 해 초록의 싱그러움이 충만하다. 향기가 질펀하다. 그들만의 언어가 대화의 숲을 이루고 있다. 별나게 갖추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빛을 내는 젊음이 아름답다. 왠지 조금 시고 떫어도 용납해 줘야 할 것 같다. 성숙을 향해가고 있는 저들 속에 우리들의 젊었던 날이 투영된다. 여기저기 나름의 특색을 지닌 모양새를 갖추고 오가는 발길을 붙잡으려 눈길을 보내는 커피 전문점 중에서 향과 맛과 품새까지 갖춘 곳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저곳 탐색 아닌 탐색을 한 끝에 결국은 객관적인 데이터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지극히 세속적인 내 안목으로 살피다보니 바리스타 자격을 부여하는 심사위원의 집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곳에 발길이 머문다.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전망도 좋은 데다 손님도 많아 보인다. 많은 이들이 간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평소의 개똥철학을 믿고 그곳으로 들어선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 3층에 들어서니 춤추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드넓고 광활하다. 바다도 심상心想을 흔드는 마력을 지닌 커피 향에 취했는가. 춤사위가 더욱 깊어져 보인다. 각기 다른 곳에서 발원한 물들이 그들의 지향점인 바다에서 만나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는 저들의 속내는 어떤 것일까. 숱한 이야기들을 품고 해원의 바다에 이르러 속살 부비며 살아가는 저들을 보며 우리네 삶을 생각한다.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갓 볶아 신선한 원두를 방금 내려 크레마가 곱게 앉은, 조금은 시고 떫고 쌉쌀하며 구수하고 꽃향기까지 어우러져 오묘한 맛이 나는 커피를 아주 조금씩 음미하며 춤추는 바다의 속내를 유추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바다색을 닮은 아이들과 뒤섞여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도 하고, 오감을 흔들어 깨우는 향을 숨 쉴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닌가. 좋은 자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멋을 탐하는 이들이 모두 선점해버렸다. 전망과는 거리가 먼 구석자리에 엉거주춤 앉아서 찻잔을 내려놓지 못한 채 일어났다 앉았다 호시탐탐虎視耽耽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찻잔이 코앞에 있건만 향기가 느껴질 리 없다. 따가운 눈총을 보내던 동반자가 보다 못해 옷자락을 잡아 앉힌다. 채신머리없이 뭐하느냐는 표정이다. 포기하니 평안이 찾아든다. 좋은 자리가 나기만 하면 재빨리 달려가는 이들을 향해 곱지 않은 심정이 될뻔 했던 마음을 내려놓으니 다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들과 함께인 것만으로도 좋다. 향도 날아가고 떫은맛만 나는 커피지만 달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기꺼이 행복한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커피 거리와 연결되어 있는 해변도로를 따라 길게 펼쳐져 있는 송림이 아름다운 길 위에 선다. 좀 전의 커피 거리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젊은이들은 간 곳 없고 세월의 무게로 중후해진 이들이 바다와 송림과 벗하며 삼삼오오 앉아 있다. 누가 구분지어 놓았는가. 좀 듬성듬성 섞여 있어도 좋으련만. 이곳에는 아름드리부터 둘레가 몇 뼘밖에 안 돼 보이는 어린 나무들까지 크고 작은 소나무들이 이웃하며 함께 살아간다. 어떤 것은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자랐는가하면 가지가 옆으로 뻗어 이웃을 침범한 것들도 있고 태풍에 가지가 부러져 온전치 못한 것들도 있다. 송림松林이 무성한 길을 걸으며 솔향을 숨 쉬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살이에 지친 심령이 위로가 되고 쉼을 얻기에 족할듯하다. 수령이 많아 이웃하고 있는 튼실한 나무의 어깨에 의지하여 서 있는 노송老松에 눈길이 머문다. 해풍을 맞고 자라서인가 담홍淡紅색이던 수피樹皮가 검붉어지고 혼자서는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노쇠해졌음에도 그의 모습은 당당하다. 노쇠한 몸을 이웃의 튼실한 어깨에 기댄 채 살아가지만 의연하다. 젊은 날 내 어깨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내어주었음을 상기하며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기댄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생의 희로애락을 감내하고 꿋꿋하게 살아 낸 삶의 연륜이 녹아 있는 그의 품새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느낀다. 혈기 왕성한 튼실한 나무 역시 그것을 알고 있고 그도 때가 되면 누군가에게 기대야 함을 알기에 기쁘게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어깨를 내어준 이나 기댄 자 모두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모습에 숙연해진다. 울창한 송림 사이로 석양이 내려앉고 있다. 황금물결 일렁이는 바다와 더불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솔향이, 알싸한 커피향이, 바다 냄새가 청량제가 되어 내게 스민다. 이 순간만큼은 바다와 송림과 내가 하나가 된다.
서로 부대끼며 보듬고 살아가는 자연에서 사람살이의 지혜를 배운다. “서재에서 책을 읽듯 숲이라는 책을 읽을 줄 알면 인생에 새로운 학위가 주어진다(에머슨).”고 하지 않던가.